[고려인 이주 150주년 특별연재-25] 북극성처럼 빛난 김병화 농장
[고려인 이주 150주년 특별연재-25] 북극성처럼 빛난 김병화 농장
  • 한국외국어대학 글로벌문화콘텐츠연구센터
  • 승인 2014.07.12 08: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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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제이주 직후에 우즈벡공화국 내의 한인들이 정착한 곳에서는 당국의 부족한 지원 속에서도 콜호즈들이 조직되기 시작했다. 타쉬켄트주 내에도 <북극성>(‘김병화’ 콜호즈), <레닌>, <북방의등대>, <전위>, <키로프>, <몰로토프>, <새로운삶> 등의 한인농장들이 조직됐다.

한인들 특유의 근면성과 생존을 향한 투지는 중앙아시아의 황무지 개척으로 이어졌고, 점차 극동에서와 같은 경제적 안정과 물질적 부를 축적해 나가기 시작했다. 그 중에서도 타쉬켄트주 중치르칙구역의 <북극성> 콜호즈의 농업개척의 역사는 단연 독보적이며, 그 중심에 바로 한인 이중노력영웅 김병화가 서있다.

<북극성> 콜호즈, 즉 <김병화> 콜호즈의 역사는 1937년 강제이주 이전인 극동시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1929년 연해주 미하일로프카지구의 리포프카마을에 전 안드레이 등, 20여명에 의해 콜호즈가 조직됐다.

당시 전 안드레이가 콜호즈에 <북극성> 이라는 명칭을 붙였으며, 콜호즈 초대회장으로 최희태(1929-32)가 선출됐다. 한인 50여가구가 소속된 이 콜호즈에서는 주로 벼와 조 농사를 지었다. 이후 콜호즈는 김낙선(1933-37), 김경욱(1937) 등에 의해 지도되어 갔는데, 이들 모두 강제이주를 전후로 탄압에 희생되고 말았다. 강제이주 직후 <북극성> 콜호즈는 우즈베키스탄의 타쉬켄트주 중치르칙구역에 자리를 잡았고, 콜호즈의 대표로 이봉호가 선출됐다.

이 무렵 예비군관으로 장기 군복무를 마친 김병화는 중치르칙구역의 <새길> 콜호즈에서 건설사업을 지도하며, 구역 당 및 소비에트 기관들의 주목을 받고 있었다. 얼마지나지 않아 1940년도부터 김병화는 당시 가장 뒤쳐져 있던 <북극성> 콜호즈의 대표로 선출됐다. 이때부터 김병화의 탁월한 지도 하에 <북극성> 콜호즈의 농업개척이 시작됐다.

<북극성> 콜호즈는 늪지대를 매립하여 농장지대를 조성했으며, 1939-1940년 사이에는 수확량을 두배로 증대시켰다. 또 2차대전 시기에는 밀 867톤과 목화 163톤을 수확해 내고, 이를 토대로 전투기 생산에 221만 1천 루블을 기증했으며, 1944년에는 콜호즈에 수력발전소가 건설되기에 이르렀다.

1941-1945년 기간에 한인 콜호즈들은 경지면적을 3배나 늘였고, <북극성> 콜호즈도 약 5배로 늘여 4년동안 1,080헥타르의 토지를 개척해 내었다. 이 기간동안 목화와 벼농사를 위한 파종 면적은 약 10배정도 증가했으며, 1헥타당 17첸트네르(1.7톤)의 목화가 수확되던 이 곳에 한인들이 오면서 1헥타르당 30첸트네르씩 수확이 나오기 시작했다.

김병화의 지도에 힘입어 1946-50년 시기에는 1헥타르당 4-5톤의 쌀을 생산해 내었고, 일부 작업반들은 8톤까지 생산해 내었다. 그 결과 콜호즈가 문을 연지 7년째인 1948년에는 <북극성> 콜호즈에 대한 소식이 중앙아시아 전역에 퍼지게 됐다. 1950년대 들어서 발전을 거듭하던 <북극성> 콜호즈는 재정적으로 빈곤한 콜호즈들의 구제정책의 일환으로, 1952년에는 <쿠출륙>, 1953년에 <크질 쿠치>, <양기투루무쉬>, 1959년에 <또이체파>, <가이드마스>등의 타민족 콜호즈들을 통합하여 다민족 대형복합콜호즈로 개편됐다.

