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기고] 롱비치의 래인 빅토리호를 찾아 흥남철수를 떠올리다
[해외기고] 롱비치의 래인 빅토리호를 찾아 흥남철수를 떠올리다
  • 김동수 민주평통 OCSD협의회장
  • 승인 2023.08.14 11:4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기적의 배’ 매러디스 빅토리와 함께 흥남 철수 도와… “부산 EXPO 때 한국 온다면”
민주평통 OCSD협의회 회원들이 최근 캘리포니아 롱비치, 샌 페드로만에 있는 Lane Victory 호에 승선했다. Lane Victory 호는 메러디스 빅토리호처럼 흥남 철수 작전 때 피난민들을 구출했다.

8년 전 부산에 가서 해운대와 용두산공원을 둘러보면서 영화 ‘국제시장’을 떠올렸다. 용두산공원에서 내려다본 부산의 모습이 영화 ‘국제시장’의 첫 장면을 연상시켰기 때문이었다.

영화에 나온 흥남 철수 작전은 손에 땀을 흘리게 했다. 피난민들을 한사람이라도 더 태우기 위해 배 안에 있던 모든 군수물자를 버리라고 하는 레너드 라루 선장의 모습은 피난민들의 구세주 같았다. 이 배가 잘 알려진 매러디스 빅토리(SS Meredith Victory)호이다.

6.25 전쟁 발발 후 8월 낙동강 전선에서 더 밀릴 수 없다는 사생결단의 마음으로 전선을 지킨 국군과 미군은 전열을 가다듬어 9월 15일 인천 상륙 작전으로 한국 전쟁에서 획기적인 반전을 가져온다. 보급로가 끊긴 북한군은 결국 스탈린의 충고를 받은 김일성의 명령으로 후퇴하고 서울을 지키려 하지만 결국 미군들에게 9월 28일 서울을 뺏기고 총퇴각하기 시작한다.

UN의 한국전 참전 결정은 원래 38도선 회복이었지만 이승만 대통령과 맥아더 원수는 이 기회에 대한민국을 통일시키려 북진을 결정한다. 소련과 중국의 UN 안보리 거부에도 불구하고 UN 총회에 이 안을 회부해 38선 이북으로 진격하기 시작한다. 이날이 10월 1일, 오늘날 국군의 날이다.

1950년 9월 말 인천 상륙 작전과 서울 수복의 성공으로 한국군과 유엔군은 10월 1일 38선을 돌파했고, 이후 국경 지대를 향해 경쟁적으로 진격했다.[사진=위키피디아]
1950년 9월 말 인천 상륙 작전과 서울 수복의 성공으로 한국군과 유엔군은 10월 1일 38선을 돌파했고, 이후 국경 지대를 향해 경쟁적으로 진격했다.[사진=위키피디아]

속히 전쟁을 끝내기 원했던 맥아더 UN군 총사령관은 서쪽으로는 미 제8군을, 동쪽으로는 미군 7사단과 한국 수도사단을 포함한 제10군단으로 하여금 서로 경합하면서 북진을 재촉하였다.

9월 28일 서울 수복 때 주공격에 나섰던 미 해병 1사단은 곧 원산 점령 작전에 나섰고 국군 제1군단은 수도사단과 함께 10월 10일 북한군이 주 방어선으로 무장하고 있던 원산을 공격하고 점령한 후 10월 말 북진하게 된다.

서쪽에서는 낙동강 방어에서 가장 큰 공을 세운 미 8군 월튼 워커 중장과 국군은 10월 9일 북진을 개시 10월 19일 평양을 수복하고 10월 26일에는 함경남도 초산을 수복하고 압록강 가까이에 이르렀다.

동부에서는 에드워드 알몬드 중장이 이끄는 10군단과 국군 수도사단이 11월 26일 청진을 수복하고 두만강에 거의 이르렀다. 한반도가 이젠 통일이 되는 줄 알았다.

그러나 이들 미군과 국군이 서부와 동부로 서로 나뉘어 북한 산중 깊숙이 들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군대가 있었으니, 이들이 중공군들이었다.

