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광호 기자가 만난 북녘땅-19] 김일성 측근이었지만 말 한마디로 추방된 채노인
[송광호 기자가 만난 북녘땅-19] 김일성 측근이었지만 말 한마디로 추방된 채노인
  • 송광호 재외동포신문방송편집인협회 고문
  • 승인 2021.02.02 1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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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은 어떻게 바뀌어왔으며, 또 어떻게 변화해 갈 것인가? 1989년 이래 북한을 8차례나 방문해 취재한 송광호 토론토 주재 언론인이 방북 때마다 보고 느낀 점들을 시리즈로 정리했다. ‘바뀌어온 북한’에 초점을 맞춘 이 글은 현재와 같은 남북경색국면에서 긴 눈으로 북한의 새로운 변화를 조망하는 데 도움을 줄 것으로 보인다.<편집자주>

평양 새해 공연

토론토에서 우연히 한 탈북자 노인(33년생)을 알게 됐다. 채씨 성을 가진 그는 그때 이미 84세의 나이였다. 한때 북한 김일성 측근이었다고 자신을 소개했다. 당시 탈북자들은 캐나다 입국 시 전부 거짓으로 난민 신청한 것이 탄로 나, 추방 또는 자진 출국 명령을 받고 있던 시기였다. 그들 탈북자는 한국을 통해 캐나다로 입국했음에도 모두 중국이나 타국을 경유해 왔다고 (피)난민 신청한 것이 들통이 나 있던 시기였다. 한국과 공조해 지문 검사 결과 모두 가짜인 것이 판명됐기 때문이다. 탈북자 아닌 탈남자였다.

이 80대 노인 부부 역시 한국에서 입국한 탈북자였으나 남들과는 달리 캐나다영주권을 쉽게 받았다. 또 캐나다 연방정부 특혜로 1년 뒤엔 곧 시민권취득도 약속받았다고 말했다. 나이가 많아 인도주의 이민 혜택을 받았다는 것이다. 그 후 확인은 않았지만 그의 말대로라면 지금쯤은 아마 캐나다 시민권자가 돼 있을 것이다. 캐나다이민 규정은 영주권자에서 시민권 따는 시일이 만3년 이상으로, 보통 4-5년 걸린다. 그런데 캐나다 당국이 고령의 이민자를 1년 만에 시민권까지 준다니 이해가 안 됐다. 사실이라면 무슨 특별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간 채 노인을 대 여섯 번 이상 만나 인터뷰를 가졌다. 그러나 그를 한국 언론행사에 초청하려는 계획이 무산된 이후엔 접촉하지 않았다. 솔직히 다시 연락하고 싶지 않은 분이었다. 내게는 무척 변덕스럽고 그의 처신이 이해가 안 갔다. 하지만 노인 자신 관련한 개인스토리는 꽤 믿음이 갔고 설득력이 있었다. 그 때문에 노인이 밝힌 지난 그의 북한스토리를 소개하는 이유다.

마식령스키장 전경

채 노인을 만날 당시 나는 재외동포 신문방송편집인협회 대표라는 직함을 갖고 있었다. 별 볼 일 없는 형식뿐인 감투였다. 그는 내 명함을 보고는 나를 무슨 큰 인물로 착각했는지 “선생님, 선생님”하고 굽실댔다. 당황되고 거북스러워 계속 만류해도 그렇게 불렀다. 그는 지난 1999년 탈북 이후 중국에서 9년간 살았다 한다. 그리고 2007년 서울 입국 뒤 부인이 사망하자 곧 70대 탈북여성과 재혼하고 토론토에서 난민 신청해 살고 있었다.

