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환칼럼] 우리의 포지티브 법제도가 ‘생각’까지 가두나?
[이종환칼럼] 우리의 포지티브 법제도가 ‘생각’까지 가두나?
  • 이종환 월드코리안 대표
  • 승인 2019.11.18 14: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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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서 주차하면서 당황··· 네거티브 법제도로 전환 시급해

“이런 표지판인데, 주차해도 문제없겠지요?”

샌프란시스코 시내의 재팬타운 도로변에 주차하면서, 파킹안내 표지판 사진과 함께 이 같은 질문을 현지의 지인한테 문자로 보냈다.

표지판은 아래 위로 두 개였다. 위에는 붉은색으로 ‘No Parking, 8 am to 10 am, 매월 1,3주 화요일, 거리 청소’라고 적혀 있었다. 매월 1,3주 화요일 오전 8시부터 10시까지는 도로 청소를 하니 주차하지 말라는 표지판이었다.

하지만 아래의 녹색 글씨가 적힌 표지판은 약간 애매했다. 거기에는 ‘2 Hour Parking, 8am to 6pm, Mon thru Fri, Except Vehicles with area G Permits’라고 적혀 있었다. 해석하자면 “G구역 허가를 받은 차량을 제외하고는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아침 8시에서 오후 6시까지 두 시간 주차”라는 내용이었다.

2시간 주차를 허용하면 ‘2 hours’라고 하지 왜 단수형으로 ‘2 hour’라고 적었는지 하는 정도가 의문이었지만, ‘돌다리도 두드리며 건넌다’는 생각으로 지인한테 물었던 것이다. 캘리포니아주의 교통위반 딱지는 벌금이 많다는 얘기에 겁먹은 탓도 있었다.

회신을 받은 것은 주차하고도 한참 뒤였다. 회신은 이랬다. “월요일부터 금요일 저녁 6시까지는 두 시간 파킹 가능하고, 그 외 시간에는 무제한 파킹 가능하다. 그리고 첫째 셋째 화요일 오전 8~10시까지는 파킹 불가하다.”

내용은 짐작했던 대로였다. 하지만 회신에는 생각도 안 한 내용도 들어있었다. ‘그 외 시간에는 무제한 파킹 가능하다’는 부분이었다. 표지판에는 없는데, 회신에는 그렇게 적어왔던 것이다.

이 회신을 보면서 얼마 전 국내 신문 기사에서 본 미국 법의 ‘네거티브(negative) 시스템’을 얼핏 떠올렸다. 안 된다고 정해놓은 것 외에는 다 허용된다는 게 이른바 미국법의 네거티브 시스템. 허용되는 것만을 적어놓은 우리의 포지티브(positive) 시스템과는 다른 점이었다.

모 일간지 실리콘밸리 주재 특파원으로 파견된 한 기자는 최근 한 기사에서 “한국에서 20년을 운전하다 실리콘밸리에 왔는데 며칠간 도로에서 애를 먹었다”며 자신의 경험을 이렇게 소개했다.

“유턴(U-turn) 때문이었다. 차를 돌려야 하는데 유턴 허용 표시가 없어 초보처럼 계속 직진만 했다. 한참 후에야 다른 차를 보고 깨달았다. 딱히 금지 표시가 없으면 어디서든 유턴해도 된다는 것을. 한국에선 ‘유턴 표지판’ 같은 허락이 있어야만 가능한데, 미국은 명백하게 금지하는 곳 외에는 어디서나 유턴이 가능했다. 말로만 듣던 ‘네거티브(negative) 규제’였다.”

그는 네거티브 규제는 ‘안 된다고 명시한 것’ 외에는 모두 할 수 있는 방식으로, 해보고 문제가 생기면 그때 금지 목록에 추가하면 되는 반면, 한국은 ‘된다고 명시한 것’ 외에는 아무것도 못 하는 포지티브(positive) 규제로, 세상에 없던 신(新)사업이 나왔을 때 한국은 법 조항이 없어 발만 동동 구르지만, 미국은 일단 해볼 수 있는 것이 이 차이 때문이라고 해석했다.

우리식의 ‘포지티브’ 시스템은 이름은 듣기 좋을지 몰라도, 4차산업혁명 시대에는 장애가 되는 게 분명하다. 가령 무인자율주행차 개발도 한 사례다. 그동안 국내 자율주행차 연구 개발은 각종 규제에 발목이 잡혀 왔다. 도로교통법이 ‘운전자는 사람이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어 무인자율주행 모드를 테스트하는 게 불가능하다. 그리고 차량이 일렬로 줄지어 운행하는 군집 주행 실험도 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이런 제약 탓에 세계 최고 수준의 자율주행 택배 모델을 개발한 서울공대의 스타트업은 한국 대신 미국에서 시범 서비스를 선보여야 했다고 한다.

의료분야도 마찬가지다. ‘의료 데이터는 디지털 기기로 주고받을 수 없다’는 규정 때문에 간단한 처방도 일일이 병원을 찾아야 하며, 원격 영상진료도 불가능하다. 이 같은 법 시스템으로 해서는 새로운 발상과 실험을 요구하는 신산업이 싹을 틔울 수 없다.

더욱 큰 문제는 우리의 생각이 제한된다는 점이다. 허용된 것에만 익숙해지는 바람에 미국의 주차 표지판을 보고도, ‘나머지 시간은 무제한 허용’이라는 발상을 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런 ‘생각의 굴레’를 벗기기 위해서라도, 네거티브 시스템으로의 정책 전환이 절박한 시점이라 하겠다.

이종환 월드코리안신문 발행인
이종환 월드코리안신문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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