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성주의 ‘박정희·김대중’-⑫] 김대중의 장도영 회고와 이주당(貳主黨) 사건
[강성주의 ‘박정희·김대중’-⑫] 김대중의 장도영 회고와 이주당(貳主黨) 사건
  • 강성주 전 MBC 보도국장
  • 승인 2023.11.25 0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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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와 김대중은 한국 현대사에 큰 족적을 남긴 인물이다. 과연 후세는 이들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강성주 전 MBC 보도국장이 박정희과 김대중을 재조명하는 작업에 들어갔다. 그가 심혈을 기울인 부분들을 연재로 소개한다.<편집자주>

김대중도 회고록에서 장도영과 관련한 기록을 남겼다. 김대중은 자신의 정치적 후견인인 장면 총리가 자리에서 물러나고 또 자신의 국회의원 당선도 무의미하게 만들어버린 쿠데타 주도세력인 장도영 중장에게 후한 평가를 내리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장 총장은 장면 총리가 특별히 총애해서 현직에 있는 최경록 참모총장을 해임시키고 임명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는 자유당 시절 이기붕에게 충성을 다한 사람이었다. 이 때문에 민주당 내부의 많은 사람들이 참모총장 교체를 반대했다. 장 총리는 내가 보는 자리에서도 장 총장에게 여러 차례 물었다. “시중에 떠도는 쿠데타 설이 신빙성이 있는가? 그 중심에 박정희 소장이 있다는데, 맞는가?” 그때마다 장 총장은 답했다. “아무 일 없습니다. 박정희 소장 쿠데타 설은 음모에 불과합니다. 심지어는 저도 가담했다는 이야기도 듣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장면 총리에게 안심하라며 자기가 군을 확실하게 장악하고 있다고 장담했다.(김대중, 『김대중회고록』, 삼인, 2015)

김대중의 회고는 이어진다. “소신 없이 사욕을 좇아 후배들에게 영달을 구걸했던 장도영은 결국 그 끝이 비루했다. 장도영(1923~2012)은 한때 군사정권의 최고 지도자로 추대되었다가 결국 ‘반혁명’이라는 낙인이 찍혀 체포되었다. 그리고 국외로 추방당했다. 배신의 결말이었다.” 김대중의 회고에서는 아주 깊은 증오와 배신감이 드러난다. 출판을 전제로 하는 회고록이 아니라면, 표출된 그 감정의 두께로 미루어 볼 때, 김대중은 이보다 훨씬 심한 말도 했을 것 같다.

김대중은 의사당에 들어가 국회의원으로서의 활동은 못 했지만, 그래도 ‘며칠이지만’ 국회의원을 지낸 정치인이다. 또 집권 민주당의 대변인도 지냈다. 그래서 5.16 후 그는 정치활동정화법(1962.3.16)의 규제 대상이 돼, 정치 활동을 하지 못하게 되는 좀 억울한 낭인 생활을 이어간다.

「정치활동정화법」은 쿠데타에 성공한 5.16 주체 세력들이 제2공화국에서 일정한 정치적 지위에 있었던 정치인과 5.16쿠데타가 지향하는 혁명과업 수행을 방해했다고 인정되는 정치인들의 정치활동을 금지했던 일종의 개혁 법안의 하나다. 1962년 3월 16일 공표했다. 이 법의 시행에 따라 4,000여 명이 정치 활동을 하지 못한 6년여 동안 공화당은 두 차례의 대통령선거와 국회의원 선거에서 승리를 거두어 통치체제를 확고히 다질 수 있었다. 5.16 세력의 정치활동정화법은 1980년 11월 3일, 신군부에게 답습돼, 「정치풍토쇄신을 위한 특별조치법」으로 되살아나 567명의 정치활동 금지가 실시된다.

그 와중에 김대중은 1962년 5월 10일 이희호와 결혼했다. 이들은 부산 피난 시절부터 알고 지내던 사이였다. 사내아이 둘에 노모를 모시고 있는 그로서는 재혼이었고, 이희호는 첫 결혼이었다.