장진호 전투
장진호 전투

중국은 UN군이 10월 1일 38도선을 넘자 마오쩌둥과 지도부가 회의를 한 결과 미국과 전쟁을 치르려면 조선 땅에서 전쟁을 하는 게 낫다고 결정, 10월 1일 전쟁 개입을 결정했다. 중국은 스탈린의 묵의 아래 10월 18일에는 압록강을 건너기 시작하여 30만 병력이 동부, 서부로 나뉘어 미군과 국군 중부를 뚫고 미 10군단을 포위 섬멸하려는 작전을 세웠다.

사실 중공군과는 10월 25일 압록강 근처에서 첫 전투가 있었지만, 맥아더 원수는 전장을 조심스레 지켜보지 않고 계속 양 군단을 전진시켰다.

이때 한반도의 운명을 달리 만든 부대가 미 해병 1사단이었다. 1차 서울 수복 후 원산으로 가서 미 10군단 예하 부대로 들어간 미 해병대 1사단은 올리버 스미스 소장의 지휘 아래 조심스럽게 천천히 북진했다. 스미스 사령관의 아시아 태평양 전쟁의 경험이 이에 크게 작용을 했다. 그는 천천히 전진할뿐더러 주둔하는 지역에 병참지를 만들고 다가오는 추위도 생각하고 있었다.

미군 중에서도 세계 2차대전을 통해 최고의 전투 경험이 있는 이 미국 해병대 1사단을 중국 인민군은 노리고 있었다. 그들은 그때 세계 최고의 부대라고 여겨지는 미 해병대 1사단을 포위 섬멸하면 미군들의 용기를 꺾을 뿐만 아니라 더 북쪽으로 들어가 있는 미 10군단을 손쉽게 포위 섬멸할 수 있다고 계산했다.

그리고 미 해병대 1사단이 서서히 북진하여 장진호에 도착하자 이들 중공군은 기다렸다는 듯이 매복해 있다가 11월 26일부터 대규모로 공격했다. 이들 중공군의 숫자는 미 해병대 1사단 등 아군 병력 3만 명의 4배가 되는 12만 명이었다.

메러디스 빅토리호
메러디스 빅토리호

중공군은 알려진 대로 단순히 인원만 많은 인해전술 총받이는 아니었다. 그들은 바로 몇 년 전 중국 대륙을 장개석의 국민당으로부터 탈취하고 항일 전쟁 때 일본군과도 전투 경험이 있는, 산중에서 민첩하게 움직이는 부대였다. 역사에서 처음 미국 중국이 직접 싸우는 전쟁이었다. 다행히 화력이 워낙 강한 데다가 공군의 지원을 받는 미 해병대 1사단은 전략을 바꿔 방향을 남쪽 흥남으로 돌리면서 전투를 하며 후퇴하기 시작한다.

그제야 전황이 바뀐 것을 안 맥아더 총사령관은 미 해병 1사단을 함흥으로 철수해 군인들만 비행기로 오라는 명령을 내리지만 사태를 잘 파악한 스미스 소장은 그러면 미 해병대의 자존심을 죽이는 것뿐만 아니라 비행장을 끝까지 지켜야 하는 2개 대대의 희생, 또 더 북쪽에 고립되어 있는 알몬드 중장 예하 미 10군단과 국군 수도사단이 포위당해 전멸할 수 있기에 끝까지 싸우기로 하고 전투를 계속한다.

전황의 급박함을 급히 파악한 스미스 사령관은 우리가 후퇴하냐고 묻는 종군 기자의 질문에 “우리는 후퇴가 아니라 다른 방향으로 진격하는 거요”라고 하면서 장진호 남쪽 유담리, 신흥리에서 하갈우리로 집결후 번번이 계속되는 중국 인민 지원군에게 공격도 당하고 반격도 하면서 교토리, 진흥리 전투를 거쳐 결국 12월 11일 함흥에 도착한다.

곳곳에 매복해 있는 중공군들과 싸우며 방향을 바꿔 150km 빠져나오는 데 15일이 걸렸다. 이를 두고 중국에서는 전략적 승리, 미국은 전술적 승리라고 부른다. 영어로는 ‘Battle of Chosin Reservoir’라 부른다. 미군 전투 역사상 가장 성공리에 후퇴한 전투 중 하나로 꼽힌다.

