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최종회] ‘아버지의 6.25 일기’
[연재-최종회] ‘아버지의 6.25 일기’
  • 서지원(전 텍사스오스틴상공인회장)
  • 승인 2012.11.24 0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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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지원 회장
필자 서지원씨는 텍사스 오스틴에서 부동산 컨설팅 업에 종사하고 있다. 고향은 진주. 그는 1970년대 후반 자신이 경영하던 화장솔 공장을 위한 오더를 받기 위해 미국으로 건너갔다가 정착한 케이스다. 그가 소장하고 있던 선친의 전쟁일기를 본지에 공개했다. 그의 어린 시절 경험이기도 하다. 이를 본지에 연재한다.<편집자주>

1950년 9월24일
죽림 속에서 소를 잡는 다기에 가보니 많은 사람들이 우글거리고 있다. 비행기는 숲 위를 돌고 있지만은 숲속에서 태연하게도 거래가 한창이다. 한 마리의 소는 벌서 다 팔려 버렸다. 오후가 되니 포탄은 머리위로 ‘훽훽’ 날고 있다. 저녁 때 안담 뒷산에 유엔군이 와 있다는 소문이 자자하다.

반장은 집집마다 쌀을 거두러 다닌다. 남자들은 올라가서 구덩이를 파고 있다 한다. 비행기 소리도 포성도 사라지고 이민군은 문산, 조동, 속살에서 전부 퇴각하였다 한다. 유엔군 차량이 연달아 중촌으로 들어간다고 한다. 만세를 외치는 함성이 들려온다. 2달 동안의 사경에서 삶을 되찾은 감격과 환희에서 터져 나오는 저 함성. 밤중에 포성에 놀라 깨었다. 음력 열사흘 밤의 밝은 달이 포성에 떨고 있다.

사방에서 대포가 터진다. 머리위로 포탄의 불줄기가 윙윙 울며 넘어가고 넘어 온다. 자골은 지금 전쟁의 복판에서 신음하며 빈사의 상태에 놓여있다. 이렇건마는 아이들은 세상모르고 자고 있다. 선남선녀 같은 얼굴들이 평화롭기만 하다. 너희들에게만은 아무 피해도 없으라. 조물주가 천진한 너희들만은 꼭 지켜 주실 것이다.

1950년 9월25일
고요한 아침은 밝았다. 마을 사람들은 제 얼굴을 가진 사람이 없다. 이 마을에 도착한 유엔군부대는 선발대로서 아침에 강을 건너 시내로 들어갔고 통영 부대와 삼천포에 상륙한 부대가 개양서 합류하여 진주는 오전 중으로 완전히 탈환할 계획이라며 금명간은 강을 건너지 말 것, 색옷을 착복하고 다니지 말 것, 백의라도 통행에는 조심할 것, 추석이니 밤에 등화관제를 철저히 하라는 것이다.

반도의원 조 선생이 찾아왔다. 간밤에 유엔군이 들어왔다고 마을 사람들이 통역을 부탁하기에 미군과 만난 이야기를 한다. 인민위원회 몇 사람을 포박하여 두고 군중에게 인민군이 있느냐고 묻고 조사가 끝나 인민군이 없음을 확인하고는 적석에서 방면하고 수류탄을 가진 두 청년을 트럭으로 압송하는데 이 사람들을 죽일 것이냐고 물으니 부상을 당했으니 병원으로 호송한다며 그네들은 인민위원회에 대해서는 아무런 관심도 없더라는 것이다.

수류탄을 가진 사람들은 실은 강에서 고기를 잡으려다가 붙들렸다 한다. 9월 15일 유엔군은 인천에 상륙하여 무혈 서울에 입성했고 일부는 대전을 향하여 남하하고 있으며 함안 전투에서 인민군은 전멸 되었다며 미국은 한국의 전재 복구비로 10억불을 제공하기로 미국의회에서 가결되었다는 것이다. 낮이 되니 두무실 쪽을 폭격하며 포도 그곳에다 쏘고 있다. 석양에 황형이 왔다. 어제 시내에서 피난하라는 말에 이곳으로 오다가 백사장에서 기관총 사격을 당해 탄환을 맞은 모래가 튀어 발을 덮었다고 한다. 고요한 밤은 마을 사람들 가슴 가슴에 안도와 안식을 안겨준다.

