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상문의 古今醉舌] 고자와 맹자의 인간본성 논쟁과 바람직한 인간상
[서상문의 古今醉舌] 고자와 맹자의 인간본성 논쟁과 바람직한 인간상
  • 서상문(환동해미래연구원장)
  • 승인 2018.07.05 1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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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고자(鼓子)의 어원을 밝힌 글을 쓰면서 중국 제자백가의 한 사람인 告子(?~?)를 떠올렸다. 생몰연대가 정확하지 않은 그는 성은 고씨, 이름은 ‘不害’로 맹자(BC 372~289)와 동시대를 산 인물이었다.

고자는 고대 서양의 에피쿠로스 학파(Epicurean School)에 비견되는 중국 고대 전국(戰國)시대 최고의 쾌락주의자였다. 쾌락주의(hedonism)는 서양철학사에선 통상 인생에서 쾌락을 가장 가치로운 목적으로 삼아 모든 행위와 의무를 여기에 기준을 두는 윤리적 자세를 말한다. 여기엔 쾌락의 성격을 크게 감각적, 순간적 쾌락을 추구하는 쪽과 정신적, 지속적 쾌락을 추구하는 쪽의 두 유파가 존재했다. 성향을 따지자면 고자는 후자에 속한 인물이었다.

고자는 사람이나 동물이나 모두 동일한 본질을 지닌 욕망의 존재라고 봤다. 사람이 잠을 자고, 음식을 먹고, 성욕을 해소하는 것은 동물에게도 있는, 그야말로 존재로서의 본성이기 때문에 그 본성대로 사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라고 설파했다. ‘생긴 대로가 성이다’(生之性)라고 한 고자의 말에 이 의미가 내재돼 있다. 그것들은 생명 있는 존재라면 어떤 것에도 있는 타고난 생리적 욕망이라는 이유에서다.

고자가 말한 대로 생리적 욕망이 본성일까? 본성은 본능과 어떻게 다른가? 이 주제는 명쾌하게 정의할 수 있는 개념이 아니다. 본능과 본성의 자전적 의미는, 전자는 선천적으로 타고난 능력을 말하고, 후자는 선천적으로 타고난 성질을 말한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본능이란 육체에 강제되는 생물학적인 원리 혹은 원칙임에 반해, 본성은 육체적 수준을 넘어서는 존재의 이유, 목적, 본질을 가리킨다.

고자는 만물은 본질적으로 하나라고 본 일원적인 관점에 서서 존재의 본질이라는 측면에서 개나 소의 본성이 사람의 본성과 다르지 않다는 주장을 폈다. 가령 개나 소도 배가 고프면 먹을 것을 찾고, 졸리면 자고, 구타를 당하면 아프기도 하고 무서움을 느끼며, 성의 욕구를 느끼고 행한다는 것이다.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스스로 배가 고프면 먹을 것을 찾고, 졸리면 잠을 자게 된다는 것이다. 그는 이것이 사람과 어떻게 다른가 하고 묻는다. 여기에 내포된 의미를 조금 더 확장시키면 사람뿐만 아니라 동물에게도 仁義禮智信, 喜怒哀樂愛惡欲과 수치 등의 성정이 있다는 것으로 귀결되지 않을까?

고자의 주장에 대해 맹자는 이렇게 반박했다. 개나 소의 본성과 사람의 본성은 다르다. 즉 동물과 인간의 본성을 동일시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주장이다. 그 근거로 인간과 짐승의 본성이 서로 다르다는 점을 든다. 즉 짐승은 인의예지신, 희노애락애오욕, 수치 등의 성정이 없지만, 인간은 짐승과 달리 그러한 성정을 지닌 존재라는 것이다. 맹자는 본성을 개체 자신의 의지나 혹은 부단한 교육을 통해 제어 가능한 것으로, 본능은 제어가 불가능한 것으로 선험적(a priori)으로 보고 있다. 내가 보기에 이는 선험적인 도덕관념을 인간에게만 부과한 논리의 비약을 범한 오류다. 인간과 짐승의 성정 유무에 대한 명백한 논리적 근거를 대진 않고 그냥 인간에겐 있고, 짐승에겐 ‘없다’라고 단정만 했기 때문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맹자는 심지어 이 같은 성정에다 사람만이 하늘과 교감하는 천명(天命)을 안다는 의미까지 부여했다. 동물에겐 본능이 있지만 인간에게는 본성이 있다고 본 맹자에게 본능이란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움직이는 氣의 상태로서 의지에 대한 자각이 없는 생체 혹은 생리현상이라고 정의했다.

