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해외개척기⑪] 박익성 회장 "생애 첫 해외여행 간 잠비아서 안경 세탁 호텔업으로 승부"
[나의 해외개척기⑪] 박익성 회장 "생애 첫 해외여행 간 잠비아서 안경 세탁 호텔업으로 승부"
  • 박익성 전 잠비아한인회장
  • 승인 2015.09.16 1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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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경업 살리려고 매일 현지서 광고지 돌려...한국기술자 초빙한 세탁업 성공
▲ 박익성 전 잠비아한인회장

시큼한 냄새,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현지인 특유의 향이었다. 미니버스 안에는 내가 상상해보지 못한 냄새로 가득했었다. 숨을 쉬기가 너무나 힘들었다. 매일 그 시내버스를 타고 시내를 돌아다녔다. 참을 수 없는 갑갑함과 숨 막히는 공기 속에서 내가 그 날 본 것은 젖을 먹이고 있는 현지인 아주머니의 모습이었다. 그날부터 이상하게 그 냄새가 없어졌다.

아내는 투정을 부렸다. 처음부터 예상했던 일이었다. 며칠째 먹을 것을 입에 대지 못하는 아내가 빈정상하게 말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선교사님의 댁에서 이렇게 신세를 지내는 것도 빨리 끝을 봐야 했다. 한국으로 돌아가자고 칭얼대는 아내한테 안쓰럽고, 미안했다. 하지만 내가 정한 일이었다. 나는 매일 미니버스를 타고 가게를 구하러 다녔다.

‘니 하오’는 중국말이다. 안녕하세요란 뜻이다. 내게 말을 걸어오는 현지인들은 중국어로 말을 걸었다. 빈 점포를 찾아다니며 어슬렁거리는 한 동양인을 보고 중국인으로 생각했던 듯했다. 중국인들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나아가 중국인들 가운데 불법 체류자가 많다는 이유로 나까지 불법 체류로 오해 받는 일도 일어났다. 이민국에 출두해 오랫동안 한국인임을 밝히고, 몇 시간을 낭비하고 고생한 끝에야 겨우 풀려나기도 했다.

그런 일들이 고생스럽지 않았을 리 없었다. 나를 빼고 이토록 무모하게 아프리카를 찾아오는 한국인이 있을까 생각해보았다. 하지만 그다지 흔하지 않으리라는 것은 확실했다.

싱가포르와 남아공을 거쳐 잠비아에 도착한 1998년 그날만까지만해도 나는 그후 이렇게까지 오랫동안 거기서 살게 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친구 처남의 말이 계기가 됐다. 그가 잠비아에 살다가 한국에 온 틈에 인연을 맺게 되면서 생애 처음으로 아프리카 잠비아로 여행을 떠나게 된 것이다. 어쩌면 그렇게 쉽게 그런 결정을 했는지 지금도 이해되지 않는다.

내게는 첫 해외여행이었다. 해외라고는 간 경험이 없었다. 유럽이나 미국처럼 선진국도 아닌 곳으로 첫 해외여행을 떠나는 일이었지만, 너무 쉽게 결정하고 말았던 것이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참으로 무모하기조차 했던 일이었다.

밀레니엄시대를 얼마안남은 세기말이었지만, 여전히 비행기여행은 쉬운 일이 아니었던 시절이었다. 멀기도 한 잠비아까지는 비행기 삯도 만만치 않았다. 그런 관계로 잠비아행 비행기를 사지 않은 것이 처음부터 실수였다. 짧은 영어실력에 해외여행조차 처음인 나는 아프리카 남아공에 도착해서부터 우여곡절을 겪었다. 이 여행에 나와 동행한 친구도 별반 나와 다르지 않은 초짜 여행객이었다. 그런 점에서 우리가 지구 반대편에 있는 남아프리카 공화국 공항에서 길을 잃는 것도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는지 모른다.

남아공에 도착한 시간이 아침 6시 정도 되었을 것이다. 공항에서 무려 8시간을 헤매면서 손짓 발짓으로 어찌어찌 잠비아의 루사카로 향하는 비행기 표를 구했다. 그나마 친절했던 공항직원이 아니었다면 지구 반대편에서 미아가 될 수도 있었다. 그야말로 천신만고 끝이라 할 수 있었다. 당시에는 비행기 편이 많지도 않았으니, 남아공행 비행기를 타고 온 것이 정말 우리를 난처하게 한 실수였던 것이다.

