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주열의 동북아談說-90] 이순신 장군과 베이징조약
[유주열의 동북아談說-90] 이순신 장군과 베이징조약
  • 유주열 외교칼럼니스트
  • 승인 2023.07.20 1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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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크라이나 전에서 중국의 도움이 절실한 러시아가 중국에 큰 선물을 주었다. 지난 6월부터 중국은 차항출해(借港出海, 남의 항구를 빌려 바다로 나간다) 즉 블라디보스토크항의 사용권을 얻어 적체에 시달리는 동북 3성의 물류를 분산해 이동할 수 있게 됐다. 그런데 이곳이 어떤 곳인가. 사실은 19세기 중국(청)이 러시아와 맺은 불평등조약(베이징조약)으로 러시아에 할양된 땅이다.

오래전에 지인으로부터 우스개처럼 들은 이야기가 생각났다. 광화문광장의 이순신 장군 동상 근처에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중 한 사람이 “이순신 장군이 항상 남쪽을 향해 서 있는데 남쪽 왜군(일본)의 침략을 경계하기 위해서라지”라고 말하자, 또 한 사람은 “사실 이순신 장군은 밤에는 얼굴을 돌려 북쪽도 노려보고 있다는데, 중국 베이징에서 자신이 목숨을 걸고 지켜낸 두만강의 녹둔도가 러시아에 건네진 것이 못마땅해서…”라고 말했다.

녹둔도는 조선 시대에 두만강 하구에 있던 섬으로, 17세기 말 ~ 19세기 초 사이에 두만강의 퇴적작용으로 인해 동쪽 하류의 연해주(러시아 프리모르스키 변경주)에 붙어 육지가 되었다.
녹둔도는 조선 시대에 두만강 하구에 있던 섬으로, 17세기 말 ~ 19세기 초 사이에 두만강의 퇴적작용으로 인해 동쪽 하류의 연해주(러시아 프리모르스키 변경주)에 붙어 육지가 되었다.[이미지=위키피디아]

1842년 영국은 아편전쟁을 승리로 이끌어 중국과 난징조약을 체결했다. 난징조약으로 대중무역이 늘어나는 효과를 기대했으나 중국은 영국이 바라는 대로 움직여주지 않았다. 잔뜩 기대를 했던 동아시아 진출 영국 기업들의 불만이 높아지자 영국 정부는 조약 개정을 위한 명분이 필요했다.

1856년 10월 광저우 주강에 정박 중이던 영국(홍콩) 선적의 중국선 애로호에 중국 관리가 승선했다. 해적혐의로 승무원 전원이 체포되고 선박에 걸렸던 영국의 국기가 훼손됐다. 뭔가 트집을 찾고 있던 영국은 국기 모독을 근거로 중국에 배상과 사과를 요구했으나 무시됐다.

영국 정부는 엘긴 백작 제임스 브루스를 사령관으로 군대를 파견하자 프랑스도 이에 합세했다. 한해 전 인근 광시에서 프랑스 선교사 처형에 대한 반발이었다. 1857년 12월 영불연합군은 광저우를 점령하고 현지 총독을 포로로 잡아 영국 동인도회사의 본사가 있는 콜카타로 후송했다. 영불연합군은 이에 만족하지 않고 1858년 상하이를 지나 발해만으로 북상, 베이징의 관문인 텐진을 공격하자 중국은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텐진조약을 맺었다.

텐진조약
텐진조약

기독교공인과 아편무역 합법화 등 중국이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텐진조약 내용이 알려지자 정부 내 강경파들은 텐진의 포대를 강화하는 등 수비병력을 증원하면서 조약 비준을 거부했다. 1860년 6월 영불연합군은 병력과 군함을 재정비해 강화된 텐진의 수비군을 돌파했다. 그리고 베이징의 문턱인 통저우 빠리차오(八里橋) 방어선의 최정예군을 패퇴시켰다.