맹자는 본성이란 개체의 의지나 이성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기 때문에 동물은 인의예지신 등의 본성을 가진 인간과는 감히 비교될 수 없는 존재임에도 양자를 비교하려는 것은 사람과 동물의 種差를 무시하는 억지라고 주장했다. 과연 맹자의 말대로 본성은 인간에게만 있는 것일까? 또 고자의 주장대로 동물에게는 본능만 있는 것일까? 나는 아니라고 본다. 언뜻 보면 일리 있어 보이는 논리전개인 듯하지만 맹자의 이 논리에는 작지 않은 오류가 있다. 왜냐하면 무릇 생명 있는 모든 것은 유사하거나 동일한 욕망을 가지고 있고, 개체의 존속을 위해서 그 욕망을 행하면서 사는 게 有情의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단지 인간과 짐승의 차이는 인의예지신, 희노애락애오욕과 수치 등을 자각하는 마음의 크기가 다를 뿐이다. 동물이나 인간은 모두 본능과 쾌락에 따라 행동한다. 본능을 제어할 수 있는 힘이란 국가 주도의 교육과 문화의 전승이라는 명분으로 인간만이 가지는 천혜의 특장처럼 부여된 것이 아닌가?

나는 兩非와 兩是의 변증법적 종합을 취하고자 한다. 고자와 맹자의 주장은 각기 오류와 함께 동시에 부분적 진리도 담고 있다고 본다. 앞에서 거론된 四端이나 七情 같은 성정들 가운데 仁義를 대표적인 예로 이 주장의 근거를 부연해보기로 하자. 먼저 仁義에서 어질다는 의미의 仁이라는 한자는 그 어짐이 두 사람을 전제하는 게 특징이다. 즉 어짐이란 사회성의 공유를 지향하는 것으로서 자신에게가 아니라 남에게 행하고 베푸는 것이지 자신에게 행하는 어짐은 의미가 없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인간이 그렇듯이 동물 또한 자기 가족이나 동일한 군체(群體)에게는 어짐을 베푼다. 송사리들이 모여 같이 유영하고, 개처럼 주인을 위기에서 구해주고 자신은 죽거나 평생 주인을 섬기는 동물도 적지 않다. 또 조류들처럼 새끼를 지극 정성으로 보호하는가 하면 뱀 따위는 적의 위협이나 공격에도 물러나지 않고 대항하다가 자신이 희생되기도 한다.

義라는 말은 羊+我의 假借字로서 옛날 중국에서는 희생의 제물(祭物)로 쓰이는 양을 뜻했다. 현대 중국 문자학의 연구성과에 의하면, 톱(鋸)의 형상을 하고 있는 我라는 글자는 톱으로 양을 갈라 희생의 제물로 바친다는 뜻이었다. 즉 '義'자는 犧牲(희생)이라는 ‘犧’의 첫 글자(初字)다. 羊자 아래에 脚(각)이라는 하체가 보이는 것이 羲(희)라고 했고, 그것을 동물 전체에 대하여서 犧라고 했다. 이것이 결국 제물로 바쳐진 牲體(생체)에 犧牲物로서 결함이 없어 신의 뜻에 부응하고 잘 들어맞는다고 해서 ‘맞다’, ‘옳다’의 뜻이 생겨났다. 오늘날 우리가 자주 쓰고 있는 義擧, 正義, 義理, 義行 등의 한자들은 모두 羊을 어원으로 하고 있으며, 제물에 바친 희생이라는 말에서 파생된 단어들로서 모두 예외 없이 희생을 의미의 고갱이로 갖는다. 이 대목은 적어도 내게는 우리가 義라는 말을 아무 생각 없이 쓸 게 아니라 자각하면서 써야 한다는 말로 들린다.

맹자의 말대로 인의예지신, 희노애락애오욕, 수치 등을 인지하는 기능인 본성은 비교적 인간에게만 더 크게 부여된 天惠일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모든 인간이 그것들을 곧이곧대로 수용하고 행사하는 건 아니다. 주위를 둘러보라. 세상에는 자식이 부모를 살해하거나 부모가 자식을 성폭행 하는 등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짓을 저지르는 자들이 흔하지 않은 게 아니다. 그들의 범죄 관련 뉴스들을 심심찮게 듣는다. 세상엔 인간의 형상을 하고 있으면서도 사람임을 포기한 인면수심의 非人들이 넘쳐 나고 있다. 그만큼 인면수심의 패륜적 존재들이 적지 않다는 말이다.