그렇게 해서 잠비아 루사카로 들어왔다. 그것이 처음으로 아프리카 잠비아 땅에 발을 디뎠던 1998년의 기억이다.

이역만리 타국에 도착해서 나는 새로운 세상을 보았다. 내가 본 잠비아는 신천지였다. 무엇이 그렇게 신이 났었는지 모르겠지만 그곳에서 무엇인가 새로운 인생을 시작할 수 있는 비전을 찾았던 것 같았다. 내게 보이는 잠비아는 모든 것이 사업할 수 있는 마당이었다. 거리에서, 호텔에서, 보이는 현지인들의 모습도 새로운 사업을 시작할 수 있는 단초들로 보였다. 그렇게, 잠비아에서의 첫 2주 동안 나는 거리를 돌면서 사업거리 구상을 하면며 들떠 지냈다. 나는 그곳에서 새로운 시작을 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에 가득 차 있었다. 한국에 돌아가면 모든 것을 정리하고 잠비아로 와야겠다는 의지로 가득했었다. 그렇게 2주 동안의 짧은 잠비아여행을 통해서 나는 새로운 도전을 준비하게 된 것이다.

한국에 돌아온 날부터 나는 아내를 설득했다. 아내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지만, 꾸준히 매일 매일 잠비아 이야기와 새로운 세상에 대해 이야기했다. 잠비아는 세계에서 구리 매장량이 3번째로 많은 곳이며, 세계 3대 폭포가 리빙스톤에서 100m 아래로 물이 떨어지는 환상적인 곳이며, 사람들은 온순하고 언제나 밝은 나라이라는 것을.

매일 같은 아프리카 이야기만 하는 내게 아내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아내가 아프리카로의 무작정 이민을 원하지 않는 것이 당연하지만 나는 마음이 급했다. 설득해야만 했다. 내가 본 세상에서 나의 눈이 머문 그 꿈속으로 아내를 함께 끌어들여야 했다. 나는 나의 비전에 대해서 아내에게 조근조근 쉬지 않고 매일 설명하고 설득했다.

어느 날, 눈길조차 주지 않던 아내가, 그곳의 집은 초가집인지 흙집인지를 물어왔다. 놀라운 변화였다. 나의 노력이 조금은 아내를 흔들었던 것이다. 아내의 작은 관심에 나는 빈틈을 주지 않고 파고 들었다. 잠비아에서 찍은 모든 사진을 펼쳐놓고 우아하고 최대한 흥분을 자제하며 아내를 설득했다. 나의 꾸준하고 정열적인 설득에 감복하였는지 근 서너달 만에 아내의 허락을 받았다. 그렇지만 아내는 아침저녁으로 생각이 바뀌었다. 간다고 하였다가는 오후에는 또 안 간다고 하기도 해서 내 속을 까맣게 태웠다.
어렵사리 아내가 함께 잠비아행을 결정하였지만 조건부였다. 당시 우리는 아이가 없어서 애완견을 키우고 있었는데 그 놈을 반드시 데려간다는 조건이었다. 항공사와 통관 등에 관한 문의를 해보니 한 사람의 몫은 더 들어간다고 했지만, 나는 뽀미(개 이름)를 데리고 가기로 했다. 마땅히 키워달라고 부탁할데를 찾기도 번거로웠기 때문이다. 아무튼 그런 저런 일로 나는 한달의 시간을 더 한국에서 머무렀다.

아프리카 잠비아 여행에서 돌아온 후, 나에게는 희망과 두려움이 공존했다. 아내를 설득하고 아프리카로 들어가겠다는 각오 뒤에는 성공을 열망하는 청춘의 패기가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생면부지의 땅에 대한 불안함도 있었다. 그러나, 무척이나 진취적이었던 당시의 나에게는 두려움을 극복하는 의지가 더 강했던 것 같았다.

무엇을 할 것인가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대구 보건대 부근 안경점에서 한 달을 안경에 대해서 배웠다. 속성으로 배웠지만 아프리카에서 성공할 자신이 있었다. 그리고 잠비아를 향해 한국을 뒤로 하고 떠났다. 아내와 강아지 뽀미와 함께.

