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성주의 ‘박정희·김대중’-㉙] 김대중, “박정희 대통령은 아주 다정해”
[강성주의 ‘박정희·김대중’-㉙] 김대중, “박정희 대통령은 아주 다정해”
  • 강성주 전 MBC 보도국장
  • 승인 2024.03.30 0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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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와 김대중은 한국 현대사에 큰 족적을 남긴 인물이다. 과연 후세는 이들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강성주 전 MBC 보도국장이 박정희와 김대중을 재조명하는 작업에 들어갔다. 그가 심혈을 기울인 부분들을 연재로 소개한다.<편집자주>

생전에 김대중은 말했다. 겉보기 인상과는 달리 박 대통령이 아주 다정하게 말하더라고 했다. 김대중은 박정희와 사이에 딱 한 번 있었던 만남의 순간을 오래 기억하고 있었다. 1968년 1월 1일 오전, 청와대에서 열린 신년하례회에서 김대중은 박정희와 처음으로 악수를 하고, 5분 정도 대화를 나눴다. 이희호는 전쟁 같은 1967년 총선(6.8선거)을 목포(木浦)에서 치른 다음 1968년 새해 첫날 아침, 집을 나서는 김대중을 보고 의아하게 생각했다. “새해 첫날인데. 어디 가세요?”라고 물었더니 김대중은 웃음 띤 얼굴로 “청와대에 간다”고 말했다.

“김대중을 미워하는 사람 얼굴도 볼 겸 해서요.” 세배객은 주로 공화당과 정부 인사들이었고 그 사이에 줄을 서 기다리고 있는데, 남편을 발견한 대통령이 다른 사람들을 제치고 다가와 인사를 나눴다는 것이다. “각하, 목포에서 많은 공약을 하셨는데 이제 선거가 끝났으니 해주셔야죠?” “합시다. 그렇게 해야지요.” 흔쾌히 답했는데 실행은 없었다. 그가 국회에서 줄기차게 요구한 결과 목포공항이 생겼을 뿐이다.(이희호, 『이희호자서전 동행』, 웅진지식하우스, 2008)

김대중은 자서전에서 이날 만남을 담담하게 적었다. 10.26 사건(1979) 발생 소식을 27일 새벽 미국의 지인으로부터 전화로 전해 듣고, 놀라고, 고인에 대한 애도의 마음을 적고 난 뒤에 나오는 내용이다.

박정희 대통령과 나는 단 한 번 만난 적이 있다. 1967년 목포 국회의원 선거에서 당선된 직후인 1968년 새해였다. 청와대로 신년 인사를 갔고, 그때 선 채로 박 대통령과 5분 정도 얘기를 나눴다. 그는 나에게 매우 친절했고 내 질문에 성의있게 답했다.(김대중, 『김대중자서전』, 삼인, 2015)

그 뒤 김대중은 제15대 대통령 임기(1998.2~2003.2)가 끝난 뒤 TV 인터뷰에서 1968년 그날 첫 만남의 느낌을 이렇게 말했다. 

“나를 그렇게 못 잡아먹어서 안달하고 그랬는데, 어떤 얼굴인가 한번 본다고 갔어. 그런데 박정희 대통령이 굉장히 엄격한 인상 아니야? 냉철하고. 그런데   가니까 그렇게 다정할 수가 없더라고”(박경호 기자, “DJ-박정희 ‘얽힌 인연’… 만남은 단 한 번” 2009.8.21. KBS 9시 뉴스)

그러고는 끝이었다. 그렇게 크지도 않은 같은 나라에서 살았지만, 두 사람은 만날 일이 없었다. 그날 김대중은 신민당의 고흥문(高興門), 김상현(金相賢) 등 의원 5~6명과 함께 청와대를 찾았다. 당시 주한 외교사절, 유엔군 사령부, 국회의원과 각료, 또 사회 각계 지도급 인사들은 이런 형식으로 새해 인사를 나눴다. 그날도 3시간 동안 2,000여 명의 사람들이 다녀갔다. 박정희도 김대중을 만난 그 순간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 순간을 기억합니다. 여야 간 선거유세 경쟁이 대단했던 목포 선거에서 당선된 김대중 씨를 보게 되어 너무 반가웠고 고마웠습니다. 예상치 못했는데, 김대중 씨가 일행 가운데 줄을 서 있었습니다. 나에게는 매우 귀한 손님이었지요. 희망과 용기에 가득 찬 야당 정치인 김대중 씨를 보는 느낌이 나쁘지 않았습니다. 당찬 요구였고 짧은 시간이었지만 화기애애한 분위기였습니다.(류상영, 『박정희와 김대중의 대화』, 논형, 2022)

박정희의 이 말은 그가 구술하거나 적어둔 것이 아니다. 그는 재임 중 황망하게 가버렸고, 활동 기간(1961~1979) 내내 최고 권력자로 시종했기 때문에 이런 개인적인 술회를 할 기회가 많지 않았다. 정치학자 류상영이 많은 기록을 근거로 박정희-김대중 두 사람 간의 대화를 재구성한 데서 나온 말이다. 