반대로 동물이라고 해서 본능으로만 사는 게 아니다. 동물도 義나 情을 행하거나 표하기도 한다. 예컨대 코끼리는 뒤처진 새끼를 보듬고, 사자는 새끼의 실수를 묵인하기도 한다. 또 개나 소들 가운데는 도살장에 끌려갈 때 슬픈 표정을 짓거나 눈물을 흘리는 경우도 있다. 심지어 끌려가지 않으려고 완강하게 저항하는 개와 소들도 있다. 끌려가면 죽임을 당할 것을 직관으로 알고 두려움을 느끼는 것이다. 이를 보면 동물도 인간과 같이 희노애락을 안다고 볼 수 있다. 동물이지만 사람의 정리를 가지고 행동하는 존재라는 점에서는 인간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고자의 논리와 주장이 오히려 진리에 한 발 더 가까이 가 있을지도 모른다. 다만 인식론적 입장에서는 맹자보다는 고자의 입론이 더 나은 논리적 타당성을 지닌 듯이 보이지만, 사회성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맹자의 주장도 틀린 것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요는 개인의 참구를 통하든, 교육을 통하든, 궁구(窮究)가 있으면 궁행(躬行)이 따라야 “비교적” 완전에 가까이 다가서는 인간이 될 수 있다고 본다. 나는 인간의 삶이란 개인 영역을 넘어서 “사회적 관점에 국한”할 경우엔 이른바 지행합일과 언행일치의 이타적 삶을 요체로 하는 것이 바람직한 인간상이라고 본다. 그것이야말로 동물에게는 없고, 인간만이 할 수 있는 능력이기 때문이다.

지행합일과 언행일치의 사회적 실천, 이타적 삶을 살려면 의를 행할 때 살신성인 정신이 전제돼 있듯이 자신이 남들을 위해 봉사하고 희생할 각오가 돼 있지 않으면 안 된다. 입으론 사회에 관심을 가진다거나 사회적 약자나 불합리함에 눈을 감지 않고 산다느니, 정의를 지킨다느니, 의리를 지킨다느니 노래를 부르는 사람들은 많다. 하지만 실제로 자신의 말을 행동으로 옮기는 사람은 보기 드물다. 말은 번지르르하게 하면서도 정작 몸으로 의를 실천해야 할 상황이 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슬그머니 뒤로 꽁무니 빼버리거나 공익은 뒷전에 두고 자신의 잇속만 챙기는 이들이 대부분이다.

사소한 약속이지만 자신이 한 말을 지키며 살려고 노력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바쁜 현대의 도회적 삶이 자신이 한 약속을 잊게 만드는 것에 성찰 없이 익숙한 탓도 있지만, 건성으로, 혹은 상대가 듣기 좋아라고 하는 말이 대부분이다. 내가 지금까지 반평생 이상을 살면서 경험해오는 바다. 의로움이 바탕이 되는 지행합일과 언행일치의 이타적 삶을 산다는 것은 그만큼 행하기가 쉽지 않다는 얘기다. 이것이야말로 고자가 말한 본능을 뛰어넘는 경계이자 맹자가 말한 사람과 짐승 사이에 존재하는 본성의 크기 차이 보다 더 큰 종차가 아닐까?

사람임과 사람다움이 빠른 속도로 퇴색돼 가고 있다. 여러 가지 이유들 중에서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지행합일과 언행일치를 포기하고 살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그래서 非人이 신변 가까이에서 흔히 볼 수 있게 된 세상이다. 이들은 포톤벨트(photon belt)를 지나면서 솎아질 수 있을까? 포톤벨트란 영적 뉴에이지 서적의 저자로 유명한 버지니아 에신(Virginia Essene, 1928~)이 지구 태양계는 곧 포톤벨트를 맞게 될 것이라고 한데서 알려진 개념이다. 포톤벨트는 현대 과학의 급속한 진전에 힘 입어 세상이 바야흐로 인간 의식의 전환도 가속화시키는, 즉 은하단계라 이름 지은 더 높은 秀勝한 존재로 나아갈 수 있는 시간 동안 영적 변화의 일시적인 창문을 나타낸다고 하는데, 버지니아는 인류가 이 단계에 진입한 듯이 보인다고 했다.

버지니아의 말대로 비인간적인 사람들은 과연 포톤벨트를 거치면 도태될 것인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허나, 그것과 별개로 우리는 적어도 운명처럼 주어진 고행을 반복한 그리스신화 속의 시지프스(Sisyphus)처럼 고자에서 맹자로 이행하는 과정을 반복하면서 지행합일과 언행일치의 이타적 삶을 살려고 의식하며 노력해야 할 것이다. 세상 끝나는 날까지 바람직한 삶을 포기하지 않는 한 말이다. 사람임과 사람다움을 잃지 않는 바람직한 인간이 되고자 한다면 말이다.

서상문(환동해미래연구원장)
서상문(환동해미래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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