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say Garden] 뛰뛰 빵빵 한국차 간다
[Essay Garden] 뛰뛰 빵빵 한국차 간다
  • 최미자<미주문인협회 회원>
  • 승인 2012.08.09 10:03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미국에 이민 와서 거의 일 년이 지나고서야 나는 운전면허증을 획득했다. 말도 안 통하는 나라에 사는 것도 겁이 났지만 끄덕하면 고소(sue)를 하는 나라라는 이야기를 수없이 들었기에 차를 타고 나가는 일은 조심스럽다. 한국에서처럼 거리에서 버스를 거의 볼 수 없으니 누구에게나 자가용은 필수품이다. 우리 가족이 사용할 어떤 종류의 자동차를 살까 하고 고민했다. 운전 실력도 능숙하지 않았기에 좋고 큰 자동차는 감히 생각도 못했다. 또한, 차가 크고 좋을수록 내야 할 보험료도 높아서 고려해야 했다.

하는 수 없이 콩만 한 4인승 도요타를 샀다. 1980년대와 90년대, 미국에서 일본 자동차는 미국의 쉐비, 포드, 뷰익, 링컨을 물리치고 인기였다. 초등학교에서 겨우 알파벳 정도로 영어를 알고 있는 어린 딸아이가 길을 가다 자동차 뒤에 붙여진 도요타가 무슨 뜻이냐고 호기심으로 물어볼 정도로 길거리에는 일본 차가 많았다. 실제로 당시 일본에서 만든 차들은 거의 고장이 나지 않았고 연료도 적게 들으니 경제적이었다. 하지만 몸체가 약해 사고가 나면 종잇장처럼 구겨졌다.

일제 강점기 동안에 한국어를 쓰지 못하고 강제로 일본말로 공부하던 나의 부모님은 한이 서려 있었다. 우리나라의 많은 것들을 도둑처럼 일본으로 가져가 제 나라 것인 양 말하는 일본에 늘 분노하던 부모님의 얼굴을 난 보면서 자랐다. 그래서 자녀인 우리에게 평소에 한국을 사랑하는 애국심을 무척 강하게 심어주었다. 하지만 우리는 이민 초기 당시 미국에는 한국차가 없으니 일본산 차를 사야만 했다. 작은 접촉 사고로 첫 번째 차는 버려지게 되었고 다시 팔 때를 고려하여 두 번째 차도 일본차를 샀다. 어머니는 그때도 야단을 치셨다. 이제 우리 한국차가 나오는데 또 일본 차를 사냐고. 1990년대 중반에야 현대 자동차의 미국 판매가 시작되었다. 그리하여 미국으로 연수를 나온 한국분들이 한국차를 타다가 귀국할 때 가지고 간 분들도 있지만 많은 분이 이곳에 놓고 갔다. 그분들은 한국 자동차의 부속품이 아직 고장이 잘 난다며 불평했다.

2000년에 들어서 10만 마일 또는 10년의 품질 보증을 외치며 현대자동차가 질적 수준을 자랑했기에 우리도 한대 샀다. 많이 사용하지 않아 아직 엔진은 문제가 없지만, 유리창을 닦는 막대기와 차 문의 스위치가 아직도 고쳐지지 않았다. 대학을 졸업하고 취직한 딸이 한국차를 사자고 해서 가족의 만장일치로 산 것이다.

지금은 세상에 계시지 않지만, 한국산 자동차를 사라던 어머니 부탁대로 우린 애국을 했다. 독일 국민이 나라를 구하던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한국자동차를 사라던 어머니. 어머니가 살아계시면 자랑스러운 한국차에 몸을 싣고 얼마나 흐뭇해 하실텐데 생전에 살던 아파트를 지나며 나는 눈물이 그렁 거렸다. 운동선수의 어깨근육처럼자동차의 앞 모습이 든든해 보여 우린 두꺼비 라는 별명도 붙였다.