1950년 9월26일
추석은 비행기의 공포에서 벗어나 제물을 차려놓고 식구들이 식탁에 둘러앉아 조상에 묵념을 드렸다. 어머니는 점숙이를 데리고 시내로 들어가셨다.

1950년 9월27일
하늘은 푸르고 시원한 바람은 불고 있다. 식전에 어머니는 돌아오셨다. 막에서 총소리를 들으며 꼬박 날을 세우셨다 하시며 시내는 너무도 살벌해서 한 며칠 이곳서 더 지내야 겠다 하신다. 많은 사람들이 연달아 시내로 들어가고 있다. 지원이가 체해서 대단히 욕을 보았다. 너무도 걱정되다가 겨우 한시름 놓았다.

1950년 9월28일
태원모와 태원이와 같이 진주로 들어갔다. 증명을 맡는데 2시간은 걸렸다. 길에서 평소에 인사도 없든 사람을 만나도 반가운 얼굴로 얼마나 고생들 했느냐며 악수를 한다. 아이들은 저희들 세상 만난 듯 활짝 핀 얼굴로 천진난만하게 뛰놀고 있다. 태원모는 초토가 된 우리집터를 보고 형언 할 수 없는 감회에 잠기는 모양이다. 미군, 국군이 많이 들어와 있다. 치안도 빠르게 회복 되어 가는듯하다. 돌아오니 날은 어둡다.

1950년 9월29일
태원이를 데리고 어머니와 같이 시내로 갔다. 밤이 되니 총소리는 간단없이 터지고 하늘엔 사탄(기관총사격탄환)의 섬광이 날고 있다. 밤이 깊어 가는데 어디서 절망의 울부짖음이 들려온다. 놀래 뛰어나가니 임길포씨 움막이 요란스럽다. 미군3놈이 들이닥쳐 한 놈은 임씨의 배에 총을 들이대고 두 놈은 임씨의 모친과 부인을 끌어 낼 때 울부짖음은 포호처럼 터졌으며 3놈은 겁을 먹고 도주하고 말았다. 이슬을 맞으며 공포와 불안 속에서 밤을 새웠고 태원이는 천식에 걸려 기침이 심하다.

1950년 9월30일
아침에 이웃 표구점 주인을 만났다. 통영서 길이 막혀 두 달 동안이나 있다가 경찰서장 차에 동승하여 왔다면서 외삼촌께서는 진산 아버지와 함께 국군에 구금되어 총살당했다고 한다. 이 무슨 청천벽력이란 말인가. 믿어지지가 않는다. 가슴은 떨린다.

피난은 섬으로 갈 것이라 하시고 떠나셨는데 제발 사실이 아니기를, 배 건너 모 교사 집에는 깜둥이 들이 들어 닥쳐 교사를 결박하고 부인을 강간한 일과 변두리 에서도 이런 망측한 일들이 생겼으며 길가는 사람을 차로 받아 즉사케 한 일도 있었다 한다. 미군들이 우리를 보는 눈초리가 이상하고 살기가 있어 보인다. 시에서는 밤에 문단속을 잘하고 될 수 있으면 통행을 삼가하고 길을 걷더라도 길 복판으로는 다니지 말라는 방송을 한다.

이렇게 두 달 일주일간의 짧고도 긴 피난 여정은 끝을 맺었다. 우리는 불탄 양철과 나무토막을 이어 움막을 만들고 땅에 파묻은 것도 파내어 움막 안에 넣어두고 하는 동안에 며칠이 지나갔다. 그리고 초조하게 그리든 통영으로 떠났다. 동생은 섬에 있는 친척의 어장막으로 피신을 했었다. 그러나 동생의 기대는 무너졌다. 너 때문에 우리식구 들이 죽을 판이니 떠나라는 성하에 못 견디어 동생은 모든 것을 체념하고 광에서 목을 매었다. 처자가 어머니가 형제가 주마등처럼 머리를 스쳐갔다.

