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문화 탐방기] 여순감옥을 찾아서
[역사문화 탐방기] 여순감옥을 찾아서
  • 이은우<중국 영구시 빠위첸 29중 1학년>
  • 승인 2015.04.07 1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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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오른쪽 두번째가 이은우 학생. 최근 동북3성연합회장 이취임식에서 손명식 회장이 수여하는 표창을 받았다.
2014년 5월31일 오전 7시30분에 중국 영구 신라원이라는 한국식당 앞에서 영구와 빠위첸 지역의 초중고 유학생들, 학부모 그리고 이 역사탐방을 주최해 주신 영구한국인회 임원들과 대련 여순으로 가는 버스를 탔다.

한국도 아닌 중국에서 우리나라 역사탐방을 하니, 조금 신기하기도 했고 책으로만 접했던 안중근 의사의 발자취를 직접 보고 느낄 수 있다고 생각하니 설렜다. 버스안에서 한인회 홍찬수 사장의 역사 이야기를 듣고 창밖의 풍경을 사진기로 찍다 보니 어느새 여순에 도착했다.

오전 10시쯤 여순감옥에 도착했다. 입구는 러일전쟁과 안중근, 신채호 선생 등 일제 강점기의 수많은 선조들의 독립운동 발자취를 찾으러 온 사람들로 북적였다. 여순감옥은 1904년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면서 러시아 야전병원을 증·개축하여 조선 청나라 러시아의 독립투사와 정치범을 수용할 목적으로 만든 감옥이다.

대문 안쪽으로 들어가자 제일 먼저 저장실이 눈에 띄었다. 저장고는 동절기에 수감됐던 사람들의 식량을 저장했던 곳이다. 그 다음 오른쪽으로 돌아서 가다 보니 감옥의 입구가 나왔다. 안으로 들어가자 감옥의 축소모형, 머리말과 죄수복이 있었다.

더 안쪽에는 죄수들의 수용소와 안중근 의사의 감방이 있었다. 안중근 의사가 수감을 했던 독방은 감옥을 경비하는 간수부장 사무실 옆에 있으며 감방에는 안 의사께서 마지막까지 사용하시던 붓과 벼루 먹 등 문방사우(文房四友)가 놓여있었다.

감옥의 내부는 마치 미로처럼 복잡했다. 그리고 벽면에는 독립운동가들의 여러 증언이 있었다. 그 증언에 나와 있는 일본군들은 너무나 잔인했다. 증언을 보면 볼수록 일본군에 대한 분노심은 커졌다. 한편으로는 그런 일본군의 만행이 역사 속으로 사라지지 않고 증거로 남아있는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강제노역 공장 15곳을 보았다. 더 들어가자 교형장이 나왔다. 교형장 옆에는 작은 쪽문이 있었다. 그 문은 죽은 시체들만 드나든다고 해서 ‘시구문’이라고 한다. 우리는 마지막으로 안중근 의사 추모 관에서 안중근 의사에게 묵념을 했다.

추모관에는 안 의사가 가족에게 보낸 편지, 어머니가 안 의사에게 보낸 편지 등이 있었다. 그리고 안 의사의 어머니 편지를 보고 감동을 받았다. 버스에 올라타서 다음 목적지인 여순 관동 고등법원을 갈 때, 많은 생각이 들었다.

먼저 일본군의 그런 행위에도 굴하지 않으신 독립 운동가들이 너무 자랑스럽고 대단하단 생각이 들었고 다음으로는 이런 만행을 행하고도 아직까지 진정한 사과도 하지 않고 있는 일본에 대한 분노가 일었다. 마지막으로는 이런 사실을 아직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었던 나 자신에 대한 부끄러움이 생겼다.

그리고 여순감옥을 통해 다른 독립운동가들에 대해서도 알게 됐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고 말한 단재 신채호 선생은 세수를 하실 때도 일본군에게 고개를 굽힐 수 없다며 일어선 상태로 하셔서 옷이 다 젖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회영 선생님은 많은 사재를 털어 만주 군관학교를 지어 독립군을 교육시키며 동북의 호랑이라 불렸다고 한다.

여순감옥에서 한 15분쯤을 더 가니 여순 관동고등법원에 도착했다. 법원에서 위층으로 가는 계단이 있었다. 재판당일 안중근 의사는 왼쪽 계단으로, 일반인은 오른쪽으로 올라갔다고 한다. 계단의 천장은 보통 천장과 다르게 상당히 낮았다. 위층으로 올라가자 안중근 의사를 재판한 법정이 나왔고 법정에는 안중근 의사가 앉았던 의자가 아직도 보존돼 있었다.

우리는 법정 안에서 10분짜리 영상을 보았다. 영상을 다 보고 다음 방으로 가니 고문기계들이 보였다. 처음 고문기계들을 볼 때는 어떻게 쓰였던 건지 짐작이 안 갔는데 그 밑에 있는 설명을 보고 일본군이 정말 상상할 수 없이 잔인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의 가죽을 벗겨내고 사람에게 물을 넣고 배를 터트려 죽이는 등 상상도 할 수 없었던 고문이 자행됐다.

다음 목적지는 백옥산 탑 이었다. 그 탑의 높이는 66.6m. 일본군이 러일전쟁에 승리한 후 전사한 군인들의 위패를 모셨던 탑이다. 점심을 먹은 뒤 우리는 탑을 구경했다. 비록 탑 위에는 못 올라갔지만 산 위에서 내려다보는 여순은 바다가 둘러싸인 아름다운 항구도시였다. 이런 아름다운 도시에 아픈 역사의 현장이 있다는 것이 마음 아팠다.

백옥 탑을 구경 한 뒤 산 밑에 있는 러시아가 일본과 전쟁에서 승리하였다고 기념으로 1955년에 세운 승리탑을 구경했다.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두 국가가 서로 이겼다고 세운 탑을 보니 기분이 이상했다.

20분 정도를 더 가서 동계 관 전투현장에 도착했다. 동계 관 전투현장은 산속에 있었다. 산에는 요새를 만들기 위해 판 구멍이 많았는데 구멍 주위에 있는 총알자국과 대포자국이 그 당시 전쟁에 치열함을 보여주고 있었다. 마치 눈앞에서 전쟁을 보고 있는 것 같았다. 일본이 아시아의 주인이 되기 위해 우리나라뿐 아니라 아시아의 여러 나라들을 침략하고 아픈 전쟁의 상처들을 남긴 것을 보고 다시는 그런 전쟁을 겪지 않기 위해 내가 할 일은 무엇일까 생각해 보기도 했다.

모든 일정을 마치고 돌아 올 때는 학생들이 버스 앞자리에 앉아서 소감을 말할 기회를 가졌다. 나는 우리가 여순을 갈수 있도록 도와주신 분들께 감사하다고 말했고 일본군의 만행 때문에 우리나라의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피해를 본 게 가슴 아프지만 일본군의 만행이 기록으로 남아 있어서 다행이라고 말했다.

이번 역사탐방으로 나는 얻은 게 많았다. 우선 우리나라의 역사 지식을 얻었다. 나는 한국에서 역사를 배우지 않고 와서 한국의 역사에 대해 아는 게 별로 없었다. 이런 나에게 역사탐방은 우리나라의 역사를 알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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