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5] 나의 모스크바 특파원 시절
[연재-5] 나의 모스크바 특파원 시절
  • 토론토=송광호 기자
  • 승인 2012.10.24 17: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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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광호 기자의 모스크바 특종기

 
간사사(부산일보)가 대구매일에서 부산일보로 바뀐 지난 1996년 1월엔 ‘관훈클럽 국제보도상’을 수상했다. 역시 러시아 기자로부터 힌트를 얻은 소득물이다. 어느 날 영어소통이 가능했던 이즈베스티야 기자가 한 프라우다 기자를 소개했다. 이들 역시 평양특파원을 역임한 북한전문기자들이다.

이 프라우다 기자가 대화중 “북한에 한 고위 군(軍)인물이 일제강점기 관동군포로가 됐던 조선군 출신”이란 얘기를 꺼냈다. 그 순간 ‘혹시 관동군 징병포로 명단을 찾을 수 있나’하는 생각이 떠올랐다. 관동군 일본포로들 중 강제로 끌려간 징병조선인들 명단도 어딘가에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 후 서너 군데 러시아 기관을 뒤졌으나 허사였다. 그런데 한 러시아 대학교수가 장소를 알려줬다. ‘한번 러시아 국립 군(軍)문서보관소로 연락해 보라’는 것이다. 건물은 모스크바 북쪽 외곽에 소재해 있었다. 사할린 태생의 고려인 통역을 데리고 약속시간에 갔다. 책임자소장은 러시아 연방 타타르스탄 출신의 키 큰 역사학박사로 이름은 만수르 무하메자노프였다. 그가 직접 안내한 건물 내부는 도서관처럼 보였다. 선반 위엔 먼지로 뒤덮인 서류들이 촘촘히 메워져 있었다.

▲ 관동군 포로내용 러시아 서식
소장은 “여기 6만여 명의 관동군 포로명단이 있다”고 말했다. 그는 무작위로 서류 하나를 꺼내 들춰보였다. 러시아어로 적혀진 서류엔 관동군 포로명단과 내용이 간단히 적혀 있었다. 먼저 일본인 이름이 있고 괄호 안에 한국 이름이 다시 적혀있어 신분구분이 확실했다. 그 다음에 본적지, 생년월일, 직업, 계급, 체포시기, 수용장소 등 순이다.

드디어 관동군에 강제 동원된 조선인명단 발굴이 가능해진 순간이었다. 이제 일제관동군의 우리 징병명단 발굴로 대한민국의 첫 햇빛을 보게 될 것이니 얼마나 다행스런 일인가. 그런데 정작 6만 여명이나 되는 명단 속에서 어떻게 한국이름을 뽑느냐가 문제였다. 서류를 하나씩 들춰 일일이 수작업으로 명단 검토하는 일이 어디 보통 일인가.

“한국인만 따로 가리는 작업을 속히 해 주었으면 좋겠다”고 부탁했다. 그는 잠깐 생각하더니 “직원들이 따로 (근무시간외) 일해야 하는데 상당시일과 인건비용이 필요하다”고 대답했다.

며칠 후 다시 찾아갔다. 신문사에는 취재 건을 설명하고 경비승인 여부를 물은 뒤였다. 강원일보(당시 이희종 편집국장/현 사장)와 간사사(부산일보)는 “좋다. 그대로 일을 진행시켜라”고 긍정적인 답이 왔다. 소장과 협의 결과 ‘작업 기간을 최소 6개월 이내, 인건비는 6천 달러’로 정했다.

소장은 합의 후 “지난날 역사기록을 정립하는 일은 어느 나라든 국가적 사업인데 어찌 신문사에서 이 일을 맡아하느냐”고 물었다. 이미 일본, 독일 경우는 정부나 적십자사 같은 공공기관에서 그들 포로병기록들을 전부 가져간 상태라는 것이다.

그는 “우리는 국가기관도 아닌 당신 신문사의 성의를 높이 평가해 적극 협조키로 결정한 것”이라고 덧붙였다. 고마웠지만 한편으론 이 6만 여명 포로명단에서 한국인을 가려내는 대 작업을 과연 제대로 해 낼 수 있을지 걱정스러웠다.

그해 (1995년)7월 초. 드디어 서류작업을 끝냈다는 연락을 받았다. 소장은 디스켓 한 장과 명단을 건넸다. 관동군 한국인포로는 총 6,134명. 이중 징병(徵兵)자는 3,217명(사망자 145명 포함), 징용(徵用)자 수는 2,917명이다.
포로 가운데 장성급 3명(임준해, 박병두, 마천산)도 포함돼 있었다. 이들 포로병은 지난1948년 석방되면서 북한에 넘겨져 북한 인민군 창설 토대가 되었다고 전해진다. 포로병 중 이활(李活)은 북한 공군중장까지 지내는 등 주요 군 요직을 맡았다. 북한에 인계된 2천여 명의 포로병들 중 남한출신 470명은 흥남에서 도보로 38선을 넘어 고향을 찾아갔다. 또 일부이긴 하지만 고성만(高聲萬/전 하바로프스크 한국어 방송국)씨나 유학규(전 모스크바 국제방송국 일본 번역원)씨 등 러시아에 귀화한 사람도 있었다.

▲ 레베데프 비망록 감상문
1995년은 광복50주년이 되는 해다. 그해 광복절 날 강원일보, 부산일보 등 춘추사 소속 5개 신문은 1면 머리기사로 관동군 한국징병자 발굴기사를 대대적으로 터뜨렸다. 6천여명 명단게재는 며칠간 계속됐고, 관동군포로군 모임인 시베리아 삭풍회(朔風會/92년 발족)측과 연결되기도 했다. 삭풍회에서 찾고 있던 12명의 신분도 확인됐다.