최근에는 우리가 사용하던 일본 차를 조카에게 넘기고 새 한국차를 샀다. 기아 자동차와 현대 자동차를 두고 결단을 내리기가 무척 어려웠다. 마음에 들어 고른 한 대의 차는 내가 좋아하는 흰색이다. 이것저것 많이 장치되어 있으니 우리가 계획했던 예산을 조금 초과했다. 두꺼비 2세가 또 우리 가족이 되었다. 연료통이 커서 언덕길을 올라가도 끙끙 힘이 달리는 엔진 소리가 나지 않아서 좋다. 비행장에 나가 딸아이의 무거운 책 상자를 나르고 내가 좋아하는 정원수를 살 때도 걱정이 없다. 자동차를 만드는 분들이 10년 동안 얼마나 연구를 거듭했는지 새로 산 자동차 안에는 별의별 게 다 있다. 아직도 단순한 옛날 방식을 좋아하는 나는 첨단 과학을 배우는 게 골치 아프지만, 편리하게 사용할 날이 오리라. 고속도로에 올라 "뛰뛰 빵빵 한국산 차 나간다. 길을 비켜라." 으스대면서 에헴 하고 타고 간다. 더구나 앞뒤 옆으로 한국차가 지나가면 더욱 신이 난다.

자동차에 대한 상식을 배우려고 인터넷에 들어가 보니 앨라배마에 있는 자동차 공장을 견학시키는 프로그램(www.hmmauas.com)이 있었다. 7살 이상 아이들이면 부모나 어른의 보호 아래 공장을 견학시켜주고 단체도 환영한다. 현대 자동차 공장에서 일하여 먹고 사는 미국인들이 엄청나게 한국에 고맙게 생각한다는 신문기사를 읽을 때 세계화라는 말이 바로 이런 것이 아닌가 하고 가슴에 다가왔다. 국경을 떠나서 서로 돕고 살아가는 세상이 된 것이다. 작은 반도의 한국이 이토록 강하게 살아가는 비결은 우리 부모님께서 가르쳐준 귀중한 정신적 유산이 아닐까. 요즈음 빈둥거리는 한국의 젊은이들은 조국의 앞날을 어떻게 바라보며 살아갈까. 하나 들 낳아 기르다 보니 지나친 과잉보호로 뒤늦게 부모들도 후회하는 것 같다.

정주영(1915-2001) 사장도 온갖 고생 끝에 한번은 미군 트럭을 고치다가 1967년에 자동차 공장을 설립했다고 전해진다. 38선 이북의 강원도 시골, 가난한 농부의 큰아들로 태어난 그의 업적이 긴 세월 지나 미국까지 뻗친 것이다. 지난 10년간 미국에서 쌓아 온 저렴한 가격, 두둑한 신용과 애프터 서비스로 한국차도 이젠 날개를 달았다. 우리가 최근에 산 자동차도 한 달 전에 공장에서 나와, 금방 소비자인 우리에게 전달된 것이다. 올해의 판매도 40만대를 돌파했다 한다. 미국의 고속도로 안전보험협회에서 (HS Top Safety Pick) 주는 상을 2012년에도 획득했다. 정면과 측면, 뒤집혔을 때의 충돌 테스트에서 가장 안전한 차라고 인정받은 것이다.

나의 친척 여조카가 자랑스럽게도 기아차의 디자이너란다. 회사의 이익 배당금을 직원에게 좀 더 나누어주고, 근무하는 직원들도 애국심으로 좋은 자동차를 해마다 열심히 만들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일본 차를 즐기는 한국사람들이 더 많이 우리 국산 자동차를 살 수 있도록 말이다.

 


[필자 소개] 교포월간지 ‘피플 오브 샌디에고’ 주필역임, 수필집 ‘레몬향기처럼(2007년)’과 ‘샌디에고 암탉(2010년)’를 출간했고 한국문인 및 미주 문인협회 회원으로 활동 하고 있는 재미수필가. 샌디에고 라디오코리아(www.sdradiokorea.com)에서 '최미자의 문학정원‘ 매주 금요일 연출과 진행 중.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 서울특별시 송파구 올림픽로35가길 11(한신잠실코아오피스텔) 1214호
  • 대표전화 : 070-7803-5353 / 02-6160-5353
  • 팩스 : 070-4009-2903
  • 명칭 : 월드코리안신문(주)
  • 제호 : 월드코리안뉴스
  • 등록번호 : 서울특별시 다 10036
  • 등록일 : 2010-06-30
  • 발행일 : 2010-06-30
  • 발행·편집인 : 이종환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석호
  • 파인데일리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24 월드코리안뉴스. All rights reserved. mail to wk@worldkorean.net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