그는 김일성 측근이라면서 김일성 주석과 연계된 명칭도 밝히지 않았다. 김일성 비서(중국통역) 일을 한 것으로 추정된다. 또 북한 언론기관에서 오래 일했다고 전했다. 나는 과거 북한 고위언론 간부 활동으로 그를 정기재외언론행사에 초청해 ‘북한시절 핵 관련 등 여러 내용’을 듣고자 했다. 그도 쾌히 승낙했다. 협회의 실질운영자인 한국 박기병 이사장(88세/현재 대한언론인회 회장)과 상의해 초청 건이 결정됐다. 그러자 노인은 금세 다른 요구를 했다. 한국은 탈북자에게 위험하다며 와이프도 함께 초청해 주기를 원했다. 부인 왕복항공권까지 제공해 달라는 것이다.

서울본부로 연락해 전부 그의 뜻대로 해주기로 했다. 사실 예산도 거의 없는 협회 상황에서는 큰 성의 표시였다. 일단 신용카드로 항공권을 모두 구입한 뒤 토론토 출국을 며칠 남긴 시점이다. 저녁에 전화가 왔다. “송 선생님. 아무래도 못 가겠어요” 한다. 짜증이 났다. 탈북자로 인해 늘 사서 고생인가 하는 자조적인 기분이 됐다. “왜요? 갑자기.” “사실 한 달 전 서울에 있는 두 아들(탈북자)도 토론토에 다녀가 한국에 나갈 필요도 없고, 서울은 위험해서 안 되겠어요. 어제 토론토총영사관도 방문해 내 신변보호에 관해 물어봤는데, 책임질 수 없다 하네요.”

평양미래과학자 거리 새 아파트

한심했다. 이 노인네는 한국행을 단순한 개인 나들이로 생각한 것 같다. 또 누가 고령의 일반 탈북자 노인을 국가에서 신변보호조치를 취한다는 말인가. 더 이상 대화가 필요 없었다. “알겠습니다. 다만 항공권을 지금 취소하면 페널티(위약금)가 붙으니 여행사에 알아보세요. 아마 1인당 3백 달러씩 모두 6백달러 정도 될 겁니다. 위약금은 채 선생이 항공규정을 어겼으니 내실 겁니까?” “내야겠지요.” “그럼 저는 곧 행사에 나가니 한국 다녀온 뒤 지불해 주세요” 하고 끝냈다.

한 달 뒤쯤 한번 만나니 돈 준비가 안 됐다는 것이다. 그 후로 더 이상 연락하지 않았다. 그냥 잊기로 했다. 내 실수이니 협회엔 위약금청구도 안 했다. 행사순서는 급히 바꿔 진행했다. 수고를 한 보람도 없이 개인 돈만 잃었다. 한편 생각하니 팔순 노인을 탓하기보다 상대방을 제대로 통찰 못 한 내 실수였다. 급히 무리수를 둔 것이 원인인 듯했다.

한번은 교포신문에 ‘캐나다영주권을 취득한 탈북자 노인 부부 팔순 넘은 생일잔치’ 기사로 채 노인 부부의 한복 입은 사진이 크게 실렸다. 노인과 첫 인터뷰를 갖기 이전 얘기이다. 약 2주 후 채 노인은 북한 심양(선양)총영사관으로부터 두 번 협박성 전화를 받았다 한다. 이 때문에 그는 급히 전화번호도 바꾸고, 인터넷검색에서 해당 내용을 삭제했다. 이후 채 노인은 두려움에 한때 연락이 쉽지 않았다. 소통이 안 되니 그와 첫 만남도 늦어졌다. 여하튼 무서운 세상이었다. 아직 토론토에는 영주권 없는 탈북자들이 수백 명 살고 있다. 누가 누군지도 모르고 친북스파이는 어디든 존재하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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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 노인을 만났을 때 진작 조언한 적이 있었다. 교포신문에 가끔 북한 비난 글을 쓰고 있었기 때문이다. “채 선생님! 이젠 캐나다영주권도 받으셨고, 캐나다 연금으로 매달 1천불 정도 저축이 가능하잖아요. 두 분 건강도 아주 좋으니 교회나 열심히 나가시고, 남들처럼 크루즈 등 관광으로 놀러 다닐 생각을 하세요. 자녀들도 탈북해 서울에서 잘살고 있다니 다행이지요. 북한 일은 당분간 잊고 사세요”라고 전했다.

