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기고] 나의 인생 流浪記
[해외기고] 나의 인생 流浪記
  • 윤영목<오레곤 6.25참전 국가유공자회>
  • 승인 2014.09.06 0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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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영목 회장
윤영목 미국 오레곤 6.25참전국가유공자회장은 한국에서 태어나고 어렸을 중국 만주에서 살았으며, 성년이 되어서는 미국에서 생활했다. 6.26전쟁 때는 동부와 중부전선에 투입됐던 그는 미국에서 농업박사 학위를 받아 관련분야 전문가로 일하게 됐는데, 은퇴 후에 운명적으로 중국 심양에서 농업 지도를 하게 된다. 한국 중국 미국을 경험한 파란만장한 삶이다.

윤 회장은 본지에 “한국이 심양을 선양이라고 부르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지적한 바 있다. 중국어 발음으로 센양으로 하든가 또는 한자식으로 심양으로 우리나라가 불러야 한다고 밝혔던 것. 이것이 인연이 돼 최근 한국, 일본, 미국 시민으로 살아야 했던 사연을 전하게 된 것이다. 다음은 윤 회장의 80여 년의 인생 스토리다.<편집자 주>

나의 인생流浪記
나는 1931년 경상북도 靑松읍에서 태어났으며 증조부모님과 조부모님 슬하에서 모친과 함께 생후 몇 년을 보냈다. 이때 선친께서는 서울의 京城醫學專門學校에 재학 중이었다. 졸업과동시에 선친은 함경도 만주국경의 惠山鎭 도립병원에 발령이 나서 여기서 우리 세 가족이 2년을 보내다가 1935년 그 당시 滿洲國 奉天省 開原시에서 촉탁의로 초빙을 받아 우리가족의 만주생활이 시작됐다.

그 당시 開原은 일본인이 완전 장악하고 있었고 조선족인구도 상당수였으며 정식 의사는 일본인 의사 한 명뿐이어서 선친이 의원을 개원하자 조선족은 물론 일본인. 중국인으로 부터 대환영을 받고 일약유명인사가 됐다.

나는 이곳에서 국민학교를 다녔고 양친을 따라 주변의 큰 도시인 奉天(瀋陽)과 新京(長春)에도 가끔 구경 갈 수 있었다. 新京은 일본인들이 滿洲國 首都로 계획한 질서정연한 도시로 웅장한 정부 청사에 넓고 길게 뻗은 도로들이 인상적이었다.

奉天 역시 일본색이 완연했다. 지금도 기억에 남는 것은 淸나라 시조 누르하치와 홍타이지의 故宮과 거대한 東陵과 北陵이다. 이외에 일본 백화점 ‘三中井’ 위층에 사람 말을 따라하는 앵무새가 있어 그 앵무새와 재미있게 대화도 해볼 수 있었다.

제2차 대전이 치열하던 1944년 봄에 나는 開原국민학교를 졸업하자 일본인 교장선생의 특별추천으로 만주국에서 이름난 명문 일본인중학교인 旅順중학교에 입학했다. 旅順은 露日전쟁의 전적지로 유명한곳이며 이곳에서 나는 학교기숙사에서 통학했으며 철저한 군대식 생활에 공부보다 교련과 근로봉사 시간이 더 많았다.

戰勢가 악화일로로 치닫던1945년 7월, 내가 2학년 재학 중에 갑자기 고향의 조부님이 旅順에 오셔서 이제 모두 귀국해야한다고 담임선생님을 만나 재학증명서를 얻어 開原으로 돌아왔다. 조부님은 손수 짐을 꾸리기 시작하셨으며 이때 조부님의 六感에 일본의 敗戰을 감지하신 것으로 알고 있다.

이때 나의 동생이 5명이나 늘어나 부모님과 조부님 합해서 9명이 귀국길에 오르게 됐다. 그러나 선친은 병원정리와 지역유지들과의 인사차 혼자 남으시고 남은 식구 모두는 해방 1개월 전인 1945년 7월에 무사히 고향으로 되돌아 올 수 있었다.

지금 생각해도 조부님의 결단이 없었더라면 우리식구들은 어린동생들과 해방 후의 무법천지 만주에서 막심한 고생을 겪었을 것으로 믿어진다. 불행하게도 일반화물로 발송한 짐들은 8.15 직전의 혼란 속에 모두 분실되고 말았다. 선친은 開原에서 8.15해방을 맞이하였으며 소련군이 진주하자 지역 조선인대표로 조선인의 안전을 위해 소련군과 교섭을 하시다가그해 10월에 중국인 有志친구의 보호 하에 安東(丹東)까지 오시고 거기서 단신으로 북한 땅을 거쳐38선을 넘어 무사히 고향에 도착하셨다.

