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편지] 신상헌을 말하다
[뉴욕편지] 신상헌을 말하다
  • 노창현<뉴스로 편집인(www.newsroh.ocm)>
  • 승인 2012.07.18 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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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선(慈善)을 생각해봅니다. 사랑 ‘자(慈)’에 착할 ‘선(善)’. 자선이라는 단어에는 자식에게 헌신하는 어머니의 사랑과 자비로움, 어려운 이를 동정하여 따스한 정을 베푸는 마음이 느껴집니다. 지난 9일 저녁 뉴욕 플러싱의 한 장의사(葬儀社)에 마련된 빈소에 유난히 많은 조문객들이 몰렸습니다. 장례식이 열리는 1층 영안실에만 250명이 빼곡이 자리했고 그 옆의 별도공간과 2층 홀, 좁은 복도에까지 발 디딜틈이 없을 정도였습니다.

관속에 누운 고인과 마지막 작별하는 ‘Viewing’의 예를 올리고 유족들과 인사하고 발길을 돌리는 그 순간에도 조객들은 계속 밀려들었습니다. 한인들이 대부분이었지만 미국인 등 타민족들도 눈에 많이 띄었습니다. 망인(亡人)은 고 신상헌 대표. 우리 나이로 쉰여섯의 짧은 생애를 마친 그이는 정치인도 아니요, 명망있는 사업가도 아닙니다. 하다못해 미주한인사회에 흔해 빠진 단체들로 '장삼이사'가 되어버린 회장님 타이틀도 없습니다.
뉴욕주 롱아일랜드에서 ‘카페 제인’이라는 작은 식당을 운영하는 사장 겸 셰프일 따름입니다. 그러나 뉴욕에서만 30년을 산 그이를 모르는 한인들은 거의 없습니다. 돌연한 부음에 조객들이 밀려들었고 진심으로 애통해하며 눈물짓는 이들도 많았습니다.

고인을 기리는 모습은 단지 뉴욕만이 아니었습니다. 고인의 고려대 친우와 해병대 선후배들이 중심이 되어 고려대 병원에 분향소를 마련했는데 이틀간 수백명의 문상객이 다녀가 병원측은 “병원개원이후 이런 일은 처음 봤다”고 놀라워했다는 후문입니다. 도대체 신상헌 대표가 어떤 인물이기에 이토록 많은 이들이 슬퍼하고 안타까워하는 것일까요.

저는 진정한 자선의 마음을 그이에게서 발견합니다. 제가 뉴욕에 온 것은 2003년 10월 1일이었습니다. 그전까지 미국 출장을 예닐곱번 왔지만 장기 체류를 목적으로 들어온 제게 뉴욕은 호락호락한 도시가 아니었습니다. 몸담았던 스포츠신문이 뉴욕지사를 만들면서 편집국장으로 부임한 저는 한국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열악한 환경에 고전했습니다. 동포들에게 이제까지 볼 수 없었던 특별한 신문을 만들어 제공한다는 보람과 열의가 있었지만 놀러온 미국과 살러온 미국은 달라도 너무 달랐습니다. 그런만큼 곡절이 많았습니다. 그전까지의 삶이 온실속의 그것이었다면 당시의 제 모습은 정글속에 내던져진 어린아이와도 같았습니다.

초기이민자가 그러하듯 언어와 문화, 환경의 차이로 인한 수업료를 지불하며 뒷통수를 맞기도 다반사였지요. 그래도 세상을 좀 안다는 기자라는 직업도 낯선 타국에서는 별반 효력을 발휘하지 못했습니다. 돌이켜보면 몇차례 위기를 헤쳐나올 수 있었던 것은 가족간의 신뢰와 사랑이 첫째였습니다. 그리고 낯선 땅에서 허둥대는 저를 위해 인생의 길잡이가 기꺼이 되어준 바깥의 소중한 인연들을 꼽지 않을 수 없습니다. 미국 생활 10년째인 지금까지 은혜를 베풀어주신 분들이 너무도 많지만 가장 어려웠던 초기 가족처럼, 형제처럼 다가온 두 분이 계십니다. 박연환 전 미주태권도연맹회장과 신상헌 대표입니다.