이어지는 농업적인 성과로 콜호즈는 체계적으로 안정이 되어갔다. 1957년 현재 주력 재배품목이 되어버린 면화는 1000헥타르 규모로 경작했으며, 벼는 300헥타르, 밀은 500헥타르, 콜호즈 내에 총 1800여 헥타르의 경작지를 보유하게 됐다. 물질적이고 문화적인 수준 또한 크게 향상됐다.

700여세대가 거주하고 있는 콜호즈 내에는 중학교, 유치원, 탁아소 등의 교육시설과 문화궁전, 병원, 법원, 목욕탕, 약국, 정미소, 발전소 등의 기타 문화 및 생활편의 시설 등이 갖추어 졌으며, 초기의 토벽집들 대신에 튼튼한 벽돌집들이 건축됐다.

뿐만 아니라 공화국 내 각급 교육시설들에서 미래 재원들인 183명의 콜호즈원 자녀들이 공부를 하고 있었다. 초기 108가구로 콜호즈가 시작됐음을 감안해 볼 때, 커다란 발전을 이루었다고 할 수 있겠다. 당국은 콜호즈의 높은 생산성으로 식량생산에 기여한 것과 김병화의 탁월한 지도력을 높게 평가하여 1948년, 1951년 두 차례에 걸쳐 사회주의 노력영웅 칭호를 내렸다. 이후 콜호즈에는 수십명의 노력영웅들이 배출됐다.

<북극성> 콜호즈는 사회주의 이중노력영웅을 김병화를 포함해서 총 26명의 노력영웅(한인 25명)과 415명의 수훈자들을 보유한 우수한 콜호즈로 성장했다. 김병화는 다민족 콜호즈가 되어버린 <북극성> 콜호즈 내의 여러민족들이 화합하며 발전해 나가도록 탁월한 지도력을 발휘했던 것이다.

<북극성> 콜호즈의 경제적, 문화적 여건은 해가 갈수록 성장했다. 1939년에 106,000루블이었던 콜호즈의 소득은 30년이 지난 1969년에는 4백만 루블로 증가됐다. 또 콜호즈의 관개경작지 면적은 총 2600헥타르로, 밀과 보리를 경작하는 경지면적은 1000헥타르까지 증가됐다.

또 이전에는 목화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던 상황에서도 매년 1헥타르당 30첸트네르씩의 목화를 생산해 내었고, 10여년째 1헥타르당 50~55첸트네르씩의 벼를 생산해 내었다. 1971년대에 이르러서 <북극성> 콜호즈에는 13개 민족의 콜호즈원들이 근무를 하고, 콜호즈 내 5개 거주구역에 6000명의 콜호즈 식구들을 거느린 대규모 콜호즈로 한 층더 성장했다.

콜호즈의 주요 작물인 목화는 지난 5년간 1헥타르당 평균 29.7첸트네르씩의 수확을 거두어 왔다. 또한 콜호즈에는 각종 트랙터가 120대, 목화수집기 60대, 자동차 40대, 기타 많은 기계들을 보유하게 됐다. 1971년 소련 최고위원회는 꼴호즈에 대해 노동붉은훈장을 수여했고, 이듬해에는 소연방 50주년 기념훈장이 수여됐다.

인구 또한 크게 늘어 1976년에 9,012명에서 1980년에는 9,973명에 달할 정도로 콜호즈는 모든 부문에서 최고를 달렸다. 1974년 5월 7일 <북극성> 콜호즈의 절대적 지도자였던 김병화가 사망했다. 이후 <북극성> 꼴호즈는 우즈벡 법령에 의거 이중노력영웅의 이름을 기려 <김병화> 콜호즈로 개칭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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