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제1회 ‘너머’ 신인문학상 수상작 ‘는개 비’
[기고] 제1회 ‘너머’ 신인문학상 수상작 ‘는개 비’
  • 김재동(재미칼럼니스트)
  • 승인 2023.09.11 0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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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지에 미국 문화 칼럼을 정기적으로 기고하고 있는 김재동 재미칼럼니스트가 제1회 <너머> 신인문학상을 수상했다. 수필 논픽션 부문 수상으로 수상작은 「는개 비」다. 김재동 수상자는 1988년 도미(渡美)해 현지 미국 유타주 솔트레이크시티에 거주하고 있다. 경희사이버대학교 문화창조대학원 미디어문예창작전공 석사과정을 마쳤고 2008년 제8회 《수필과 비평》 신인상 수상, 2012년 제6회 경희해외동포문학상 수필부문 최우수상을 수상한 바 있다. 현재 한국문인협회 회원, 경희문인회 특별회원, 경희사이버문인회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어린 시절 학교생활과 어머니의 기억을 애틋하게 그려낸 작품이다. 작가는 수상소감에서 “가을과 함께 한국문학번역원으로부터 반가운 소식이 날아왔다”면서, “이제 나만의 색깔이 묻어나는 글을 써야겠다”고 밝혔다. 작가는 이어 ‘돌아가신 어머니와 중3 때 담임 김일남 선생님, 문학적 글쓰기란 무엇인지 그 진정한 의미를 가르쳐주신 김종회 교수님 그리고 내가 쓴 글에 밑줄을 긋고 비평을 아끼지 않는, 내 글의 첫 독자이자 후원자인 아내에게 이 영광을 돌린다“고 덧붙였다.<편집자주>

제1회 너머 신인문학상을 수상한 재미동포 김재동 작가

는개가 내린다. 안개 같은 이슬비. 그날도 는개비가 꿈결처럼 나부끼고 있었다. 앞산 솔숲에선 분홍빛 진달래가 앞다투어 망울을 터뜨리고, 밤나무 숲에선 쑥국새가 울고 있었다. 동네 사람들은 모내기를 위해 논에 물을 가두느라 논둑을 갈무리하기에 분주했다. 아이들은 병아리 떼처럼 몰려다니며 한적한 마을에 생기를 불어넣고 있었다. 그때만 해도 춘궁기(春窮期)라 하여 봄에 먹을 것이 귀했다. 둥지의 고구마도 바닥이 나고 몇 개 남아 있는 것마저도 반쯤은 썩어 있기 일쑤였다. 말랑말랑해진 부분을 도려낸 다음 고구마밥을 해 먹기도 했다. 텃밭에 묻어둔 무도 싹이 돋아나 바람 든 부분은 푸석해져 먹을 수가 없었다. 어머니는 반찬값이라도 벌어 보겠다고 광주리에 물건을 떼다 행상을 했다.

는개가 내리던 그날 오후, 집으로 돌아오던 어머니는 솔숲을 빠져나오다 노송의 뿌리를 잘못 밟아 미끄러져 넘어지는 사고가 있었다. 넘어질 때 광주리에 남은 물건들을 지키기 위해, 당신의 몸은 아랑곳하지 않고 그대로 옆으로 넘어져 오른쪽 손목이 부러졌다. 어머니는 부러진 손목에 널빤지 조각을 대고 무명천으로 동여맨 채, 왼손으로 살림을 했다. 한 손으로 하는 일이 그전만 할 리 만무했다. 어머니의 손이 얼마나 많은 일을 했는지, 나는 그때서야 알게 되었다. 눈을 감으면 지금도 어머니의 손이 아른거린다. 투박함은 옆집 머슴 손 같았고, 손바닥에 박힌 굳은살은 거칠었다. 손등은 소나무 껍질처럼 늘 갈라져 있었으며 손톱은 깎을 일이 없었다. 그런 어머니의 손이 내게는 약손이었다. 배에 탈이 나 잠을 이루지 못할 때 어머니는 내 배를 쓸어주셨다. 그 거친 손이 스치고 지나갈 때마다 편안함을 느껴 스르르 잠이 들고는 했다. 귀에서 소리가 난다고 보채면 무릎 위에 눕혀 놓고 귀지를 파주기도 했고, 겨울이면 가마솥에 물을 데워 찌든 때를 밀어 주던, 이 세상 어느 손보다 더 부드러운 손, 그 감촉이 지금도 내 몸 구석구석에 살아 있다.