이 소식을 접한 황제 함풍제는 동생 공친왕에게 전권을 맡기고 청더(承德) 열하피서산장으로 도망가 버렸다. 영불연합군은 베이징을 점령하는 대신 황제가 아끼는 하궁 원명원과 이화원을 불태우면서 협상을 재촉했다. 엉겁결에 대권을 갖게 된 공친왕도 처음에는 어딘가에 숨어들어 전세를 살피고 있었다. 영불연합군은 황제의 별궁을 불태우면서 협상에 응하지 않으면 자금성 등 천년고도의 베이징을 잿더미로 만들겠다고 겁박했다.

빠리차오 전투
빠리차오 전투

대청제국 중국이 어찌하다 이 지경이 되었을까. 당초 만주족이 세운 청국은 중원을 침략, 명을 남쪽으로 몰아내고 선정을 베풀어 치세를 안정시켰다. 특히 강희제-옹정제-건륭제의 130여 년간 치세는 태평성대였다. 기나긴 태평성대에 기강이 해이해져서인지 건륭제가 말기에는 부패가 만연했다. 건륭제가 죽은 후 그의 아들 가경제가 부정부패를 주도했던 총신 허션을 체포해 스스로 목숨을 끊게 했다. 가경제는 20년의 국가 예산과 맞먹는 허션의 거대한 재산을 몰수했다. 가경제가 몰수된 재산을 빈 국고에 채워야 했는데 자신의 사금고인 내탕금으로 사용했다. 이것이 청조 쇠락의 첫 원인이었다. “허션은 죽고 가경의 배만 불렸다.” 백성의 원성이 높아지고 전국에 반란이 일어났다.

가경제가 1820년 죽고 그의 아들 도광제가 즉위했다. 도광제는 부친의 정책을 답습해 백성이 원하는 적폐청산의 개혁을 이루지 못했다. 대외적으로 도광제는 영국의 동인도회사의 아편 무역을 해결하지 못하고 1840년 영국과 1차 아편전쟁으로 이어졌지만 패배했다. 1842년 난징조약으로 홍콩섬이 대영제국으로 넘어가고 상하이 등 5개 항구가 개항되어 열강의 기독교가 쇄도해 오는 길을 열어주었다. 내우외환으로 나라가 더욱 혼란해지고 설상가상으로 1850년 12월 발발한 태평천국의 난은 중국을 남북으로 양분해 민심이 크게 이반되고 있었다. 이러한 국난 속에 후계자 결정이 중요함에도 도광제의 잘못된 선택이 중국 쇠락의 두 번째 원인을 제공했다.

가경제(왼쪽)와 도광제

도광제는 어느 해 아들 함풍과 2살 연하의 공친을 데리고 사냥을 나갔다. 도광제는 첫 사냥감 사슴이 지나가자 먼저 함풍에게 기회를 주었다. 함풍은 활을 들었으나 쏘지 않았다. 다음 사냥감 사슴이 지나가자 공친에게 기회를 주었다. 공친의 화살은 사슴에 적중했다. 순간 도광제는 “하오(好)”를 연발했다. 국난의 나라를 이끌 후계자로 용기 있는 공친이 적격이었다. 그러나 도광제는 사슴이 가엾다고 활을 쏘지 못하는 함풍을 덕치의 적임자로 생각, 후계자로 결정했다.

함풍제는 영불연합군이 베이징으로 진격하자 마치 타조가 머리를 파묻듯 모든 것을 공친왕에게 맡기고 도주하여 나라가 쇠망의 길을 들어서게 했다. 그는 1년 후 피서산장에서 5세의 아들(동치제)을 남기고 사망한다.

공친왕(1833-1898)은 오랑캐를 통해 오랑캐를 제압한다는 생각으로 러시아의 이그나티에프 공사를 찾아 중재를 요청했다. 이그나티에프는 공친왕보다 한 살 연상인 20대였다. 이그나티에프는 영국과 프랑스의 사령관들과 협의하고 그들의 이해관계를 적절히 반영해 이른바 베이징 조약을 이끌어낸다. 베이징조약은 중국이 영국, 프랑스 그리고 러시아와 각각 맺은 3개의 개별 조약이다.

