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8] ‘아버지의 6.25 일기’
[연재-8] ‘아버지의 6.25 일기’
  • 서지원(전 텍사스오스틴상공인회장)
  • 승인 2012.11.10 08:2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 서지원 회장
필자 서지원씨는 텍사스 오스틴에서 부동산 컨설팅 업에 종사하고 있다. 고향은 진주. 그는 1970년대 후반 자신이 경영하던 화장솔 공장을 위한 오더를 받기 위해 미국으로 건너갔다가 정착한 케이스다. 그가 소장하고 있던 선친의 전쟁일기를 본지에 공개했다. 그의 어린 시절 경험이기도 하다. 이를 본지에 연재한다.<편집자주>

1950년 9월5일
주룩주룩 비가내리고 있다. 소는 죽을 먹으며 파리를 쫒느라고 고개질을 하면 입언저리에 묻어있는 죽은 튀어 솥뚜껑에 떨어진다. 기둥에다 목을 비빌 때는 냄비위로 털과 먼지가 흩날리고 있다. 외양간 변소냄새도 그간 어지간히 맡아서 후각이 무디어 졌는지 견딜 만큼은 되었다. 저녁때는 서쪽하늘이 트이니 비는 개고 바람도 자고 논에는 물이 넘쳐 있고 농사나마 풍성한 해가 되려나 보다. 속살로 가져간 옷감은 되돌아 왔다. 있는 사람일수록 지독하다. 식량도 못주겠고 터무니없이 깎으려 해서 돌려 달라 한 것이다.

1950년 9월6일
통영서 국민학교 교사로 있는 사람이 고향인 장재실에 와 있다는데 도중에 갖은 고생을 다했다며 해저도로가 폭파되어 피난한 사람들이 많이 죽었다는 전언에 가슴이 철렁했다. 강물은 한길은 더 되어 보이는데 언제쯤 물을 건널 수 있을지 물이 빠지면 그 사람을 만나야 하겠다. 김의사가 아이들 추석 옷감을 몇 벌 가져갔다. 우리는 눈이 번적 뜨이는 듯 했다.

저녁에 이 댁 친척뻘 되는지 다니려온 60남직한 노인이 내 생년월일을 묻더니 사주를 봐준다. 장차 의식 걱정은 없을 것이란다. 이 팔자가 앞으로는 펴인다고, 죽음과 삶의 접경에서 헤매고 있는 이 마당에 듣기만해도 마음이 좀 놓이는구나. 방장(모기장)을 치고 아이들을 재웠다. 잠이들 무렵 폭탄이 자골에 작열 한듯하다. 마을 사람들은 자다가 혼란 속으로 말려들었다.

1950년 9월7일
날이 새니 탄피가 여러 집에 떨어 졌고 흙을 둘러쓴 집도 많았다. 그런데 폭탄은 어데 떨어 졌는지 아무도 모른다. 집주인 생일이라고 찹쌀과 팥으로 지은 밥과 소고기가 둥둥 떠는 국을 갖다 준다. 조금 있으니 마을 사람들이 모여 든다. 전란 속에서도 이렇게 생일잔치를 할 수 있으니 부럽다. 어머니는 조금 있으면 회갑이 되신다. 모든 것을 없애고 전화 속에서 사안무친 한 이곳 외양간과 변소 사이에서 흙바닥에 자리를 깔고 맞이할 그날을 생각하면 가엽은 신세가 한탄스럽기만 하다.

술이 얼큰히 취하니 말이 많다. 결국엔 어제 내 사주를 봐 주던 노인과 일전 윗집사위의 병을 위해 손대를 잡고 경을 읽으며 잡귀를 물리치던 상투를 쫓은 낫살이 떨어진 사람이 붙고 말았다. 젊은 사람들은 아니꼬운 듯이 보고만 있고 나이든 사람은 시비를 말린다. 마지막엔 화해가 되고 상투를 쫓은 사람은 유식을 자랑이나 하듯이 한문 ‘나부랑이’를 시부렁 거리고는 뜻을 새기더니 자리를 뜬다.