그러나 그는 아마 집에서 할 일은 없고, 바깥 세계와는 언어가 안 통하니 소일삼아 글을 쓰는 것 같았다. 아는 것은 북한 얘기뿐일 터이니까. 그렇다면 구태의연한 얘기 말고 무슨 새로운 북한 정보라도 밝히든가. 주요 핵심은 오히려 감추는 인상을 줬다. 나와 인터뷰 때도 그랬다. “이 얘기는 쓰면 안 됩니다.” 이런 식이다. 내일모레가 90세에 가까운데 겁도 엄청 많았다.

이 때문에 초청계획 때 수차 다짐을 했다. “정말 핵 관련 얘기 등 김 부자 초창기부터 경험한 내용 그대로 밝힐 수 있겠어요? 행사 때는 세계각처에서 약 40여명 교포언론인들이 참석합니다. 물론 일부 국내언론들도 있고요. 강의내용이 중요해요.” “그럼요. 초창기 핵 문제 등 설명할 게 있어요. 염려 마세요.” 어쨌든 막판에 초청 건이 틀어진 것은 유감이지만 결과적으로 내 책임이 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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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 노인 경력은 다채롭다. 그는 북한 언론계에서 50여년 근무했다. 조선중앙통신 국제국 부국장으로 당대변인, 정부대변인, 기자2급 (8급까지 있으며 2급이 최고급)으로 활동했다. 만수대 창작사 초급 당 비서, 출판검열국 책임지도(초급 당 비서), 조선미술 출판사 부사장, 당 중앙위원회 선전선동부 내부담당 부장 등을 역임했다. 조선미술 출판사 경우 표면상으로만 조선미술사 명칭을 내걸었지만, 실상은 다른 조직이라고 한다.

채 노인 말에 따르면 그는 중국태생이다. 중국 훈춘에서 조선광복군 유복자로 태어났다. 훈춘지역은 중국 연변조선족자치주에 속한다. 중국, 러시아와 북한 등 3개국 국경이 맞닿는 지대이다. 모친도 일찍 여의면서 부유한 중국인 유력가정에 입양됐다. 그의 선친과 가까웠던 중국광복군출신 가정이었다. 중국인은 그가 어릴 때부터 “너는 조선인이나 내 친아들이나 다름없다”며 늘 아껴줬으며, 공부도 중국 최고대학이라 일컫는 북경대학에서 배우게 했다.

중국교포(조선족)에 참고해 둘 점이 있다. 나도 미처 몰랐던 중국교포 관련 부분이다. 그것은 중국교포(연변 조선족)들 대부분이 한문을 잘 모른다는 사실이다. 중국말 대화야 문제없지만, 중국 어문실력은 거의 바닥이나 다름없다. 조선족은 중국정부의 소수민족정책에 따라 조선어학교만 다녔기 때문이다. 북미주, 일본, 러시아 등등 세계 어느 국가 등 현지에서 태어난 한인교포 자녀들은 그들이 태어난 국가언어는 모국어로 능통했다. 오히려 한글을 모르니 따로 가르쳐야 했다. 해외 태생 제2세 자녀들 한글교육에 심혈을 기울이는 이유이다.

시골 새 주택건설

처음 중국도 북미 경우와 같은 줄 알았다. 중국에서 태어나 학창 시절을 다 겪었으니 당연히 한문에 조예가 깊은 줄 알았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한번은 어느 중국인이 짧은 글과 시를 써줘서 한 중국교포(조선족)에 의미를 물었으나 전혀 몰랐다. 한자조차 제대로 못 읽었다. 다른 젊은 중국교포도 마찬가지였다. 3번째 같은 경우를 겪고 나서야 중국교포(조선족)의 학문(언어) 실력과 허점을 알게 됐고, 이해가 갔다. 그들이 태어난 연변지구 조선족 자치구에서는 조선말만 우선적으로 배운 때문이다. 중국교포는 중국어와 한국(조선)어 등 2중국어 대화는 잘 구사한다. 말과 문장은 다르다. 조선족은 대부분 중국 주민 대다수인 한족과는 상당한 학문적 갭을 지니고 있었다. 이 점이 근본적으로 외국에서 태어난 다른 2세 자녀와는 크게 다른 점이었다.