하늘이 도와 동생은 살아났다. 목 달아 맨 새끼줄이 끊어졌던 것이다. 동생은 죽는다는 것이 비급하다는 것을 느끼고 살기를 결심했다. 어두운 비탈길을 내려와 바다 가에 서서 보이지 않는 머나먼 바다길 너머 통영을 망연히 바라보았다. 이 바다를 건너가자 죽을 때까지 헤엄쳐가자고 하고 옷을 벗어 신을 싸고 머리에 매었다.

죽음의 겨울 바다를 몇 시간을 헤엄쳤던가. 동생이 닿은 데는 매일봉 어느 기슭이었다. 기진맥진한 동생은 바윗돌 위에 늘어져 정신을 잃고 말았다. 얼마를 실신 상태에서 헤매고 있었던가. 아침 햇살의 따스한 감촉에 깨어 일어났다. 동생은 고픈 배를 움켜쥐고 시내로 들어갔다. 외삼촌 댁 대문을 두드렸다. 작은 외삼촌과 외숙모는 깜작 놀라며 반갑게 맞아주셨다. 이래서 동생은 외삼촌댁 마루 밑에서 외삼촌과 외숙모의 세심한 관심과 보살핌 속에서 차차 건강도 회복되었으며 이때 삼천포 배두환 군과 같이 있었다 한다.

이때는 누구를 은신하거나 했다가는 집안이 떼죽음을 당하는 판국이었다. 이 어려운 운명을 극복하고 죽음을 극복하고 우리는 재회했다. 감개가 벅찼다는 말만으로 서는 우리의 감정은 표현 안 된다. 감격의 눈물은 웃음 보다 백배나 더 큰 인생의 삶의 값어치를 말해주는 것인가. 곳곳에서 보도연맹원의 떼죽음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통영처럼 천인이 공노하고 통탄할 학살은 없었으리라.

인민군이 들어 왔을 때 밥을 지어준 사람들조차도 등에다 붉은 글로 반역자 총살 이라고 써 붙이고 머리에는 구멍을 2개 뚫은 멸치 지대를 씌우고 줄줄이 엮어서 시내를 행진하며 시민들을 형장에 나오게 하여 충열사 건너편 안산에 구덩이를 파고 그 앞에 세워놓고 총을 쏴 죽이고는 구덩이를 메웠다한다.

큰 외삼촌은 어렵게 통영에 도착하셔서 둘도 없는 친구 진산 아버지를 만나 반가운 회포도 못다 푸시고 3일째 되던 날 국민회 간부로 있는 성 모란 놈의 무고로 빨갱이로 몰려 진산 아버지와 옥선생과 함께 전 해산회사 창고에 수많은 청년들과 구금되었다가 밤중에 배에 실려나가 총살당했으며 많은 시신은 바다 밑 깊숙이 가라 앉았는지 넓고 먼 바다로 떠갔는지 아무도 찾은 집이 없다.

이리하여 좌익은 간 곳 없고 통영의 거리는 원한과 공포에 쌓인 양 조용해 갔다. 그 뒤 얼마 있다가 우리 식구는 울산으로 갔다. 가는 도중 기차가 없어 좌천서 남창 까지 40리 길을 걸어야 했고 어린 양자는 발이 개이고 아픈 다리를 끌며 따라가는 가엽은 모습이 애처로웠다. 해가 저물어서 겨우 남창에 닿았고 하룻밤을 여관에서 묵고 익일 아침 자동차로 울산에 도착했다. 처가에서는 죽은 사람들이 살아 온 듯 반기었고 다음해 1951년 3월9일(음력2월2일) 아내는 울산에서 다섯째 혜숙이를 출산했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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