간밤의 투탄은 강변에 단 한 채 있는 집에서 소고기를 굽다가 저지른 일이라 한다. 농과 보따리를 열어 가을 옷을 끄집어내고 돈과 바꿀 수 있는 것을 챙겨 놓았다. 윗집 사위는 다리가 거의 완쾌되어 지팡이 없이도 다닐 정도가 되었다. 문산으로 가다가 그곳에는 인민군이 많으며 부역이 심하다는 말을 듣고 되돌아 왔다고 한다.

1950년 9월8일
우울한 비는 내리고 있다. 이 댁 매부가 우중인데도 문산서 와서 내외 분의 옷감을 몇 벌 가져갔다. 운무는 짙어 비행기는 날지 않는다. 캄캄한 밤중에 어디선가 멀리서 쿵쿵 하는 대포 소리가 메아리쳐 온다.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쓰라림 속에는 만감이 서려만 간다. 쥐는 밤새 무엇을 뜯고 있다.

1950년 9월9일
비는 쉴 새 없이 내리는데 비행기 소리는 뇌성처럼 울려온다. 난파한 선원이 무인도에서 구원을 기다리는 심정이 이런 것일까? 시계 소리만 마음의 울적을 달래 주는 듯하다. 여태껏 자고만 있든 시계가 어떤 충동으로 지금은 쉬지 않고 가고 있다. 하오 1시쯤 되어서 비가 그치자 기다렸다는 듯이 비행기는 날아온다. 큰들 인지 정촌인지 몇 대의 폭격기는 50분 동안이나 때려 부수고 있다.

1950년 9월10일
이 마을 청소년이 16명이나 의용군으로 나갔다. 이 댁 매부가 되는 사람이 식량을 가져 왔다. 자기 딴에는 우리 사정을 봐서 후하게 한다고는 하나 실제로는 그렇지가 않기에 주인 면목도 있고 해서 일부만 돌려주고 현금을 받았다. 저녁에 등에 오르니 몇 사람들이 나와 있다.

그들은 부역에서 돌아온 사람들인데 한사람은 영오서 악양까지 인민군 부상병을 밤을 타서 운송 하는데 5일 간이나 걸렸으며 그동안 환자의 고통은 목불인견 이었다며 악양서는 많은 부상병들이 죽어가고 있더라는 이야기였고, 또한 사람은 군북 근방까지 가면서 폭격과 기관총에 구사일생으로 살아났으며 밥을 지을 수도 없어 4끼나 굶었다고 한다.

1950년 9월12일
무겁게 내려덮혔든 구름도 걷어지고 시원한 바람이 불고 있다. 천고마비의 좋은 날씨다. 김 의사는 오늘도 옷감을 가져갔다. 밤엔 맑은 하늘에 반짝이는 별들을 우러러 보며 향수에 젖어 든다.

1950년 9월13일
아래 여울에는 강을 건너는 사람이 많다. 물살이 센 푸른 물을 건너 장재실로 갔다. 장재실 사람들은 태반 딴 곳으로 피난 가고 시내에서 온 사람들이 많다. 교사를 찾았으나 가족이 모두 어디로 가고 없다. 탁영남군을 찾아 두무실로 갔다. 산을 넘으면 사방이 산인 이 두무실이야말로 천연의 요새라 할까 여태 기관총 한방 맞지 않았다니 시내가 가깝고 피난처로는 최적지라 하겠다.

탁군을 만나 반가운 마음 한량없다. 군데군데 지어져 있는 바라크를 보니 간도에 이민한 개척민들이 저랬을 것이라 느껴진다. 비행기가 뿌리고간 삐라는 15분 내로 시내에서 피난하라 했다한다. 그러나 탁군이 어제 가매못에서 열이 어머니를 봤다는 말을 듣고 아무리 위험 하드래도 열이 어머니를 만나야 겠다고 탁군과 하직하고 산을 넘어 가매못으로 들어갔다. 열이 어머니는 어디 계시는지 열이 어머니 열이 어머니 부르며 못 쪽으로 내려갔다.