당시 삭풍회 이일용(李鎰用)회장은 “우리 45명 회원들 중 33명은 확인됐고, 나머지(12명)는 지난 94년 9월 러 외무부에 신분증명발급을 요청했었다.”며 “그간 (한국에)명부가 없어 신분확인이 힘들었는데 이제 귀사로 인해 일괄 타결돼 정말 기쁘다”고 말했다. 신문보도를 통해 부산 등지에서 “나도 관동군 포로병이었다”며 서너 명이 연락해 와 삭풍회에 명단을 전하기도 했다.

아무튼 이로 인해 관훈클럽 국제보도상을 탔지만 사실 생각조차 않던 상이었다. 담당데스크(부산일보 국제부장)가 독촉해 신청마감 날 겨우 접수시켰다고 전해 들었다.

언젠가 누가 ‘이 기자상(관훈클럽 국제보도상)은 지방언론에선 강원일보가 유일하다’고 지적했다. 하지만 기자능력이 탁월해 꼭 상을 받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내 경우 더욱 그렇다. 두 번의 수상 다 데스크 도움으로 이루어졌다. 누구든 유능한 데스크와 같이 일한다는 것은 행운이다.

모스크바에서 김대중 김영삼 전직 대통령 두 분을 만났다. 당시 대통령선거에 실패한 DJ는 정계은퇴 후 영국에 머물렀다. 그는 1993-95년 사이 국립모스크바대학 명예박사수여 건으로 3번 모스크바를 방문했다. 그때마다 특파원들과 호텔에서 식사하며 환담했다. 우리는 매번 “정말 정계로 복귀 안하실건지, 정치와는 완전 담벼락을 쌓으신 건지”를 집요하게 물었다. DJ는 “담벼락이야 허물 수 있지만 내 마음은 절대 못 허문다”고 강조했다.

YS와는 1994년 6월 러시아 국빈방문 시 자리를 같이했다. 크렘린 궁에서 특파원단과 조찬을 함께할 때였다. 특파원들은 이런저런 질문을 던졌다. 나는 당시 딱한 처지의 사할린동포 취재를 마쳤던 터라 “앞으로 해외동포의 이중국적 문제 허용가능성”여부를 타진했다. 그러자 YS는 “아니, 단한 개 국적을 못 가진 사람도 있는데 두 개 국적까지 무슨...”이라며 일소에 부쳤다.

두 분이 각각 정상회담을 위해 모스크바(94년/YS)와 캐나다 오타와(99년/DJ)를 방문했을 때다. 대통령 수행기자들의 기사전송을 위해 현지에서 (넓은 회의실을 이용해) 국제통신실을 준비했는데, 알고 보니 중앙언론만을 위한 방이었다. 지방기자들은 따로 마련된 10분의1정도 되는 조그만 룸에서 들락거리고 있었다.

같은 청와대 출입기자인데 왜 지방언론은 그렇게 차별 당해야하나. 대통령은 달랐지만 두 번씩이나 같은 현상을 목격하다보니 보기 딱했다. 아직도 지방기자에게 그런 차별대우가 계속된다면, 또 이것이 오래전부터의 정부관행으로 굳어진 악습이라면 속히 달라져야 할 것이다.

수년전 어느 한국 TV방송국에서 전화가 왔다. 관동군 징병자 명단을 묻길래 부산일보로 연락하라고 했다. 그러나 부산일보에도 알아보니 없다고 한단다. 또 2년 전 북한군정 레베데프 비망록에 관련해 대구매일신문으로 연락했더니 분실된 것 같다고 했다. 김일성 자개거울은 신문사에 그대로 남아있는데 비망록은 아무리 찾아도 없다는 것이다.

그럼 그 자료들이 도대체 어디로 사라져 버린 것인가. 18년 전 두 간사사로 직접 전했던 귀중한 역사자료들이다. 세월은 흐르고, 사람이 바뀌고, 당시 기자들은 대부분 은퇴해 현직을 떠난 지 오래다. 소속사가 다른 공동특파원 제도가 중단되면서 결국 껍질뿐인 특종이란 허울만 남게 된 것인지. 아, 이것 또한 지방언론이 갖는 한계란 말인가.

모스크바에 발을 디딘 1992년부터 20년이 흘렀다. 당시 함께 움직였던 모스크바 주재 기자들은 언론계, 학계, 정치계 등지에서 논설위원, 대학교수 등으로 근무하며 혁혁한 발자취를 남겼다. 특히 김석환 중앙일보 초대특파원과는 자주 접촉을 했다. 당시 전부 조간신문체제였으나, 지방지와 중앙일보만이 석간(당시 동아일보조차 석간에서 조간으로 바뀜)이라 서로 정보를 주고받았기 때문이다. 나이로 따져 당시 특파원 막내였던 그는 러시아 통으로 나중 논설위원을 거쳐 국무총리 공보수석, 대학 부총장 등을 지냈다.


또 김흥식 연합통신(연합뉴스 상무로 승진), 오중석 조선일보(문화부장), 김선기 KBS위원 등이 당시 특파원단 간사를 역임했다. 누구든 힘든 환경에서 뛰어다니던 시절이었고 안성규 중앙일보 2대 특파원과 김성호 SBS 초대 특파원은 총탄이 오가는 러시아 분쟁지역 등을 취재한 탁월한 기자로 기억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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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광호 기자(강원도민일보 북미특파원 /재외동포언론인 협회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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