이렇게 희생하면서 전투를 하는 동안 함경북도 깊숙이 북진했던 미 10군단, 국군 1군단도 흥남으로 철수할 수 있었다. 11월 26일부터 시작되어 1950년 12월 13일까지 흥남으로 철수하기까지 희생된 미군은 1,029명 사망에 4,894명 실종, 4,582명 부상, 비전투 손실이 7,338명에 달했고 중화인민공화국과 북한은 전사 2만5000명에, 부상자 1만 2,500명이었다.

Lane Victory 호 내부에 있는 조타실

이 장진호 전투에 영국 드라이스 중령이 지휘하는 코만도 부대도 전진 배치돼 전투를 돕다가 중공군의 매복 작전에 걸렸다. 이 부대는 큰 위험에 처했다가 코르세어 비행기 폭격의 도움으로 큰 희생을 가까스로 모면할 수 있었다.

미 7보병 사단은 북진 중 좁은 길을 일대 종렬로 전진하다 중국군의 포격으로 탄약 트럭이 맞아 폭파되는 바람에 두 부대로 나뉘었다. 뒤에 남은 부대는 할 수 없이 철수하고 앞 부대는 대부분 중공군과 북한에 포로로 잡혔다. 이런 이유로 많은 미군이 북한에 포로로 잡혔다.

또한 페이스 중령이 이끄는 31연대는 매복된 중공군과 뒤섞여 싸우는데 출동한 코르세어가 이를 잘 분간치 못하고 네이팜탄을 너무 일찍 떨어뜨리는 바람에 부대원 거의 전부가 불에 타죽는 불상사도 있었다.

이렇게 전쟁으로도 죽었지만, 영하 30도의 추위에 희생당한 이도 많았다. 제대로 준비된 방한복 없이 얇은 모포 하나 덮고 자야 했던 군인들은 수천 명이 동상에 걸려 죽거나 부상을 입었다.

이런 가운데 흥남으로 193척의 미 군함, 상선, 어선, 여객선이 모여들었다. 흥남으로 집결한 미군 10만 5,000명과 10만의 국군을 수송하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거기에는 공산주의의 잔악함을 목격한 피난민 십여만 명도 모여들었다. 처음에는 군인들만 수송하려던 배들이 마음을 바꾼 에드워드 알몬드 사령관의 허락으로 피난민들도 싣게 된다.

이때 매러디스 빅토리호에는 59명 정원에 47명 선원이 타고 있어 12명밖에 더 실을 수밖에 없었지만 레너드 라루 선장은 배에 있던 탄약과 항공유 4만 리터 등 500톤의 전쟁 물자를 다 버리라고 지시한다. 사람을 먼저 살리는 것이 전쟁의 참된 목적이라고 말하면서....

그렇게 해서 12월 22일부터 12월 23일까지 배 선창에서 또 배에서 내린 밧줄을 타고 배로 옮겨진 피난민들이 1만4,000명이었다. 최대 승선자 수의 230배가 넘는 사람이 이 배를 타고 12월 23일 아침 11시, 영하 35도의 추위와 바다 곳곳에 깔린 지뢰를 피해 흥남 철수하게 된다. 버려진 군수물자는 12월 24일 다 폭파됐고, 완전철수할 때에는 아직도 많은 피난민이 흥남에 남겨져 발을 동동 구르며 이산가족이 되고 말았다.

민주평통 OCSD협의회 회원들

18시간 만의 항해 끝에 배는 12월 24일 크리스마스 이브에 부산항에 도착하지만 사람 내릴 곳이 없어 더 남쪽으로 내려가 12월 26일 거제도 장승포항에 도착한다. 이를 일컬어 ‘크리스마스의 기적’이라 부르고 이 매러디스 빅토리호는 단일 선박으로 제일 많은 사람을 구조했다 해서 나중에 기네스북에 기재되기도 한다.