마침 열이 어머니는 못에서 빨래를 하다가 내 소리를 듣고 뛰어 올라온다. 너무도 반가워 말이 막혔다. 열이 어머니는 눈물이 글썽했고 나의 눈시울도 뜨거웠다. 형제를 만난 듯한 이 기쁨. 금곡으로 피난했다가 탄환 속을 헤치고 밤새도록 60리 길을 걸은 것이 역시 싸움터로 들어갔고 대포와 따발총 소리 요란한 속을 헤매며 고개를 3개나 넘을 적에 비행기를 향하여 치마를 흔들면서 사선을 넘은 이야기를 눈물 없이는 들을 수 없었다.

간밤 꿈에 양자 어머니가 보이기에 오늘은 무슨 소식을 들을까 했더니 친구의 우정이 이렇게 영적으로 통한다면서 감회가 무량 했다. 초토 위에서 살아서 만난 이 기쁨은 우정의 감격이 더 커서 너무도 많은 할 말이 있건마는 못 다하고 이별함이 아쉬웠다. 여고 교사는 벌집이 되여 있고 사택도 몇 군데가 부셔져 있다. 봉곡동 새마을 집은 큰 피해는 없으나 살고 있는 사람이라곤 볼 수 없다.

신축 중이던 중학교 콘크리트 건물도 많이 파괴 되었으며 B-29의 대 폭격으로 연화사 부근은 집 이 라고는 한 채도 없다. 서봉동 술도가도 타버렸고 이 일대 남아 있는 몇 채의 집은 다 병들어 거의 넘어가고 있다. 우리 집터에는 김군 어머니가 양철로 막을 처 놓았으나 비어 있다. 황패한 자리에 그래도 움막을 짓고 몇 호가 살고 있다.

마침 김시동을 만났다. 그날 밤 김군은 도동으로 갔으나 가족의 소식을 몰라 수소문 끝에 명석면에서 가족을 만났다며 지금 그곳에다 바라크를 짓고 있다한다. 임채한 형의 여관도 동아제재소도 지금은 볼 수 없다. 시내의 평지엔 서 있는 집이라곤 없으며 솥 공장 부근에 반신불수의 집이 몇 채 있고 옥봉, 봉래동 변두리에 살아남은 집들이 이 참혹한 광경을 지켜보며 떨고 있다.

황막한 폐허에 바람이 몰아치면 양철 소리는 원혼의 애절한 통곡처럼 들린다. 유족들이 찾아와 휘발유를 뿌려 그 자리에서 시신을 화장 했다한다. 둑을 넘으니 이곳은 사람이 살고 있는 이승 저자(시장)가 번성하고 인민군도 있고 자위대도 있고 먹음직한 음식도 팔고 있다.

뚝 넘어 저쪽이 지옥이요 이쪽이 속세 구나. 멀고먼 지옥이 오늘은 지척에 있구나. 말죽고개를 내려설 때 정규봉군을 만났다. 낭만적이고 문학적이며 교육자로서의 정군은 우리가 살아서 다시 만나는 환희에서 이야기 솜씨는 더 멋지다. 유엔총회에 대한 이야기 조선문제에 대한 이야기로 많은 시간은 흘렀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 서울특별시 송파구 올림픽로35가길 11(한신잠실코아오피스텔) 1214호
  • 대표전화 : 070-7803-5353 / 02-6160-5353
  • 팩스 : 070-4009-2903
  • 명칭 : 월드코리안신문(주)
  • 제호 : 월드코리안뉴스
  • 등록번호 : 서울특별시 다 10036
  • 등록일 : 2010-06-30
  • 발행일 : 2010-06-30
  • 발행·편집인 : 이종환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석호
  • 파인데일리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24 월드코리안뉴스. All rights reserved. mail to wk@worldkorean.net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