박연환 회장은 서울의 후배가 뉴욕에 가면 연락해보라고 소개해준 분이었습니다. 일면식도 없는 저의 연락에도 박회장님은 한달음에 달려와 정이 듬뿍 넘치는 저녁을 대접하며 격려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박회장님을 두 번째 만남에서 저를 데리고 간 곳은 플러싱 유니온 한아름 상가에 있던 대복식당이었습니다. 바로 신상헌 대표가 운영하던 곳이었지요. 두분은 사적으로 대학선후배이자 해병대 선후배였습니다. 또한 스포츠라는 공감대도 있었습니다. 박회장님이 태권도인이듯 신상헌 대표 또한 국가대표까지 지낸 럭비인이었으니까요.

신상헌대표가 첫 만남에서 십년지기처럼 대한 것은 제가 스포츠신문에 있었고 당신도 뉴욕서 10년가까이 주간매체를 운영한 언론인 경력도 있었기때문이었던 것 같습니다. 기실 그이는 워낙 사람을 좋아하고 남자다운 호방한 성품이었지요. 술잔을 기울이며 피차 얼큰히 취했고 그 길로 죽이 맞아 호형호제하는 사이가 되었습니다. 상헌이 형은 사귈수록 매력이 넘쳤습니다. 사람들 모르게 좋은 일을 많이 한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구요. 세상에는 선행(善行)을 베푸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각 분야에서 내로라하는 자리에 올라 사회를 위한 도덕적 책무를 다하는 노블리스 오블리제의 전형들도 적지 않습니다.

그러나 부자와 사업가, 정치인, 경제인이 아니더라도 묵묵히 자신의 자리에서 좋은 일을 하는 보통사람들은 더 많습니다. 선행의 무게는 어느 것이나 똑같겠지만 돈도 많지 않고 이미지를 관리할 필요가 없는 보통사람의 선행이야말로 더욱 값진게 아닐까요. 상헌이 형은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형이 하는 일을 보면 인생의 목적이 어려운 이웃을 돕기 위한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해마다 한인노인들을 위한 경로잔치를 벌이는 등 그늘진 동포사회에도 관심을 쏟았지만 특히 모국의 불우한 어린이와 청소년에 대한 사랑은 각별했습니다.

예를 들면 2001년 시작한 모국결식아동돕기 거북이마라톤대회같은 것입니다. 이 행사를 위해 마라톤스타 황영조를 두 번이나 초청했고 ‘셔틀퀸’ 방수현과 펜싱 금메달리스트 김영호도 가세해 화제를 모았습니다. 이 행사들은 모국의 불우한 아동에 대한 관심을 뉴욕일원의 한인사회에 전파시키는데 큰 역할을 맡았습니다. 어느 해인가는 갑자기 대복식당에서 자선기금을 마련하기 위해 뉴욕 화가들의 작품을 판매하는 전시회를 연다고 하더군요. 알고보니 부산의 한 농아 어린이가 청각기능을 되살릴 수 있지만 수술비가 없어 애태우고 있다는 사연을 전해듣고 바로 자선전시회를 기획한 것이었습니다.

뭐니뭐니해도 세인들에게 가장 큰 감동을 주고 있는 행사는 지난 2004년부터 해마다 모국의 모범소년소녀가장들을 초청해 미국학교 학습체험, 명문교 탐방 및 문화체험 등 보름간 꿈같은 미국여행의 기회를 제공하는 것입니다. 동포사회의 유력 기업이나 단체가 특별한 관계가 있는 모국의 학생들을 초청하는 행사가 있기는 하지만 개인이 아무 연고가 없는 모국의 소년소녀가장들을 해마다 10여명씩 초청하는 행사를 갖는 것은 유례가 없는 일입니다. 이 행사가 더욱 돋보이는 것은 동포들이 마치 품앗이를 하듯 십시일반(十匙一飯)으로 힘을 보태 소년소녀가장들에게 사랑과 희망의 메시지를 전달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신상헌 대표가 가장 많은 재원을 부담하지만 늘 열명이 넘는 뉴욕의 한인동포들이 홈스테이를 제공하고 차량지원, 물품지원, 회식제공은 물론, 이런저런 자원봉사까지 맡는 아름다운 선행을 하고 있습니다.

가령 뉴욕 베이사이드에 있는 카도조 고교의 김경욱 교사가 미국학교 학습체험의 기회를 제공하고 동부관광(대표 조규성)은 나이아가라 헬기 관광 등 미동부명승지 관광을 후원하고 있습니다. 뿐만인가요. 미동부 명문대 캠퍼스 방문을 통해 꿈을 키우고 뉴욕 브로드웨이의 뮤지컬 공연, 롱아일랜드의 바다낚시 등 어지간한 관광객들도 하기 힘든 다양한 체험을 하고 돌아갑니다.