목숨을 건다는 느낌은 실제로 존재한다. 아는 사람 하나 없는 외딴 오지에서 사업을 하는 사람들은 매일 이같은 느낌으로 산다. 그 당시 잠비아에는 한국인 2가구가 사업을 하고 있었다. 한 분은 사진관을 하고 계셨고, 한분은 가발업을 하고 있었다. 그 외에는 선교사분들이 세 가구 계셨다. 한국말을 하고 있는 우리가 이상할 정도였다. 그들 모두는 목숨을 걸고 하루하루를 생활하고 있었다고 감히 말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모두 그렇게 객지에서 매일을 살았다.

시작부터 용기백배한 안경점 사업이었지만 진행은 신통치 않았다. 처음부터 신통하리라 생각하지 않았다고 마음을 추스르기도 했지만, 의외로 많은 진통을 겪었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미치자 나는 주저 없이 광고지를 만들어 돌리기 시작했다. 매일 시내를 돌며 광고지를 직접 돌렸다. 하루에 2km정도 쉼 없이 다니며 또 다녔다. 사람들은 매일 광고지를 받으며 내게 'I got it' 이라고 말하지만, 나는 무슨 뜻인지도 모르고 땡큐 땡큐하며 또 다시 돌고 돌았다.

이 사람들에게 광고지를 전달하지 못하면 죽을 것 같은 심정으로 정말 쉬지 않고 다녔다. 이제 생각해보면 그런 열정이 어디서 나왔는지 모르겠다. 그렇게 살면서 10년을 안경사업에 매진했다. 10년 동안 안경사업을 하면서 나는 조금씩 아프리카에 대해 눈을 뜨고 있었다.

10년이 지난 후에 나는 다른 사업으로 눈을 돌릴 수 있었다. 사실 안경사업 7년차에 이르러서 조금의 돈이 쌓이자 나는 세탁업을 시작하였다. 아내가 스카프를 현지 세탁소에 맡겼는데 세탁이 잘못 되어 상하는 일이 있었다. 여러 차례 클레임을 제기했지만 문제가 제대로 처리되지 않았다. 현지 세탁업에 문제가 많다는 것을 깨닫고 제대로 된 세탁업을 하면 성공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 때부터 6개월간 현지 세탁업에 대한 시장조사를 시작했다. 세탁소에 물건을 맡기면 제대로 세탁되지 않거나 불량 등이 자주 생긴다는 것을 깨닫고 나는 한국의 기술자를 데려와야 겠다는 생각을 했다.

지난 10년간의 안경사업은 나에게 많은 회환을 남겼다. 직원들의 불화문제를 시작으로 이민국와의 법적 분쟁, 투자와 관련된 말도 안 되는 일들이 있었고, 믿었던 지인들의 배신과 협작에 어이없는 일들이 벌어졌다. 길고 구구절절한 사연들이 이 곳 안경점에서 벌어졌다. 내가 죽은 사람의 여권을 만들어 잠비아에서 불법체류를 하고 있다는 모함이며 우리 안경점이 불법영업을 하며, 비자금을 제3국으로 세탁해서 내보내고 있으니 추방해야 한다는 모략까지 나돌았다. 이처럼 엄청난 일을 겪으며 우여곡절을 보낸 사업이었다. 안경사업을 접으면서 나는 시원섭섭하면서도 애잔한 감정이 북받쳤다. 2층의 작은 안경점은 잠비아에서 나의 눈물과 절망과 희망이 공존한 근원이며 뿌리였다.

한국의 기술자들은 세탁을 훌륭하게 잘한다. 한국 기술자를 불러와 3개월 동안 현지인에게 기술을 알려주었다. 그리고 세탁업을 시작하게 된 것이다. 많은 고객들이 생겼고 이 세탁업은 지금까지도 계속하고 있다.

어쨌든 10년 만에 안경점을 정리하고자 가게를 부동산에 내놓았다. 그러던 중에 한 인도상인이 찾아와 선금 이만불을 내놓고 바로 계약을 하기를 원했지만 나는 너무 갑작스러워 다음날 다시 보자고 했었다. 이 과정에서 그 인도상인은 4만불을 다시 제안했고 나는 안경사업 10년을 그해에 접을 수 있었다.

잠비아에서 10년 동안 생활하면서 집을 지어 살기 위해 사둔 땅 1,000평이 있었다. 나는 안경사업을 정리하고 이 땅에 호텔을 지었다. 정교한 계획이 있었던 건 아니었지만, 대지 1,000평은 우리 세 식구가 살기에는 너무 넓은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에 덜컥 호텔을 지은 것이다. 뜬금없는 일이긴 했지만 잘 할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이 강했다. 조금은 준비 없는 생각이었지만 내게는 늘 모든 것이 기회이며, 모든 것에 자신감이 있었다.