그는 중국 북경대학에서 정치 경제학부를 공부했다. 그러던 중 여름방학을 맞아 심양에서 북한으로 관광 갔을 때였다. 북한 당국은 그를 출국시키지 않고 강제로 평양에 머물게 했다. 당시 1961년 중국 북경에는 북한유학생이라곤 거의 없을 때였다. 북한은 그(북경대학생)에 관해 신원조회를 해보니, 조선인 뿌리로 성분도 좋고 당시 북한이 필요로 했던 유망 청년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북한에는 김일성 주석을 돕는 통역(비서)이 있었는데 가끔 내부 비밀이 샌다고 해요. 내 경우는 아무 식구도 없고, 혈혈단신이니 아마 보안문제 등 적합한 인물로 생각한 것 같아요. 내 중국여권을 압수하고 다시는 중국 땅으로 못 나가게 했습니다.”

그때부터 그는 오랜 긴 세월을 평양에서 보내야 했다. 평양 국제관계 대학 외교관 학부를 졸업했다. 이후 김일성 주석 옆에서 북한 언론계 고위간부로도 50여년간 근무했다. 기자로는 최고등급인 2급기자(최저8급)로 사실상 조선중앙통신 책임자였다.

북한 고려항공 여승무원

지난 1994년 8월 김일성 주석이 묘향산 특각(초대소/나중 김정일 위원장이 폐쇄시킴)에서 사망했다. 그(채 노인) 역시 현장에 함께 묵고 있었다 한다. 당시 김정일 위원장이나 평소엔 늘 대기상태였던 김일성 주치의도 묘향산에 없었다. 남쪽과 정상회담준비를 위한 북 경제일꾼들 몇 명뿐이었다고 한다. 그때 누가 김 주석에게 보고한 것은 아니나, 북 주민 중 배급이 끊겨 굶어 죽는 사람이 생겼다는 사실이 밝혀졌다는 것이다. 이 사실을 전혀 몰랐던 김일성은 노발대발했고, 결국 심장병으로 사망하는 사태에 이른 것이다. 당시 현장에 있었던 채 노인 설명이다. 김일성 심장병은 일부 측근들에겐 이미 잘 알려진 사실로, 당시 김정일은 김일성 주석이 어디든 이동 시는 주치의를 꼭 합류시켜 함께 움직이도록 해 왔다 한다. 그런데 하필 묘향산 경우 처음 주치의가 빠지고 마침 이때 김일성이 사망했으니, 김정일이 고의로 죽였다는 소문과 오해를 받게 됐다는 것이다.

그 시절 얘기다. 내가 김일성 사망을 알게 된 것은 모스크바 특파원 때다. 동료인 김석환 중앙일보특파원 전화를 받고 나서다. 당시 한국신문은 조간, 석간으로 나뉘어 있었다. 타 중앙지들이 조간신문인 데 반해, 내가 속한 5개 지방신문(강원, 광주, 대구매일, 대전, 부산일보 등)과 중앙일보는 석간이었다. 마감시간도 같고 김석환 특파원과는 둘이 자주 점심을 나누었다. 틈이 나면 시내 피자집에서 만났다. 한번은 피자집에서 그가 메뉴를 보면서 물었다. “송 선배! 앤초비(Anchovy)가 뭐에요?” “멸치젓.” 알면서도 나를 떠보는 듯했다. 사실 그의 입장에선 지방지인 강원일보쯤하고 무시할 수도 있겠는데, 결코 그렇지 않았다. 기사 마감 시간도 같으니 매일 하루도 빼놓지 않고 정보를 체크하고 대화를 나누었다. 혹시 다른 소식이라도 있나 궁금해했다. 그는 빈틈없고 박식한, 30대 중반의 늘 발랄한 기자였다.