공친왕

니콜라이 파블로비치 이그나티에프(1832-1908)는 러시아 황제 측근으로 20대임에도 중국에 공사로 파견됐다. 나폴레옹 전쟁 후 러시아제국에서 자유주의 사상에 영향을 받은 일부 청년 장교들이 니콜라이 1세의 전제정치에 저항해 입헌군주제 실현을 목표로 1825년 12월(러시아어로 데카브리)에 반란을 일으켰다. 러시아에서는 ‘12월 당원(데카브리스트)의 난’이라고 부른다. 이그나티에프의 아버지는 혁명을 일으킨 청년 장교에서 이탈해 니콜라이 1세 황제에 충성을 맹세, 황제의 입지를 세워 그의 측근이 됐다.

니콜라이 1세 사후 알렉산드로 2세는 17세의 이그나티에프를 황제 근위 연대 장교로 발탁했다. 황태자 시절 이그나티에프가 유아세례를 받을 때 대부(代父)가 된 특별한 인연이 있었기 때문이다. 러시아는 1856년 나폴레옹 사후 세계패권을 두고 영국과 벌였던 ‘그레이트 게임’의 일환인 크림전쟁에서 패배, 18세기 중반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확보한 영토와 함께 흑해 군항을 상실했다. 알렉산드르 2세는 파리강화회의에 참가, 영토가 빼앗기는 참담한 모습을 지켜보았던 이그나티에프를 베이징에 특파시켰다. 영불연합군의 침략에 고전하고 있는 중국을 압박 또는 회유하여 크림전쟁에서 잃어버린 영토와 항구를 유라시아 동쪽 끝 연해주와 외만주에서 찾아내도록 했다. 이그나티에프는 공친왕의 중재 요청을 수락하고 그가 협상할 영국과 프랑스 대표들과 접촉했다.

영국 대표 제임스 브루스(1811-1863) 8대 엘긴 백작은 ‘엘긴 마블(대리석)’로 유명한 7대 엘긴 백작 토마스 브루스의 아들이다. 아버지 토마스는 영국의 주오스만제국(이스탄불) 대사였다. 당시 그리스는 오스만 제국의 지배 하에 있었다. 어느 해 토마스는 그리스 아테네의 파르테논 신전을 찾았다. 신전은 오스만 제국의 지역 무기고로 사용되고 있었다가 베네치아공화국 군대가 침공하면서 폭격으로 지붕이 날아가고 귀중한 대리석 조각이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었다.

토마스는 고대 그리스의 유적이 훼손되고 있는 것이 안타까워 오스만 제국의 승인을 얻어 자신의 부담으로 조각품을 거두어 배에 실어 영국으로 옮겨왔다. 후에 대영제국 박물관에 기증하여 지금도 ‘엘긴 마블’로 전시되고 있다. 토마스의 아들 제임스는 영불연합군의 총사령관이지만 캐나다 총독을 역임했고 인도 총독으로 내정된 빅토리아 여왕의 총애를 받고 있는 명문 귀족이었다.

니콜라이 파블로비치 이그나티에프

이그나티에프는 영국이 원하는 것을 탐색했다. 영국은 난징조약으로 홍콩섬을 할양받았으나 섬 자체로는 방위에 허술하여 섬을 보호할 수 있는 인근 구룡 반도 일부를 추가로 할양받기를 원하고 있었다. 제임스는 베이징조약의 조기체결로 2년 전 텐진조약이 비준되고 소기의 목적이 달성되면 중국을 떠나 임지인 인도로 가고 싶어 했다. 건강이 좋지 않았던 제임스는 후에 베이징조약 체결 후 인도에 부임 1년 후 인도의 고산지대 여행 중 사망했다. 그의 무덤이 지금도 인도에 남아 있다.

