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하칼럼] 추석한가위 단상
[청하칼럼] 추석한가위 단상
  • 박완규 주간
  • 승인 2015.09.26 09: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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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완규 편집주간
어릴적 추석풍경을 떠올리노라면 지금도 미소가 절로 나온다.

추석 전날이면 송편에 소고기 산적, 명태전, 파전까지 평소 꿈도 꾸지 못할 음식들이 달콤한 냄새를 풍기며 어린 우리를 몸살나게 하곤 했다. 동네 마을 공터에선 어른들이 모여 윷놀이를 하기도 하고 막걸리 한 사발 들이키곤 “으라차차” 기합을 넣는 씨름대회도 열렸다.

추석 차례상을 준비하러 시장에 가는 길에 꼭 검정고무신 한 켤레나 빨갛고 노란 옷가지를 챙겨 오셨다. 우리는 잠을 자면서도 행여 이것들이 달아날까봐 마음 졸여 한밤중에도 몇 차례씩 눈을 뜨고 확인하곤 했고, 그래도 안심이 안돼 가슴에 품고서야 잠들었다.

그때쯤이면 서울로 돈 벌러 떠난 동네 형이나 누나들이 선물보따리를 한아름씩 들고 신작로 한편의 늙은 가지가 축 늘어진 소나무나 느티나무 밑으로 잇따라 모습을 드러내곤 했다. 어린 우리들에겐 빨간 넥타이에 검은 양복을 입거나 모직으로 만든 투피스 정장을 차려입은 형들이나 누나들은 최고였다. 이들로부터 처음 듣는 서울이야기에 눈이 휘둥그레지곤 했었다. 지금 생각하면 참 촌스러운 추억이지만.

한가윗날이 되면 평소 못 먹어본 음식을 양껏 먹어 불룩해진 배를 내밀고 의기양양하게 고샅을 돌아다니곤 했다. 한꺼번에 기름진 음식이 들어가 설사를 하는 아이들도 많았다. 한편으론 형편이 어려워 차례상 차리기조차 어려운 이웃들에게는 음식을 장만한 집들이 십시일반으로 전이며 나물이며 보내줬었다.

50세 전후라면 누구나 간직하고 있을 추석에 대한 회상은 60~70년대 영화의 흑백필름처럼 비가 내리면서도 언제나 수채화처럼 담백하고 정겹다.

김부식의 삼국사기에는 추수가 끝난 뒤 신라 6부의 처녀들이 길쌈을 하는 내기를 하며 음식대접을 한 것이 추석의 유래라고 적혀있고 이규경의 오주연문장전산고(五州衍文長箋散稿)에는 한가위 풍속은 가락국에서 시작됐으며 온 나라 사람들이 음식을 빚어 이웃과 함께 나눠먹고 음주가무를 즐겼다고 돼 있다.

2천여 년을 우리와 함께 해오며 언제나 설레던 추석이 올해는 여느 해보다 풍요롭고 넉넉하게 느껴지는 건 비단 나만의 생각은 아닌 듯싶다. 가슴을 쓸어내릴 만큼 위험천만했던 중동호흡기장애군 메르스로 인해 세계한인회장대회, 세계한상대회 등 세계 한인들 모임 행사가 이맘때로 늦춰진 까닭이다. 머나먼 이국 땅에서 살아가는 월드코리안들이 이래저래 고국을 찾을 기회가 많아진 것이다.

農家秋夕最良辰 농가추석최양신
歡笑村村醉飽人 환소촌촌취포인
海市山場來去路 해시산장래거로
優婆鼓舞唱回神 우파고무창회신

'농촌에서는 추석이 제일 좋은 명절이라
웃음이 넘치는 마을마다 술과 음식이 지천일세
사람들 오가는 바닷가 시장 산촌 장터 길에는
사당패가 북치고 노래하며 신령을 부르누나'

조선 순조 연간의 시인 유만공(柳晩恭)이 노래한 추석(秋夕)의 풍경처럼 부디 우리의 월드코리안들이 기나긴 세월 동안 어렵고 힘들었던 고단한 여정을 푸근한 고향산천에 내려놓고, 넉넉하고 여유로운 한가위를 즐겼으면 좋겠다.

한국을 찾은 월드코리안들 모두가 조상의 은덕을 기리며 진정한 가족의 의미를 깨닫는 뜻 깊은 복전(福田)의 가배맞이가 되길 소망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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