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주열의 동북아談說-37] 중국의 ‘베순’과 한국의 ‘스코필드’
[유주열의 동북아談說-37] 중국의 ‘베순’과 한국의 ‘스코필드’
  • 유주열(외교칼럼니스트)
  • 승인 2019.05.07 08: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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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은 중국인민의 영원한 외국인 친구(中國緣十大國際友人) 10인을 선정해 그들의 활동을 기리고 있다. 캐나다 출신의 외과의사 노먼 베순(Norman Bethune)이 10인 중 가장 많은 표를 얻었고 “중국의 붉은 별”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에드가 스노우는 네 번째로 마크돼 있다.

금년은 의사 베순 즉 중국 이름으로는 바이츄언 다푸(白求恩 大夫)가 항일 전선에서 부상병을 치료하다 사망한지 80주기가 되는 해다. 그를 칭송하는 동상이 스쟈좡(石家庄) 등 중국내 여기 저기 서있고 그의 이름으로 세워진 의과대학이 많다. 중국에서는 금년 가을 80주기 기념행사가 성대히 개최될 것으로 보인다.

1939년 11월 베순은 하북성 팔로군 의무대에서 부상당한 군인을 수술하고 있었다. 그는 실수로 수술 칼에 손가락을 다쳤다. 그것이 원인이 돼 패혈병(blood poisoning)으로 사망했다. 49세의 한창 나이였다. 그의 갑작스러운 부음을 접한 마오쩌둥은 애절한 추모사를 직접 썼다. 그 추모사가 중국의 초등학교 교과서에 실려 중국인이면 누구나 아는 의로운 외국인이 된 것이다.

베순(1890-1939)은 캐나다 온타리오 그레이븐허스트에서 장로교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목회 활동을 하느라고 어릴 때 자주 이사를 다녔다고 한다. 베순은 할아버지처럼 의사의 길을 걷고자 토론토 대학에 입학했다. 캐나다가 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자 베순은 야전병원 위생병으로 지원하여 프랑스 전투에서 부상을 입었다. 영국에서 치료를 받다가 캐나다로 후송되었고 완치 후에는 대학에 복학하여 1916년 정식 의사가 된다.

그는 함정 군의관 그리고 비행단 의무장교로 복무하고 제대한 후 미국으로 건너가 미시간 주 디트로이트에서 개업하여 외과 수술로 돈을 많이 벌었다. 그는 노동자 등 가난한 환자를 무료로 치료했는데 특히 노동자들이 결핵에 걸려 사망하는 것을 안타까워했다. 베순은 결핵을 사회문제로 파악하여 빈곤 박멸이 결핵을 막을 수 있으므로 사회복지가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판단했다.

1935년 베순은 모스크바를 방문하여 소련의 사회주의적 의료복지에 감동을 받고 귀국하여 몰래 캐나다의 공산당원이 되었다. 1936년 7월 스페인의 프랑코 장군은 인민전선 (Popular Front) 공화정부에 쿠데타(반란)를 일으켜 스페인 내전이 발발했다. 베순은 어니스트 헤밍웨이, 조지 오웰 등 반 파시스트 자유주의자와 함께 프랑코를 반대하고 민주전선 정부를 지원하는 세력에 합류했다. 의사인 베순은 이동 야전병원에서 처음으로 자동차에 이동 수혈대(mobile blood-transfusion service)를 장착하여 출혈로 생명이 위독한 부상병을 대거 살려냈다고 한다.

1937년 6월 스페인의 내전 상황을 알리기 위해 일시 귀국한 베순은 북미의 대도시를 순회하면서 민주전선 정부지원을 호소하는 연설을 하고 다녔다. 베순은 그 해 7월 중국에서 중일 전쟁이 발발하여 중국의 인민이 파시스트 일본과 전쟁을 한다는 것을 알고 필요하다면 중국에 가서 그들을 돕겠다(如果需要 我願意到中國去)는 의사를 밝혔다.

베순은 스스로 중국으로 건너 가 옌안에서 마오쩌둥을 만나고팔로군의 진차지(晉察冀)군구사령부에 배치돼 의무대를 꾸려 최전선으로 들어갔다. 그는 중국의 의무병을 교육하고 중국의 실상을 외국에 알려 의료 지원을 요청하는 성과를 올렸지만 부상병 수술 중 뜻밖의 실수로 죽음을 맞이한 것이다. 1990년 그의 탄생 100주년을 맞아 중국과 캐나다 정부가 공동 디자인한 기념우표를 발행했다. 베순은 중국 땅에 묻히고자하는 자신의 유언대로 스쟈좡의 화북군구 열사능원에 잠들어 있다.

한국에도 베순과 마찬가지로 캐나다 온타리오 출신의 프랭크 스코필드 박사가 있었다. 스코필드 박사는 1916년부터 세브란스 의전의 세균학 교수로서 1919년 3.1 독립운동을 맞아 경기도 화성시(당시 수원군) 수촌리와 제암리에서 일어난 일제의 학살만행의 사진을 찍고 <끌 수 없는 불꽃(Unquenchable Fire)>라는 책자로 기록하여 세상에 널리 알렸다.

스코필드 박사는 일제에 의해 강제 추방돼 1920년 한국을 떠났다가 한국이 독립한 후인 1958년 다시 돌아 와 서울대학교 교수로 재직하면서 불우 이웃을 돕고 약자들의 벗이 되었다. 1970년 한국에서 사망했다.

스코필드(1889-1970) 박사는 영국의 워릭셔 럭비에서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가 그를 출산 후 며칠 지나지 않아 돌아가신 까닭에 계모의 슬하에서 자라게 된다. 아버지는 신학교에서 성서와 희랍어를 가르치는 신학자로서 자녀들에게 자립을 강조하는 엄부였다.