선친은 大邱高普(현 경북중학교)출신으로 마침 모교인경북중학교 일본인校醫의 병원을 인수해서 우리 가족은 해방 후 大邱에서 정착, 새출발을 하게 됐다. 나는 선친의 모교인 경북중학교에 편입하여 1950년 그 당시 6년제 학업을 마치자 6.25 전쟁이 발발하여 친구들과 함께 그해 8월에 조국방위를 위해 국군에 입대했다. 입대와 동시 간부후보생에 지원하여 1950년 12월에 육군포병소위로 임관 후 주로 중부와 동부전선 전투에 참전했다. 또한 1952년과 1954년 2차에 걸처 미국육군포병학교에 파견되어 포병 전반에 관한 교육을 받을 기회가 있었다. 1955년 초에는 육군소령으로 진급됐으나 중단된 학업을 계속하기위해 마침내 1956년 9월, 만6년1개월의 군복무를 마치고 군복을 벗게 됐다.

그동안 10여개 미국대학에 제출한 입학원서중 워싱턴州소재 워싱턴주립대학에서 등록금면제등 조건이 좋아 부모님의 양해를 얻고1957년 9월, 청운의 꿈을 품고 이 학교에 입학했다. 조부모님 고향땅에 농토가 있어 전공을 원예학으로 정하고 학업을 시작했으나 군대생활 6년간의 머리를 되살리는 일은 그리 쉽지 않았다.

더구나 7년 후배 동급생들과의 경쟁이 그러했다. 열심히 노력한 결과 무사히 학사과정을 수료하고 보니 학업을 더 계속하고 싶어 미쉬간州소재 미쉬간주립대학교 대학원 병충학과에서 대학원생겸 조교로 월급도 받고 석사과정 공부를 시작하게 됐다. 이때 미국에는 구라파에서 새로 들어온 해충인 穀葉蟲이 밀, 보리등 곡물에 막대한 해를 끼치고 있어 미국농림성에서 이를 퇴치하기위한 거액의 연구비가 나와 있었다. 이곳에서 5년간 연구 생활을 하면서 碩士와 博士과정을 마치게 되니 드디어 나의 도미유학의 꿈이 성취된 것이다. 대학원 재학 중에 이 학교에 유학 온 한국여성을 만나 결혼하고 女息도 얻었다.

農學博士학위를 취득하자 미국중부, 콜로라도州에있는 농업연구소에 농생물 과장으로 취직이 되어 이곳에서 1996년 말 은퇴할 때까지 30년간 근무했다. 은퇴 후에도 중국방문은 2년 더 계속됐다. 1986년에는 중국 흑룡강성 哈爾賓소재 경공업부 농업연구소와 呼蘭소재 농업부甜菜연구소의 초청으로 옛고장 만주(현 東北)땅을 41년 만에 다시 방문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됐다. 呼蘭에서는 나의 강의를 듣기위해 東北지역 각연구소에서 50명 정도가 와있었으며 5일간의 강행군 강의를 해냈다. 나의 중국어 실력으로는 강의가 불가능해서 哈爾賓시에있는흑룡강朝鮮新報社의 조선족기자가 통역을 맡았다.

강의가 끝나자 나는 통역해준 기자를 대동, 哈爾賓역으로 향했다. 밤 기차를 타고 내가 자란 開原으로 가기위해서였다. 기차가 출발하기 전에 역구내에 安重根의사의 伊藤博文 저격 장소 표식이 있나하고 찾았으나 발견하지 못했다.

기차는 밤새도록 달려 아침 6시 반에 開原역에 도착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驛건물과 驛前 풍경이 옛날 그대로였다. 41년 만에 찾아와본 나의 제2의 고향인 開原, 이곳에 내 자신이 와 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고 신기했으며 이루 표현 못 할 심경으로 시내를 두루 산책했다.

내가 살던 집은 서점이 되어있었는데 문이 잠겨있어 집안에 들어가 보지 못했다. 일부 조선족 인사들을 만났는데 상당수조선족인구가 귀국하지 않고 그곳에 남아있다고 들었다. 조선족학교도 방문하여 교장선생과도 인사를 나눴는데 이분 부친이 저의 부친병원에 자주 왕래해서 선친을 잘 알고 있다고 했다.