강원도 양구읍 하리에 개·보수한 육군 제5사단장 관사. 박정희가 5사단장으로 재임하면서(55.7~56.7) 거처했던 관사를 단장해 2009년에 개관했다. 본관(21평)에 부속 건물(6평), 차고로 이뤄졌다. 김대중이 찾았던 인제 읍내 7사단장 관사도 이 모습과 비슷하지 않았을까?

앞서 김대중이 강원도 인제(麟蹄)군 국회의원 선거에서 후보 등록을 하지 못하게 되자, 하도 실망스럽고 갑갑해, 지역 사단장인 박정희 장군의 숙소를 두 차례나 방문한 적이 있으나 만나지 못했다고 했다. 김대중의 방문과 5.16쿠데타에 대한 박정희의 답변이다.

나는 군대 내에서 일어나는 자유당의 부정선거 움직임에 반대하는 입장이었습니다. 1956년 5월 제3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군단에서 내가 사단장으로 있던 제5 사단에도 부정선거 지령을 내렸습니다. 나는 그때 “지금부터 선거에 관한 한 나는 사단장이 아니다”고 부하들에게 천명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 김대중 씨를 만났다고 해도 어찌할 도리는 없었겠지만, 같이 부정선거를 개탄하는 마음은 확인할 수 있었겠지요. 만일 그때 실제로 만났다면 어떤 좋은 인연으로 발전할지도 모르는 일이었겠네요. 어쨌든 부정선거와 군대 내 부패상에 대한 나의 분노와 사회적 불만이 군사혁명의 한 배경이었는데, 의도치 않게 김대중 씨에게는 개인적인 불운으로 이어지게 되어 안타깝고 미안할 따름입니다.(류상영, 『박정희와 김대중의 대화』, 논형, 2022)

그러고는 시간이 빠르게 지나갔다. 68년 69년은 한반도의 안보 위기가 한껏 고조됐던 시기였고, 70년 71년은 대통령 선거로 서로 바빴다. 김대중은 야당의 다크호스로 강력한 도전자였다. 72년은 유신이 선포됐고, 김대중은 도쿄에서 귀국을 포기하고 일본과 미국을 오가면서 반(反)유신 활동을 이어갔다. 73년 한국의 중앙정보부 요원들은 한낮 도쿄 도심의 한 호텔에서 김대중을 납치해 서울로 데려온다(8.8~8.13). 

3.1민주구국선언을 마친 뒤의 촛불행진. 김대중은 구속돼 재판을 받고 2년 10개월 수감된다.

서울로 돌아온 뒤 김대중은 가택연금 상태에 있으면서 지난 67년 대선에서의 지원 연설과 71년 대선의 사전 선거운동 등의 혐의로 재판을 받고 또 ‘3.1민주구국선언’(1976)을 주도한 혐의로 재판을 받다가 대법원에서 징역 5년이 확정된다(77.3). 이듬해 형 집행 정지로 석방됐으나, 또 가택연금 상태로 감시받았다. 두 사람은 통 만날 일이 없었다. 달라도 아주 다른 길을 지나가고 있었다.

한참 지난 1979년 여름, 유신정권이 무리에 무리를 거듭해 국민도 정권도 함께 신음하고 있었다. 김대중은 박정희를 만나 마음속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 했다. 민심이 완전히 떠나간 유신체제는 파국을 향해 치닫고 있었다. 사방이 막히면 하늘이라도 열려 있어야 하는데, 어디를 봐도 비상구조차 없었다. 김대중은 박 대통령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고 싶었다. 그리고 위기의 실체를 알려 주고 싶었다.

박 대통령이 사망하기 서너 달 전, 그러니까 한여름이었다. 당시 동교동 내 집을 자주 드나들던 예춘호, 양순직, 박종태 씨를 청와대로 보내 차지철 경호실장을 만나게 했다. 차 실장에게 박 대통령과 만남을 주선해 달라고 부탁했다.(김대중, 『김대중자서전』, 삼인, 2015)

위에서 언급된 예춘호, 양순직, 박종태 등은 본래 공화당 국회의원이었으나, 3선개헌 과정에서 있었던 4.8항명 파동(1969)으로 공화당에서 제명된다. 4.8항명파동은 야당이 제출한 권오병 문교 장관의 해임권고건의안이 당 총재인 대통령의 부결처리 지시에도 불구하고 국회에서 통과되면서 발생했다. 