어린 스코필드는 농장에서 일하면서 학비를 벌었으나 신세계 캐나다에 일자리도 많은 것을 듣고 18세의 나이에 단신 캐나다로 이주했다. 그는 농장에서 번 돈으로 온타리오 수의과대학에 입학했다. 스코필드 학생은 과로와 어려운 환경으로 소아마비에 결려 왼쪽 팔과 오른 쪽 다리가 부분적으로 마비가 되었다. 그럼에도 학업에 게을리 하지 않아 1910년 최우등으로 대학을 졸업했다. 졸업 후 토론토의 온타리오 주 보건국 산하 세균학 연구소에 근무하면서 학업을 계속하여 박사학위를 취득한다.

그 때 토론토 출신으로 서울의 세브란스 의전의 올리버 에비슨 교장으로부터 의료선교 요청을 받는다. 에비슨 교장은 호러스 언더우드 박사의 권유로 1893년 한국에 와서 제중원 원장으로 취임하여 많은 활동을 하고 있었다. 1899년 미국 오하이오 출신의 은행가 루이스 세버런스의 기부금으로 숭례문 밖 복숭아골(현재 서울역 앞 연세재단빌딩)에 병원건물을 신축하여 제중원을 세브란스병원(Severance Memorial Hospital)으로 부르고 제중원 의학교는 세브란스 의전이 되었다. 후에 연희동에 확보한 교지에 연희전문학교를 설립 하는 등 오늘의 연세대학교의 기틀을 마련한 사람이다. 연희동은 조선 2대왕 정종이 은퇴 후 일시 살았다는 연희궁(延禧宮)이 있었던 곳이다. 1957년 연희 전문학교와 세브란스 의전이 합쳐지면서 앞 글자를 따서 연세대학교로 이름 지었다고 한다. 연세(延世)는 ‘세상을 이끌다’는 의미도 있다.

에비슨 교장의 요청을 받아 1916년 서울에 온 스코필드 박사는 세브란스 의전에서 세균학과 위생학을 강의했다. 석호필(石虎弼)이라는 한국 이름도 가졌는데 무엇보다 발음이 원음과 비슷하고 석(石)은 자신의 철석같은 의지를 나타내고 호(虎)는 호랑이 같은 근엄성을 보여주면서 필(弼)은 한국인을 돕겠다는 의미와 함께 영어의 알약(pill)과 발음이 같아 특별히 좋아했다고 한다.

1919년 2월 세브란스병원 제약부에 근무하던 이갑성이 찾아왔다. 이갑성은 후에 3.1운동의 33인의 한분이다. 이갑성은 서울지역 학생들을 중심으로 만세운동을 준비하고 있다면서 도움을 청했다. 한국을 위해 일할 때가 되었다는 것을 느낀 스코필드 박사는 학생들에게 한국 독립운동에 도움이 될 만한 국제정세를 파악해 알려주는 역할을 했다.

마침내 3월1일 탑골공원에서 만세의 물결이 일기 시작했다. 스코필드 박사는 현장에서 같이 만세를 부르고 자신의 카메라로 역사의 현장을 담았다. 3.1 운동이 일어나자 총독부의 보복이 시작되었다. 스코필드 박사는 경찰에 잡혀가는 학생을 보면 외국인의 특수 지위를 이용 구해주었다고 한다. 일본사람이 발행하는 영자신문 “서울 프레스”에 여러 차례 투고하여 일본 정부의 만행을 비판했다.

일제는 4월5일 새벽에 일본군 1개 소대가 3.1 운동 주모자를 색출한다는 구실로 수촌리를 포위하고 불을 질러 빠져나오는 사람들에게 총을 난사했다. 4월13일에는 만세운동이 일어 난 제암리를 포위하고 15세 이상의 남자들을 제암리 감리교회에 소집한 후 총을 쏘고 불을 질렀다. 그 소식에 접한 스코필드 박사는 자전거를 타고 현장으로 달려 가 사진을 찍어 보고서를 작성했다. 그해 9월 일본에서 개최된 ‘극동지구 파견선교사 전체회의’에서 3.1운동의 실상을 참석한 선교사들에게 폭로했다.

이러한 스코필드 박사의 반일 활동에 당황한 총독부는 세브란스 의전에 압력을 넣어 계약을 종료시키고 1920년 7월 강제로 출국토록 했다. 스코필드 박사의 이러한 활동으로 3.1 운동의 민족대표 33인에 더하여 34인으로도 불린다.

귀국한 스코필드 박사는 모교인 온타리오 수의과 대학에 교수로 봉직 1955년 정년을 앞두고 퇴직했다. 1958년 한국 정부의 초청으로 방한한 스코필드 박사는 서울대학교 수의과대학의 수의병리학 교수로 학생들을 가르치게 된다. 1968년 한국정부는 스코필드 박사의 공적을 기려 대한민국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했다.

1970년 4월 81세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스코필드 박사는 어려운 사람을 돕고 한국사회의 발전을 위해 애를 썼다. 특히 1960년 13세의 불우한 학생이 스코필드 박사의 도움으로 학업을 마치고 평소 그의 가르침을 받아 서울대학교 총장이 되었다가 나중에는 국무총리가 된 분이 있어 많은 사람들을 훈훈하게 만들었다.

몸과 마음으로 한국을 사랑하고 한국 땅에 묻히기를 원했던 스코필드 박사는 외국인으로서는 유일하게 국립서울현충원의 양지바른 애국지사 묘역에 잠들어 있다.

필자소개
한중투자교역협회(KOITAC) 자문대사, 한일협력위원회(KJCC) 사무총장. 전 한국외교협회(KCFR) 이사, 전 한국무역협회(KITA) 자문위원, 전 주나고야총영사, 전 주베이징총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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