이외의 다른 노년층도 선친을 잘 기억하고 있었다. 그 당시 開原은 외국인에 개방돼 있지 않아 오후에 開原을 떠나 鐵嶺을 거쳐 瀋陽으로가서 일박하면서 시내구경하고 다음날 哈爾賓으로 돌아갔다. 중국에서 용무가 끝나면 瑞典으로 가야했기에 다시 北京으로 돌아가서 香港-印度뉴데리-英國론돈을거쳐 瑞典회의에 참석하고 미국으로 돌아왔다. 난생 처음으로 세계일주를 한 셈이다.

1986년의 초도방문이 계기가 되어 그 후 1998년 완전은퇴 할 때까지 東北四省을 위시, 山東省과 新彊自治區에까지 10여차래 출장방문하며 농업지도와 공동연구에 종사할 수 있었다. 그중 延吉과 龍井 중간지점에 위치한 延邊農學院을 방문했을 때 이 학교를 열심히 운영지도하고 있는 조선족學長이하 모든 분들의 후대에 따뜻한 동족애를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圖們에가서 두만강건너 살벌한 북한 땅을 봤을 때 나는 또다시 분단의 아픔과 민족의 비애를 뼈저리게 느끼며 무거운 발걸음을 돌려야했다. 또한 新彊自治區農科院초청으로 烏魯木齊(우루무치)시에 두 번씩이나 가서 그곳원주민 維吾爾(위구르)족 연구원들을 대면했던 것과 부근 天山 山脈 중터의 관광지天池에 가 본 것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히 남아있다.

1998년의 마지막 방문 시는 해방 전 내가 다닌 旅順중학교를 보기 위해 大連을 거쳐 旅順에 갔는데 이곳역시 외국인 방문금지구역이라 제대로 구경을 하지 못했다. 그 당시 학교와 기숙사모두가 軍兵舍로 사용되고 있어 내부구경은 할 수 없었다. 다행히 여순감옥이 박물관으로 개방되어있어 들어가서 혹시 安重根의사의 흔적이 있을까하고 유심히 봤는데 찾지 못했다.

콜로라도 농업시험장에서 30년간의 직장생활을 끝마치고 두남매자식이 살고 있는 西北美에 위치한 시애틀市로 이사를 가서 우리부부의 노후생활이 시작됐다. 알고 보니 이 지역에 우리 국군 6.25 한국전 참전용사들이 근 100명이 살고 있었으며 마침 그곳에 와계시던 장군님을 모시고 “서북미6.25참전동지회”를 조직, 나 자신이 초대회장으로 추대되어 봉사하다가 2006년 醫療界에 종사하는 사위/여식식구가 오레곤주, 포트랜드市로 轉職하게되어 우리부부도 이들을 따라 현주소로 이사 오게 됐다.

이곳에 이사 오니 이 지역에 거주하는 우리 국군출신 6.25참전노병들이 우리도 단체를 조직해야 한다고 해서 2007년 “오레곤 6.25참전 국가유공자회”를 조직하여 오늘날까지 내가 회장직을 맡아보고 있다. 그동안 이 지역 미군참전용사회 회원들과 긴밀한 유대관계를 유지하면서 한미친선과 우호증진에 기여한 나의 공로가 인정되어 2013년에는 본국 재향군인회 박세환 회장의 표창장을, 2014년에는 윤병세 외교부장관의 표창장을 수여받는 영예로운 포상사례도 있었다.

이제 와서 지난날을 도리켜 보면 나의 83년의 길고도 짧은 인생역정이 결코 순탄치 않았음을 스스로 느끼고 있다. 일제 강점기에 태어나 한때는 나의 正體가 무엇인지 방황도 해봤다. 1945년 8.15해방의 기쁨도 잠간, 한반도는 남북으로 갈라져 드디어 6.25전쟁이 발발, 그 비극 속에 휘말려 동족상잔의 참극을 직접 체험도 해봤으니 인생의 쓴맛, 단맛을 두루 겪어 본 셈이다. 내가 태어났을 때는 日本시민였고, 해방 후는 한국시민으로 복귀했으나, 渡美후 미국시민이 됐으니 내 평생에 3개국 국적을 가져보게 된 셈이다.

나는 나 나름대로의 꿈이 있었고 그 꿈이 온갓 시련을 겪으면서 실현됐기에 나 자신 후회 없는 인생을 걸어왔다고 생각하면서 오늘 나의 인생유랑기를 끝맺을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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