69년 연초부터 공화당 내에서는 3선개헌을 둘러싸고 크게 두 개의 흐름이 대립 구도를 형성하고 있었다. 3선개헌을 찬성하는 쪽은 박정희의 계속 집권을 지지하는 편이었고, 개헌에 반대하는 쪽은 후계자로 김종필이 있는데, 무리하게 개헌해서 장기집권을 하게 되면 해악이 더 많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러한 대립은 야당이 제출한 권오병 문교장관 해임안 표결에서 표면화돼, 당총재인 대통령의 부결 지시에도 불구하고 해임안이 통과되자, 불거진다. 당 총재인 대통령은 부결 지시를 따르지 않은 소속 의원에 대한 엄중한 처리를 지시했고, 이에 따라 양순직, 예춘호, 박종태, 정태성, 김달수 등 5명의 의원이 제명된다.

예춘호(芮春浩, 1927~2020)는 부산 출생으로 동아대학교 강사 시절 민주공화당 창당 발기인으로 정계에 입문했다. 63년 6대, 67년 7대, 78년 10대 국회의원을 지냈다. 1969년 3선개헌 파동 당시 당 사무총장을 맡고 있었으나, 3선개헌에 반대했다. 그 뒤 10대 국회에서 무소속으로 당선됐으나, 이후 야당 신민당에 입당해 야당 정치인으로 변신했다. 80년 김대중내란음모사건 관련해 수감되기도 했고, 이후 재야를 대표해 민추협 부의장을 맡아 활동했다.

양순직(楊淳稷, 1925~2008)은 충남 논산 출생으로 서울대를 졸업하고 해군 장교로 복무했다. 5.16 직후 중령으로 예편하고 서울신문사 사장을 지냈다. 이후 민주공화당 소속으로 충남 논산에서 6대와 7대 국회의원에 당선됐다. 69년 3선개헌에 반대해 당에서 제명됐다가 이후 복당해 8대 국회의원 선거에 나섰으나, 신민당의 김한수 후보에게 밀려 낙선했다. 이후 재야에서 민주화운동을 했다. 1979년 YWCA 위장결혼식 사건으로 신군부의 국군 보안사령부에서 고문을 당하기도 하고 1986년에는 국군정보사령부 장교들로부터 테러를 당하기도 했다. 

박종태(朴鍾泰, 1920~2007)는 광주에서 태어나 도쿄제국대학 법학부를 졸업했다. 공화당 소속으로 전남 광산군에서 6대, 7대 의원을 지내고 월남파병 결의안 표결(1966.3) 때 소신으로 반대표를 던졌다. 69년 4.8항명 파동 때 개헌에 반대했던 다른 의원들과 함께 공화당에서 제명당한 뒤 야권 정치인으로 노선을 달리해 활동했다. 79년 YWCA위장결혼식 사건 때 사회를 보다가 국군보안사령부에 끌려가 고초를 겪었다. 이후 동교동계 소속으로 민추협 부의장을 지내고 13대 국회에 평화민주당으로 국회에 진출했다.

김대중은 그 측근들 편에 당시 정권의 2인자 차지철(車智澈, 1934~1979) 경호 실장에게 박 대통령을 만나려 하는 자신의 뜻을 다음과 같이 전했다. 

“조건은 없습니다. 나한테 하고 싶은 얘기를 모두 해주십시오. 비난해도 다 듣겠습니다. 대신 내 이야기도 다 하겠습니다. 내 안의 애국충정도 다 꺼내 놓겠습니다. 합의점을 찾으면 좋겠지만 합의가 안 되더라도 상관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왜 서로를 싫어하고 왜 의견이 다른지 그 실체는 알 수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대통령과 나는 20년 가까이 대립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마주 앉아 대화한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이제는 서로를 경계하며 경쟁하는 단계는 지났다고 보입니다. 서로의 눈을 보면서 육성으로 나누는 대화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서로가 얘기를 주고받음이 나라와 우리 두 사람을 위해 절실한 시점에 서 있습니다. 실로 나라가 위중합니다. 이를 회피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며 민족과 역사에 죄를 짓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김대중, 『김대중자서전』, 삼인, 2015)

김대중은 진실로 대통령과 대화를 하고 싶었다고 회고했다. 그러나 ‘한참 후에 거절의 답이 왔다. 차 실장이 내 뜻을 성실하게 전했는지, 아니면 자신이 판단해서 적당히 물리쳤는지는 알 수 없었다’ 김대중은 ‘생전에 박정희 대통령과 충분히 얘기 못 해 본 것이 지금도 한스럽다’고 『자서전』에 기록했다. 

필자소개
MBC 보도국장, 포항 MBC 사장, 미국의 소리(Voice of America) 서울지국장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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