결혼 열흘 뒤(5.20), 김대중은 ‘반혁명’ 혐의로 중앙정보부에 연행된다. 5.16 쿠데타 이후 발생했던 10여 건의 반혁명사건 가운데, 유일하게 구 집권당인 민주당이 관련된 사건이었다. 당국의 발표처럼 ‘어마어마한 반국가 사건’은 아니었지만, 눈길을 끄는 사건임에는 틀림없다.

1962년 6월 1일, 중앙정보부 김종필 부장은 “구 민주당 소속의 정치인들이 5.16 군사 정변으로 권력을 빼앗긴 데 분노해, 정치계는 물론 군인들까지 포섭해 군사정권을 타도하려고 했다”고 발표한다.

소위 ‘이주당 반혁명사건’이다. 이들 반혁명 분자들은 “61년 11월 서울 효창공원 등에서 만나 모의를 한 끝에, 6월 13일을 기해 무력 쿠데타를 일으키고 간단한 과도정부 기간을 거쳐 8월 15일 민정이양을 한다”는 ‘어마어마한 반국가사건’ 음모를 꾸몄다고 발표됐다. 그런데 이들 반혁명분자들의 거사 본부가 효창운동장이라니? 발표되는 내용은 상당히 빈약하고 어설프다.

이주당 반혁명사건을 보도한 경향신문 1면 기사. 1962.6.2

이 사건으로 김상돈(전 서울시장), 조중서(민주당 조직부장), 김대중(민주당 대변인), 김인측(CIC 대령), 이성렬(백의사) 등 41명이 구속됐고, 장면 전 총리도 배후인물로 지목돼 불구속 기소된다.

CIC는 군과 관련해 국방부 조사본부(Criminal Investigation Command)의 뜻으로도 쓰이고, 방첩대(Counter Intelligence Corps)의 뜻으로도 쓰인다. 여기서는 당시 권력기관의 하나였던 방첩대로 쓰였다. 이 군 정보기관을 당시에는 특무대라고도 불렀다. 미 군정 시기 미군 CIC는 정보수집은 물론 한국인 정치 지도자와 미국인에 대한 사찰, 정치공작 등에도 개입하는 등 광범위한 활동을 했다. 또 남한의 우익 반공단체와 협력해 북한에 직접 공작원을 파견해 정보를 수집하고 대북공작을 한 것으로 알려졌으나, 정확한 실체는 밝혀지지 않았다. 제1공화국 시절 육군 특무대라는 명칭을 사용하다가 1960년 육군 방첩부대, 1.21 사태로 1968년 육군보안사령부로 이름이 바뀌고 1977년 해군과 공군의 유사부대와 합쳐 국군보안사령부, 1991년에는 국군기무사령부로 이름을 바꾸었다.

당시 언론은 제2공화국의 장면 총리가 관련됐다고 해 크게 보도했다. 김대중은 구속돼 한 달 동안 조사를 받았으나, 기소도 되지 않았고, 나머지 관련자들도 대부분 무죄로 석방됐다.

졸지에 낭인이 된 사람들끼리 모여 불평불만은 쏟아졌겠지만, 얼마 전 쿠데타를 성공시키고 출범한 군을 뒤엎겠다는 것은 애초 불가능했을 텐데도, 당국은 그렇게 발표했다. 세월이 수상했다. 김대중은 “정보정치로 숨통을 조이던 당시 분위기로 보아서 이런 모의 자체가 애당초 불가능했다”고 회고했다.

박정희는 군대를 동원해 나라의 권력을 잡았고, 김대중은 구체제의 일원으로 손발이 묶여 규제를 받는 입장이었다. 젊은 정치인 김대중과 쿠데타의 실권자 박정희의 거리는 멀었다.

박정희의 ‘화양연화’(花樣年華: 인생의 가장 빛나고 소중했던 시절)가 이제 시작된다. 박정희와 김대중, 두 사람의 거리도 가까웠다가 멀어졌다를 반복한다. 인제 읍내의 사단장 관사에서 만났을 수도 있었고, 젊은 국회의원과 군 지휘관의 관계로 만날 수도 있었을 텐데, 현실에서 두 사람은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인생이란 운명에 정해진 길을 가는 건지, 아니면 그때그때 발생하는 상황에 따라 마구 바뀌는 길을 따라가는 것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필자소개
MBC 보도국장, 포항 MBC 사장, 미국의 소리(Voice of America) 서울지국장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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