어머니의 손은 요술 방망이 같았다. 배가 고프다고 투정 부릴 때면 순식간에 뚝딱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 주셨다. 투박한 손으로 조물조물 무친 시금치나물 맛은 잊을 수가 없다. 텃밭에서 따온 풋고추를 숭숭 썰어 넣고 뒷산에서 따온 팽이버섯을 양파와 섞어 되직하게 만든 강된장 맛은, 그 무엇에도 비할 바가 아니었다. 조미료를 넣지 않아도, 갖은양념을 더하지 않아도, 어머니의 정성과 손맛으로 만든 음식 맛은 누구도 흉내 낼 수 없었다. 이른 새벽 첫 우물물을 장독대에 떠놓고 자식들을 위해 기도하던 그 손. 손바닥의 굳은살이 서로 스쳐, 손을 비빌 때마다 수세미로 놋그릇을 문지르는 소리처럼 들렸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니 그 소리로 인해 내가 여기에 있지 않나 싶다. 사고 후, 손바닥을 비비며 공을 들이던 어머니의 모습을 한동안 볼 수 없었다. 한 손을 높이 들어 하늘에 대고 무어라 입안으로 중얼거리시던 어머니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중학교 3학년 여름방학이 끝나갈 즈음 일이다. 병석에 누워 계신 아버지 대신 밤낮으로 동분서주하시는 어머니를 차마 볼 수 없었다. 나라도 도와야 한다는 생각에 나는 큰 불효를 저지르고 말았다. 낡은 장롱 밑바닥에 숨겨놓은 비상금을 훔쳐, 돈을 벌어 오겠다는 쪽지 한 장을 남기고 가출을 감행했다. 우여곡절 끝에 나는 서울에 도착했다. 서울역 지하도에서의 노숙을 시작으로 중국집 배달부, 구두닦이, 껌팔이 등등을 전전하는 동안 두어 달이 지나갔다. 그러던 어느 날 남대문(崇禮門) 근처 다방을 돌면서 구두를 수거하던 중, 우연히 초등학교 때 친구를 만나게 되었다. 그 아이는 나보다 두 살 위였다. 예전 시골에서는 한두 살 늦게 초등학교에 입학하는 것은 흔한 일이었다. 고아나 다름없었던 그 아이는 초등학교 5학년 때, 같이 살던 외할머니가 돌아가신 후 학교에 나오지 않았다. 그랬던 친구를 서울에서 만나다니 믿어지지 않았다. 그 아이는 어른처럼 행동했다. 말씨 또한 서울 놈이 다되어 있었다. 그 친구의 소개로 면목동까지 흘러가게 되었다.

면목동 어느 골목 귀퉁이에 허름한 2층 건물이 있었다. 재단사의 노련한 손끝에서 잘려 나온 가죽 조각들에 풀 바르는 일을 했다. 신발과 가방으로 유명했던 에스콰이어에 가방을 납품하는 공장이었다. 나는 그곳에서 본드와 매일 씨름을 했다. 본드 냄새에 머리가 맑을 날이 없었다. 가출한 지도 어느덧 석 달이 다되어 가던 어느 날이었다. “재동아! 아가 재동아…….”밖에서 누가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정신이 아득했다. 꿈을 꾸고 있는 건 아닌지, 나는 귀를 의심했다. 그 목소리는 분명 어머니 목소리였다. 나는 덜컥 겁이 났다. 어머니를 볼 자신이 없었다. 누런 본드가 덕지덕지 묻어 있는, 데님 앞치마를 걸치고 있던 나를 어머니는 막무가내로 그 허름한 건물에서 끌어냈다. “이놈아! 내가 언제 너더러 돈 벌어 오라고 했더냐? 몇 달만 참으면 졸업인데 그새를 못 참고 이 어미 속을 썩여 이놈아!” 어머니 입에서 나무라는 말이 튀어나오고 있었으나, 손은 내 등을 토닥이고 있었다. 얼마 만에 느껴보는 어머니의 손길이던가, 나는 복받치는 서러움에 숨죽여 눈물을 삼켰다.

어머니의 손에 이끌려 교문 앞에 도착했다. 내가 다니던 학교는 교문에서부터 교정까지 가파른 계단을 올라가야 한다. 계단 옆으로는 학교의 역사를 말해 주듯 고목들이 줄지어 서 있다. 여름에는 잎이 무성해 계단을 시원한 그늘로 만들어 주었다. 11월 하순 이파리를 다 떼어버리고 허허롭게 서 있는 고목들 사이로 찬바람이 드나들고 있었다. 바람은 낙엽을 이리저리 굴리고, 하늘은 금방 뭐라도 뿌릴 듯 낮게 내려앉아 있었다. 나는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힘겹게 옮겼다. 마음이 무거웠다. 어차피 피할 수 없는 일이라면 부딪치는 수밖에 도리가 없었다. 교무실 앞에 섰지만 차마 문을 열고 들어갈 자신이 없었다. 그런 내 마음을 읽었는지 어머니가 문을 열고 먼저 교무실로 들어섰다. 마침 담임선생님이 교무실에 계셨다. 나는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너 오랜만이다? 선생님이 내게 말했다. 선생님은 어머니에게 걱정하지 말고 집으로 돌아가시라고 했다. 선생님이 앞장을 섰다. 우리가 멈추어 선 곳은 교장실 앞이었다. 나는 고개를 숙인 채 교장 선생님 앞에 섰다. “이 아이가 그 학생인가요?” “예 그렇습니다.” “김재동, 고개 들고 교장 선생님께 인사드려야지?” 담임선생님이 나무라듯 내게 말했다. 교장 선생님께서 말을 이으셨다. “그래, 어디 얼굴 좀 보자. 얼마나 잘났으면 어머니가 학교에 찾아와 무릎을 꿇고 너 대신 용서를 빌었는지.”

3개월 이상 무단결석한 학생을 퇴학시키지 않은 경우는, 우리 학교가 생긴 이래 처음 있는 일이라고 했다. 교장실을 나와 교실로 가는 복도에서 마주치는 선생님마다 한마디씩 했다. “너 재동이로구나! 서울 가서 돈 많이 벌어왔니?” 옆에 있던 담임선생님이 꿀밤을 먹이며 웃으셨다. 솔숲에서 초겨울 는개가 운동장 쪽으로 스미듯 날아오고 있었다. 마치 어머니의 부드러운 손짓 같았다. 세월이 흘러 시간이 변하고 이역만리 먼 곳으로 옮겨와 공간도 변했으나, 내가 그때 그 시절의 나인 것이 분명한 만큼, 는개비가 환기하는 어머니의 기억도 내게는 어제인 양 또렷이 살아 있다. 는개비 속에는 어머니의 눈물도 있고, 내 눈물도 있다. 오늘 나는 이역만리 이국, 는개비 속에서 다시 어머니를 만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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