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계송칼럼] 베트콩 여성 포로, 그 강렬했던 눈빛이…
[이계송칼럼] 베트콩 여성 포로, 그 강렬했던 눈빛이…
  • 이계송(재미수필가)
  • 승인 2024.03.27 09:2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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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군 복무 기간 월남전에 백마부대원으로 참전했다. 부친의 사업 도산으로 집안이 풍비박산이 되었던 무렵이다. 나는 고향인 광주에 있는 상무대 전투병과 사령부 부대원으로 군 복무를 하고 있었고, 사령부에서 월남어 교육대에 파견할 사병 1명을 차출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교육 후 월남 참전이 조건이었다. 집안 사정을 뻔히 알고 외면할 수 없었던 나는 동생들 학비라도 보태야겠다고 생각해 지원했다. 다행히 내가 선발되었다.

나는 경기도에 있는 군사월남어교육대에서 16주간 교육을 받았다. 4개월 교육 후 학교장 앞에서 월남어로 가상작전상황을 브리핑해야 할 정도의 실력을 갖추어야 했다. 팔팔한 청년 때였고, 군사교육이었기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졸업 후 월남 백마부대사령부에 파견된 나의 임무는 포로를 관리하는 일이었다. 포로가 잡히면 신원을 확인한 후 중앙 포로수용소로 이송될 때까지 식사와 운동을 비롯해 제네바국제협약에 따른 포로 대우를 해주는 업무였다.

업무를 시작하자마자 한 여성 포로가 잡혀 왔다. 대학 졸업자로 상당한 지성과 미모를 갖춘 여성 베트콩(越共)이었다. 무서운 눈매를 빼놓고는 나와 비슷한 나이의 아주 평범한 청년이었고, 묻는 말에 답도 잘해 주었다. 나는 그녀가 중앙수용소로 이감될 때까지 우리 사령부 구치소에서 조석으로 운동을 시키고, 매일 세끼 시중을 들어야 했다. 포로에 관한 제네바협정을 따른 것이고, 이를 소홀히 해서 국제재판소에 제소되면 사령관이 처벌받을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감이 지체되면서, 나는 그녀와 더 많은 시간을 갖게 되었고, 자연스럽게 이런저런 다양한 대화를 나누고, 때로는 함께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나는 그녀에게 우리 아리랑을 가르쳐 주었고, 그녀는 나에게 월남 민요들을 불러 주었다. 그 가운데 지금도 기억하는 민요가 있다. 월남의 아리랑이라고 할 수 있는데, 남자 친구가 아오자이 전통 옷에 모자를 쓴 여자 친구에게 노래한다.

“당신이 나를 사랑한다면, 당신이 쓰고 있는 모자(Non)를 나에게 주오. 그리고 엄마가 어디에 두었냐고 물어보거든, 다리를 건너다 바람에 날아가 버렸다고 해 다오.”

월남어로는 “애우냐우 꼬이농 오이아 쪼오냐우, 베~에냐 쪼이랑짜 쪼이매 아~아~아~쟝아 오이아 구아꺼우, 장아 오이아 구아꺼우 딘띤띤 조오~바이.” 이 노래는 군사월남어교육대에서도 어렴풋이 배웠던 노래였는데, 그녀가 확실히 나에게 가르쳐 준 것이다.

당시 유창하게 구사했던 월남어는 아쉽게도 모두 잊어버렸다. 지금은 숫자, 몇 마디 단어와 인사말 외에는 머릿속에 하나도 남아 있지 않다. 50년의 세월이 이렇게 모질까. 하지만 노래만은 남아서 가끔씩 부르곤 한다. 지난해 여름 월남 다낭을 여행했는데, 여행지에서 우리를 케어했던 월남인들이 한국 노래를 얼마나 잘 부르는지, 깜짝 놀란 적이 있다. “돌아와요 부산항” “내 나이가 어째서~” 그들은 바구니배에 우리를 태우고, 노를 저어가면서 이런 노래들을 신나게 불러댔다. 나는 반대로 그들 앞에서 월남 민요를 불렀다, 그들도 박장대소하며 너무너무 좋아했다.

다낭 여행 내내 그 여성 포로의 얼굴이 떠올랐다. 노래와 눈빛으로만 마음을 나누었던 그녀가 금방 어디선가 달려올 것만 같았다. 그녀가 수용소로 이송 가던 날의 모습이 내 가슴 속에 아직도 생생하게 살아 있음을 또한 확인했다. 계속 고개를 뒤로하고 나를 쳐다보았었던 그녀의 그 강렬했던 눈빛, 분명 적군의 눈이 아니라 동료 청년의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도 그랬으니까. 살아 있다면 이제 할머니가 되었을 그녀가 건강하게 천수를 누리기를 여행 중에 기도했다.

요즈음 그녀를 자주 떠올리게 한 일이 생겼다. 최근 재미동포 월남전참전용사 375명의 카톡방이 오픈된 것이다. 아마도 나이 탓일 것이다. 카톡방은 ‘월남 전우들의 문화 공간’이라는 이름인데, 옛 회고담을 나누며, 얼마 남지 않은 생을 전우애로 달래보자는 취지가 아닐까 싶다. 나는 참전 1년 복무 후 마지막 철수부대로 귀국했으니, 카톡방에서는 아마도 75세인 내 또래 전우들이 막내 나이가 아닐까 한다.

그렇다면 평균 80세가 넘은 전우들이 모여 있는 셈이다. 50~60여 년 전 생사를 함께 했던 전우들이다. 가끔 참전 당시의 얘기나 사진들이 카톡방에 올라오기도 한다. 그럴 때면 나에게는 그 포로 여성이 반드시 떠오르고, 그 시절의 추억을 더듬게 된다. 사실 그런 시간들이 잦아졌다. 주마등처럼 지나가는 전우들의 얼굴, 어려웠던 시절의 부모 형제들의 모습도 뚜렷하다. 참전 월급 $50을 매월 우편으로 받으실 때마다 “아들 피를 판 돈”이라며, 눈물을 훔치셨다는 어머님이 몹시 그립다.

월남 참전-중동 건설-미국 이민으로 이어진 우리 세대의 기구한 운명적인 삶이 서서히 막을 내리고 있다. 우리에게는 아쉬운 과거만 있을 뿐, 이제 미래는 없다. 슬프다. 온갖 풍상을 겪으며 미국 땅에서도 우리 세대는 또 하나의 기적을 일궈냈다. 4500만 흑인 뷰티시장을 장악한 사건이 그것이다. 그 주역들의 얼굴들이 새삼 떠오른다. 비록 앞날은 없지만, 우리 세대가 미국 땅에 뿌린 씨앗들에게 큰 희망을 걸어본다. 그 씨앗들이 거목으로 자랄 거라 나는 믿는다. 고단했던 삶의 씨앗들이 오늘의 조국을 꽃피운 것처럼…

필자소개
이계송/재미수필가, 전 세인트루이스한인회장
광주일고, 고려대정치외교학과졸업
저서: <꽃씨 뿌리는 마음으로>(에세이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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