중공군은 전쟁에서 한 번도 패해 본 적이 없는 미 해병대 1사단을 섬멸하기 위해 나중에 2군단의 추가 병력을 보냈지만, 오히려 미 해병 1사단이 중공군에게 막대한 피해를 입혔기에 나중에 37도 선까지 내려온 중공군은 금강 라인까지 못 내려오고 결국은 미국이 남한을 포기하지 않는 결정적 계기가 된다. 미 해병 1사단이 대한민국을 구한 셈이다.

우리 OCSD 평통에서는 이런 ‘기적의 배’와 비슷하게 1945년 5월 31일 건조되어 6.25 전쟁 5년 전인 1945년 6월 23일에 진수된 Lane Victory 호를 방문했다. 이 배는 메러디스 빅토리호보다 3주 일찍 Los Angeles에서 건조되어 세계 2차대전 때 쓰이다가 Washington주 Olympic 해협에 있다가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급히 부산항으로 급파되어 화물선으로 미군을 도왔다.

그리고 흥남 철수 작전이 시작되자 12월 21일 흥남에서 7,100명의 피난민을 싣고 12월 25일 거제도 장승포항에 도착하게 된다. 메러디스 빅토리호처럼 화물선 짐을 다 비우고 피난민을 구출했던 것이다. 장승포항에 도착했을 때는 7,100명의 피난민에 항해 중 배에서 낳은 신생아까지 7,101명의 피난민이 하선했다. Lane Victory 호는 이후 베트남전쟁에도 활약하다 1989년부터 San Pedro에서 National Musium으로 쓰이고 있다.

거의 비슷한 크기와 형태인 메러디스 빅토리호는 아이러니컬하게 1993년 중국에 팔렸다가 나중에 폐기가 되었다. 매러디스 빅토리호와 거의 동일하게 생긴 Lane Victory호는 지금 Long Beach 옆 San Pedro에서 정박 중이며 Musium으로 쓰고 있다.

2014년까지 Long Beach 항에서 항해도 했으나 지금은 엔진 두 개 중 하나가 망가져 수리를 해야 항해를 할 수 있다고 한다. 우리 일행은 각 선창을 돌며 엔진실과 부엌, 선장실을 둘러보고 설명을 들었다.

배를 둘러보면서 이 배가 한국 부산항으로 가서 부산 Expo 2030 때 한국인과 해외에서 온 방문객들에게 한국의 ‘Forgotten War’를 알렸으면 하는 마음이 들었다. 미국 정부에서는 이 배를 2차대전, 한국 전쟁, 베트남전쟁에서 상선 해병으로 그 임무를 잘 수행한 역사적인 배로 전시를 계속할 생각인 듯하다. 그 당시에 만들어진 이와 비슷한 약 600척의 배 중 현재 남아있는 것은 오직 3척. 나머지 두 척은 Tampa Florida와 Okland California에 정박하고 있다고 한다.

남가주를 방문하는 분들이 Lane Victory호를 방문해 흥남 철수 때의 절박했던 상황을 조금이라도 느끼고, 젊은 학생들에게는 이것이 역사 교육의 현장으로 쓰였으면 하는 생각이 간절하다.

우리 일행은 바로 옆에 있는 San Pedro 우정의 종각도 방문해 태평양을 바라보며 한반도의 평화와 한미 동맹의 70년 역사를 되새겼다. 이와 함께 양국의 자유 민주주의와 번영을 기원하였다.

아울러 멀지 않은 San Diego Camp Pendleton의 미 해병 1사단 장병들에게 다시 한번 감사와 존경의 경례를 드렸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 서울특별시 송파구 올림픽로35가길 11(한신잠실코아오피스텔) 1214호
  • 대표전화 : 070-7803-5353 / 02-6160-5353
  • 팩스 : 070-4009-2903
  • 명칭 : 월드코리안신문(주)
  • 제호 : 월드코리안뉴스
  • 등록번호 : 서울특별시 다 10036
  • 등록일 : 2010-06-30
  • 발행일 : 2010-06-30
  • 발행·편집인 : 이종환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석호
  • 파인데일리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24 월드코리안뉴스. All rights reserved. mail to wk@worldkorean.net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