외대 러시아과 출신이지만 영어도 꽤 잘했다. 중앙일보 기자시험에 수석 합격했다는 얘기를 들었다. 모스크바 10명 특파원 중 가장 나이는 젊었으나, 러시아 특파원 중 먼저 진출해 있던 유능한 기자였다. 나와는 나이 차가 10년 남짓했지만, 그에게서 배우고 느낀 점이 적지 않았다, 자신 관리를 잘했고, 남과 만남도 신경을 썼다. 모스크바에 수년간 머물면서도 교포사회 한인(고려인)들과의 접촉도 함부로 않았다. 토론토 교포사회에서 뛰어다녔던 내 경우와는 사뭇 달랐다. 나중 국무총리 공보수석과 대학 부총장 등을 역임하고 현재도 모교 대학 교수로 활동한다는 소식이다. 사족이 길었다. 양해를 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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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994년 8월 초순이다. 김 특파원이 전화를 했다. “송 선배! 김일성이 죽었다는 얘기가 있는데, 혹시 알고 있어요?” “아니, 모르겠는데. 갑자기 무슨 얘기요?” “그런 소식을 들었어요. 사실인 것 같아요.” “그래? 한번 알아봅시다.” 모스크바 북한대사관에 전화하니 전혀 모르는 일이라고 했다. 독일 최건국(북한 청우당 당수 장남) 선배도 마찬가지였다. 최 선배는 “거. 맨 날 나오는 소리. 그딴 얘기 신경 쓰지 말아요.” “아니에요. 이번엔 사실 같아요. 어제 중국 북경 북한대사관에서도 국기를 조기게양 했다던데.” “그런가? 정말 알아봐야겠네. 하여튼 고마우이.”

다시 채씨 노인 얘기로 돌아간다. 김일성이 죽고 나서 근 한 달 후 김정일 위원장은 평양 양각도 특급호텔에서 비밀회의를 열었다. 이때 고위급 북한 간부 20명 가운데 채 노인도 끼게 됐다. 묘향산에서 김일성 사망 시 동참해 있었고, 북한 언론계 책임자로 합류케 됐다. 채 노인은 그때 누가 모였는지 참석자 이름 밝히기를 꺼려했다. 강석주 이름 한 명만 밝혔다. 당시 강석주는 북에서 가장 영어가 능통한 외교관으로 자타가 공인하던 인물이었다.

김정일 주재로 북한미래 관련한 얘기를 나누었다. 무력부장은 누가 좋겠는가, 무역장관은 누구로 할 것인가 등등이다. 앞날 정권을 위해 어떻게 할 것인가 각자 한마디씩 의견을 말할 때다. 채 노인은 “앞으로는 새로운 각오로 일하기 위해 고위 간부들은 특히 술과 여자를 멀리하자”고 말했다 한다. 그때는 조용한 분위기로 아무 일 없이 넘어갔다고 한다.

그러나 다음날 저녁 집이다. 손님이 현관에서 기다린다 해서 나갔더니 차에 태워 어디론가 데리고 갔다. 감옥이었다. 알고 보니 ‘수령모독죄’로 체포된 것이다. 허구한 날 술과 여자로 이골이 난 김정일 위원장을 겨누어 야유했다는 죄목이다. 그때까지 오랜 세월 김일성 측근이라는 황금기는 하루아침에 끝이 났다. 6개월 감옥살이 후 그는 가족들 7명과 함께 함경도 ‘통제구역’으로 추방됐다. ‘천을’이라는 하늘 아래 첫 마을이라는 고지대였다. 80가구 3백여 명 각종 죄를 지은 주민들이 살았다. 집도 주지 않았다. 맨땅에 허술하게 오막살이를 짓고 살았다. 그의 고생길이 펼쳐지기 시작한 것이다.(계속)

필자소개
강원도민일보 북미특파원, 재외동포신문방송편집인협회 전 대표
대한민국 인권상 수상, 관훈클럽 국제보도상 수상, 한국신문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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