신상헌 대표는 전혀 부자가 아닐뿐더러 오히려 최근 미국의 경기침체로 자신의 비즈니스도 어려움을 겪어 왔습니다. 그럼에도 모국의 소년소녀가장들에 대한 관심과 사랑은 조금도 위축되지 않았습니다. 미국에 오는 소년소녀가장들을 선발하고 이들을 인솔하기 위해 해마다 일부러 휴가를 냈던 당시 천주교 부산교구 김두윤 신부님은 이런 일화를 들려주었습니다. “몇년전 가을에 학생들을 데리고 나이아가라 폭포 관광을 가게 되었는데 너무 추워서 파커를 사야 했어요. 마트에서 싼 것을 사자고 했더니 신상헌 사장께서 아이들이 맘에 드는 것을 사야한다고 쇼핑몰에서 노스페이스 파커를 사주더라구요. 아이들이 좋아하는 것을 보고 그러더군요. 신부님, 사실 저런 파커를 제 아들한테도 사준 적이 없어요..”

상헌이 형은 그런 분이었습니다. 가족보다 이웃이 먼저였고 자신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들이 있다면 열 일 제쳐두고 나서는 정이 넘치는 사나이였습니다. 그런 남편을 성원하며 묵묵히 내조하는 부인과 멋지게 성장한 두 남매도 얼마나 훌륭하고 대견한지요.

한번은 제게 전화를 걸어와 한국에서 입양된 어느 여성이 부모님을 찾고 싶어한다며 도움을 줄 수 있냐고 하더군요. 입양당시 보육원의 서류를 들고 온 20대 여성은 한국말을 전혀 못했습니다. 롱아일랜드 식당에서 알게 된 손님이었는데 딱한 사연을 알게 된 상헌이 형이 그냥 지나칠 리 없었습니다. 그녀에 대한 이야기는 모국의 통신사를 통해 전해졌지만 안타깝게도 부모를 찾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나 상헌이 형의 따뜻한 마음은 그 여성에게 잘 전해졌을 것입니다. 홍명보 올림픽축구대표팀 감독이 현역시절 미국 프로축구(MLS) LA 갤럭시에서 활약할 때 뉴저지 러더포드에서 한 차례 경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상헌이 형은 이튿날 택시를 대절해 홍명보선수를 뉴욕 플러싱의 대복식당으로 초청, 고려대 동문과 지인들을 불러 환영만찬을 베풀기도 했습니다.

뉴욕에서 유일하게 복요리가 가능했던 대복식당은 뉴욕 한인들의 사랑방 역할도 했지만 안타깝게도 경기침체에 따른 재정압박으로 수년전 문을 닫았습니다. 대복식당을 사랑했던 사람들은 그래서 상헌이 형이 미네올라에서 운영하는 카페 제인을 ‘미네올라 대복’이라는 부르며 아쉬움을 달랬지요. 지난 2월 오랜만에 아내와 함께 플러싱 156가 H마트를 찾았다가 빵집에서 상헌이 형을 우연히 만났습니다. 너무나 수척해지고 마른 모습에 깜짝 놀랐습니다.

 
형은 지난해 12월 병원에서 간암판정을 받고 서둘러 수술을 했다고 하더군요. 왜 알려주지 않았냐는 원망에 "뭘 이런것 갖고 연락하냐. 괜찮아. 많이 좋아졌어"하며 예의 함박 웃음을 날리는 형이었습니다. 타고난 강골에 투지를 잘 알기에 저는 형이 병마를 이겨낼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습니다. 두달전 식당에 전화를 했을 때 통화를 하지 못했지만 건강이 악화됐을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너무도 허망한 부음을 접하고 속절없이 무심한 아우가 되고 말았습니다.

형이 가고 없는 지금, 모국의 소년소녀가장들을 미국에 불러줄 사람들이 또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언젠가는 상헌이 형같은 정 많은 독지가들이 나타나 불우한 환경에서도 용기를 잃지 않는 소년소녀가장들을 위해 미국여행의 기회를 안겨줄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어느 한사람의 노력보다는 모두가 조금씩 힘을 더해 행복과 기쁨을 나누는 그런 여행이 되기를 바랍니다. 상헌이 형은 그랬지요. “인생의 목적이 행복한 삶이라면 얻은 행복의 절반은 나눠야지.. 있는 집 아이들에겐 그냥 한번 하는 미국 여행이지만 어려운 환경에 있는 아이들에겐 꿈을 갖는 소중한 여행이 될 수도 있잖아..” 형의 미소가 그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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