이그나티에프는 프랑스군 사령관이면서 주중국공사인 그로 남작(1793-1870)을 접촉했다. 그로 남작은 외교관 출신으로 프랑스 상원의원이 됐음에도 런던 주재 대사로 근무하면서 중국과 일본 공사를 겸직하고 있었다. 고령의 그로 남작은 전쟁의 결과로 영토적 보상은 원하지 않고 중국에 빼앗긴 프랑스 선교사의 재산반환을 요청하고 있었다.

이그나티에프는 영국과 프랑스의 요구 사항을 공친왕에게 귀띔해 주고 영불연합군의 조기 철수를 위해 영국과 프랑스의 조건을 수락하고 빠른 조약 체결을 요구했다. 공친왕은 1860년 10월 24일 영국과 그리고 10월 25일 프랑스와 양자 베이징조약을 체결했다. 이로써 영국과 프랑스 군대는 철수, 함풍제를 안심시킬 수 있었다.

베이징 조약 체결 장면을 그린 그림

이그나티에프는 자신의 외교적 수완으로 영불연합군이 철수하자 공친왕에게 중재 성공에 대한 보상을 요구했다. 공친왕은 이그나티에프의 중재에 만족하고 러시아의 요구 사항은 무엇이든지 들어줄 준비가 된 듯했다.

러시아가 좋은 모피를 얻기 위해 ‘잠든 땅’ 시베리아 진출은 1580년대부터 시작됐다. 러시아의 시베리아 동진이 계속될수록 동쪽의 중국과 숙명적으로 만나게 됐다. 1640년대 중국에서는 북해로 부르는 바이칼호에 이어 아무르강(흑룡강) 유역까지 남하하자 청 조정은 긴장했다.

1650년대 러시아의 남하를 막기 위해 청 조정에서는 조선에 조총부대 지원을 요청했다. 조선은 조총부대를 파견(나선정벌) 러시아를 격퇴했다. 그 후 강희제와 러시아의 이반 5세는 외흥안령(스타노보이) 산맥을 국경으로 하는 네르친스크조약을 1689년 체결했다. 1858년 영불연합군이 텐진공격 등 어수선한 틈을 타 러시아는 무라비요프 아무르스키 동시베리아 총독을 통해 중국을 협박, 과거 네르친스크조약을 뒤집는 아이훈조약을 체결했다. 이 조약으로 러시아는 아무르강 이북지역을 할양받아 합법적으로 아무르강을 통해 태평양으로 나갈 수 있게 됐다. 또한 이 조약에는 하바롭스크 남부와 태평양 연안 연해주를 공동관리하는 내용이 포함돼 있다. 이그나티에프는 상기 공동관리 지역을 완전히 영구 할양해 줄 것을 요구했다.

러시아와 중국의 영토 변경
러시아와 중국의 영토 변경

영국과 프랑스와의 개별조약이 체결된 후 이그나티에프의 끈질긴 설득 끝에 중러 베이징조약은 1860년 11월 14일 체결됐다. 중국에서 피 한 방울 흘리지 않은 러시아는 베이징조약으로 두만강 경계로 그 동쪽의 한반도 5배에 달하는 광활한 영토를 할양받게 됐다. 지리에 어두운 공친왕은 중국이 동해로 나갈 수 있는 길목도 내주고 말았다. 중국 지린성 훈춘시가 북한과 러시아의 국경도시가 됐다.

베이징조약으로 졸지에 한반도(조선)는 러시아와 두만강을 경계로 마주보게 되고 두만강 하구의 삼각주 녹둔도는 러시아령이 됐다. 이순신 장군이 자신이 지켰던 우리 땅 녹둔도를 생각하면 한탄하지 않을 수 없을 것 같다.

유주열 외교칼럼니스트
유주열 외교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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