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륙春秋] 인면도화(人面桃花)
[대륙春秋] 인면도화(人面桃花)
  • 팽철호 국민대학교 중어중문학과 교수
  • 승인 2017.11.25 0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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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에 들었던 사람을 다시는 만나지 못함

당(唐)나라 시대에 최호(崔護)라는 사람이 과거시험 공부를 하다가 바람을 쐬러 밖으로 나갔다. 때는 사뭇 봄기운이 느껴지는 청명(淸明)이었다. 옛날 우리나라에도 ‘답청(踏靑)’이라고 하여 봄 들놀이를 즐겼던 날이었으니 공부한답시고 방구석에 처박혀 궁상을 떨기에는 너무나도 좋은 계절이었다.

한참을 노닐던 최호는 갈증을 느끼고서 가까운 데에 있는 집으로 찾아가 물 한 사발을 청했다. 나그네가 부르는 소리에 문을 연 사람은 묘령의 아리따운 아가씨였다. 두 청춘 남녀는 첫눈에 상대방이 마음에 들었지만, 겉으로는 그저 물 한 사발을 건네고 마시고 하며 의례적인 인사만 하고 헤어졌다.

문제는 다음 해에 발생했다. 작년 그 일을 일과성 일로 접어두고 아무런 동요 없이 과거 공부에 매달리고 있던 최호는 봄기운이 약동하는 청명절이 다시 찾아오자 계절의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또다시 집을 나와 교외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때 부지불식간에 작년 오늘 날짜에 있었던 일이 생각났다. 발걸음도 어느새 작년 그 아가씨가 물을 건네주던 그 집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아가씨의 집에 도착해보니 문이 굳게 잠겨 있었다. 누구 있느냐고 불러보아도 인기척이 없었다. 집에서 느껴지는 기운도 마치 이사를 떠난 뒤의 텅 빈 집 같이 썰렁했다. 무슨 일이 있어서 일가가 이사한 것이라고 판단한 최호는 심중에 어떤 미련이 있었던지 그 집 대문에다 다음과 같은 시를 써 놓고 아쉬운 발걸음을 되돌렸다.

去年今日此門中(거년금일차문중, 작년 오늘 이 문 속에서는)

人面桃花相映紅(인면도화상영홍, 사람 얼굴과 복사꽃이 서로 붉게 비치었는데)

人面不知何處去(인면불지하처거, 사람 얼굴은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고)

桃花依舊笑春風(도화의구소춘풍, 복사꽃만 여전히 봄바람에 웃고 있네)

분홍빛 복사꽃과 어우러진 젊음의 혈기가 발그레한 아름다운 젊은 여인의 자태와 생기 넘치고 화사하게 그려지고 있다. 그러나 ‘복사꽃만 여전히 봄바람에 웃고 있네’에서는 아름답기는 하나 서글픔이 배어 있다. 상실의 아픔이다.

사실 그 아가씨의 집은 이사를 간 것이 아니었다. 무슨 일이 있어서 일가족이 집을 비운 사이에 최호가 그 집을 찾아갔던 것이다. 얼마 후 집으로 돌아온 그 아가씨는 자기 집 대문에 씌어 있는 이 시를 보고서는 금세 그 시를 쓴 이가 누군지 알 수 있었다. 작년 청명절에 자기 집으로 와서 물을 얻어 마셨던 그 서생이 틀림없었던 것이다. 그 기억이 되살아나는 순간, 아가씨는 온 몸의 힘이 빠지더니 급기야 혼절해버렸다.

작년 그 때 청년 최호를 보는 순간 아가씨는 첫눈에 그가 마음에 들었다. 그렇지만 차마 내심을 표현할 수 없었던 그녀는 그저 지나가는 인연이려니 하고 기억 저편에 묻어두고 잊으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그런 그가 1년이 지난 오늘 다시 찾아와 작년 자신과의 만남을 회상하는 시를 쓴 것을 보고는 기쁘지 않을 수 없었다. 그의 기억 속에도 자신이 자리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쁨도 잠깐, 시의 문맥을 보아하니 그 청년은 자신을 더 이상 만날 수 없을 것으로 판단하고 단념한 것이 아닌가. 순간 기쁨은 절망으로 급전하고, 그 충격으로 그녀는 실신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어쩐 일인지 최호는 그 다음날에도 바람을 쐬러 나갔다. 이번에도 발걸음은 자신도 모르게 아가씨의 집 방향으로 향하고 있었는데, 그 때 문득 그 쪽에서 곡성이 들려왔다. 자세히 들어보니 그 소리는 아가씨의 집 쪽에서 났다. 다가가보니 과연 아가씨의 집에서 곡소리가 흘러나왔다. 초상이 난 듯했다. 최호는 어찌된 일인지 궁금하여 그 집 사람들에게 물어보았더니 아가씨가 어제 대문에 써 놓은 시를 보더니 갑자기 혼절하고 급기야 숨이 멎어버렸다고 했다.

뜻밖의 이야기를 들은 최호는 자신이 쓴 시 때문에 아가씨가 죽었다고 생각하자 죄책감이 엄습해왔다. 그래서 솔직하게 자신의 신분을 밝히고 가족들의 양해를 구한 다음 아가씨의 영구 앞으로 나아가 향을 사르고 영혼을 위로했다.

그 순간 아가씨의 관 속에서 무슨 소리가 들려왔다. 사람들이 깜짝 놀라 관을 열어보니 죽은 줄 알았던 아가씨가 깨어나고 있었다.

그 다음 이야기야 쉽게 유추할 수 있을 것이다. 깨어난 아가씨와 최호는 천생연분이라 생각하여 결혼식을 올렸고, 최호는 또 당당히 과거에 급제했으며 바라는 대로 아들딸을 낳고서 부부가 행복하게 해로했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가 이어지는 것이다.

이 시는 ‘도읍의 남쪽 집에다 쓰다’라는 뜻의 <제도성남장(題都城南莊)>이라는 제목으로 되어 있다. 시 자체도 예쁘고 시에 얽힌 이야기도 아름다워 당대에 널리 애송됐다고 한다. 더욱이 이 시의 시어인 ‘人面桃花’는 성어로 거듭나서 인구에 회자되고 있다. 그러나 성어로서의 ‘인면도화’는 시에 얽힌 이야기가 해피엔딩인 것과는 달리 ‘그리워하는 사람을 다시는 만나지 못함’이라는 원래의 안타까운 의미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자연의 순환은 변함이 없지만 인생은 무상하다’는 좀 더 심각한 의미로도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최호(崔護)는 자(字)가 은공(殷功)이고, 박릉(博陵, 지금의 하북성 定縣)사람으로 알려져 있지만, 언제 태어나서 언제 작고했는지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정원(貞元)연간에 진사에 급제했으며 영남절도사(嶺南節度使)를 지냈다고 한다.

팽철호 국민대학교 중어중문학과 교수
팽철호 국민대학교 중어중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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