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이상해요. 아리조나 경계에 들어오면 선인장이 보여요” 서지원 텍사스 어스틴한인상공회의소 전 회장이 차를 몰며 차창 밖을 가르킨다. 10번 프리웨이를 타고 캘리포니아에서 아리조나로 막 들어섰을 때였다.황량한 구릉으로 선인장들이 장승처럼 서있는 게 눈에 띄었다. 키가 아파트 2층 높이는 될 듯싶다.
서회장은 텍사스 어스틴에 살고 있다. 지금의 전공은 부동산 중개. 차를 모는 가운데 가끔 문의 전화도 들어왔다. “70년대 후반에서 80년대 초반까지 LA에서 살았어요” 그의 옛 이야기가 시작됐다.
한국에서 눈썹 화장솔 제조 공장을 하면서, 오더를 받고자 직접 미국으로 건너온 게 37년 전의 얘기라고 했다. 돈은 많이 못 벌었지만 열심히 살았다는 게 얘기의 주제였다. 조수석에 탄 서회장의 부인도 얘기에 맞장구 치며 과거의 회상에 잠기는 듯했다.
“텍사스 오스틴에서 LA까지는 1450마일입니다. 왕복 3천마일이지요. 샌프란시스코까지 갔다오니까 벌써 3천마일이 넘었네요” 서회장은 올해 일흔하나다. 굳이 밴을 몰고 3천마일의 길을 오가는 것도 옛일을 되돌아보자는 뜻에서였으리라.
“미국에 처음 내린 곳이 뉴욕이었어요. 영어도 안되고, 오더를 받을 수 있어야지요. LA 와서도 오더를 받지 못해 결국 한국 회사 문을 닫았어요. 당시 집사람은 한국에 있었어요”
LA에서의 생존기(記)가 이어진다. 서바이벌 게임 수준이다. 페인팅 및 카페트 클리닝 회사를 했다가, 잡화유통에 뛰어들었다. 산호세를 오가며 성공을 기약할 때 멕시코 국경무역을 시작했다. 하지만 운이 따르지 않았다. 산호세의 파트너가 문제였다.
그래서 다시 뉴욕으로 가서 어린이 자전거와 유모차 유통을 했다. 한국의 베비라 등 그의 조언을 받고 성장한 회사들이 적지 않다고 했다. 그의 얘기속에서 남을 도우면서도 스스로는 손해 보고 산 인생을 그려낼 수 있었다.
“해외에는 성공한 교포만 있는 게 아닙니다. 만년을 한국에 돌아가서 보내고 싶어도 마음대로 되지 않아요”
한국에서 귀국동포를 유치하기 위한 주택을 짓더라도 가격이 적정해야 한다는 게 그의 얘기다. “들어가서 한두달 마음 편하게 있으면서, 비용도 많지 않은 숙소가 있으면 인기를 끌 것입니다”
서회장은 경남 진주 출신이다. 외가는 울산. “당시 서울 성북동 골짜기에 동천학사라고 있었어요. 연탄회사를 하던 분이 사회환원차원에서 학생 기숙사를 운영했는데, 묵는 값은 공짜였고 밥값만 내면 됐어요” 그도 울산출신 외사촌 형을 따라 이 숙소에서 머문 적이 있다고 회상했다.
“우리 해외동포들도 2,3세를 위해 한국에 이 같은 기숙사를 지어 봉사를 하는 인물들이 나왔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