자금을 아끼기 위해 나는 직접 설계에서 시공, 감리까지 하기로 했다. 건축재료를 사기 위해 중국으로 가서 일일이 건축재료를 사서 보냈고, 일부 중요한 재료들은 한국에서 구입했다. 호텔 공사를 하는데 대략 2년이 걸렸다. 2년 만에 만든, 내 땅에 지은 호텔이었다. 호텔 운영을 시작하였지만 호텔사업에 대한 노하우가 없어 은근히 걱정도 됐다.
사업을 시작한 10개월쯤 지났을 때였다. 호텔을 구경하던 인도인이 찾아왔다. 이 호텔을 사고 싶으니 매각해 달라는 것이다. 매번 인도인이 내 사업체에 관심을 갖는 것도 신기한 일이다 싶었다. 안경사업을 매각 때도 인도인 사업가였다.
나는 아내와 많은 상의를 하였다. 이제 막 지은 호텔이고 사업한 지 얼마 안 되었지만 우리의 몫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내도 나와 같은 생각을 했다. 결국 우리는 이 호텔을 매각하기로 하였다. 한국 돈으로 환산하면, 약 18억원 가량이었다.

나는 운이 좋은 편이었다. 적어도 내게는 모든 것이 사업아이디어이며 도전과제였다. 간혹 지인들이 내게 물었다. 이제는 한국에 돌아갈 때도 되지 않았는가라고. 하지만 나는 여전히 도전정신이 가득하다. 하고 싶은 일도, 하고 싶은 사업도 내게는 너무 많이 보인다. 한국은 이미 고도성장을 해온 나라이다. 이 곳 잠비아는 아직도 무궁무진한 발전 가능성이 충만한 곳이다. 한국인으로 내가 가진 성정은 열심히 하고 노력하며 성실하게 사는 것이다. 이런 한국인만의 타고난 성정은 나를 잠비아에서 희망과 용기로 가득하게 만든다. 삼성과 엘지 같은 대기업 상품이 이곳 잠비아에도 많이 들어와 있다. 내가 한국사람임을 자랑스럽게 만들지만 한편으로는 나를 채찍질하고 나를 더욱 정진하게 만들기도 한다.

어느 날, IOC 위원장인 차문다라는 사람이 한국인인 나를 찾아왔다. 한국의 태권도에 대한 관심을 많이 갖고 있다는 것이다. 또한 잠비아 현지인들이 태권도를 무척 좋아한다는 것이다. 내가 한국사람이니 도와달라는 것이다. 현지인들이 좋아하는 운동인 태권도를 도와줄 사람이 마땅치 않으니 한국인인 나를 찾아 온 것이었다.

잠비아에는 태권도 도장도 없고 사범도 없었다. 그래서 나는 한국에서 태권도 도복을 가져왔다. 어쩌면 내가 한국인으로서 현지 사람들을 도울 수 있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현지 태권도협회 회장인 리간도씨와 협의하여 매주 토요일 현지에서 태권도를 가르치게 됐다. 태권도는 나에게뿐만 아니라 모든 해외 한인들에게는 한국인임을 잊지 않게 해주는 정신적 지주이며 상징과도 같은 것이다. 현지에 있는 태권도 4단의 또 다른 한국인이 이 봉사활동을 위해 아낌없이 시간을 내 주고 계신다.

1998년에 잠비아를 찾아와서 어느덧 20여년 가까이 외국생활을 하고 있다. 남자 나이 40이 다 되어서 외국생활을 시작한다는 것은 말처럼 쉬운 것이 아니다. 게다가 가정을 꾸리고 있는 보통의 남자들에게는 더욱 더 그렇다. 당시에는 내가 조금만 더 젊었으면 하고 생각도 많이 하였다. 한마디도 제대로 구사하지 못하는 외국어 실력탓도 있었고, 낯선 환경을 극복하는 데 젊음만큼 좋은 무기는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 돌이켜보니 그 때도 늦은 나이는 아니었던가 싶다. 아프리카에서 기회를 찾는 많은 한국인들에게 나는 지금 당신의 나이는 결코 늦지 않았다고 말해주고 싶다.

왜 아프리카인가 라고 물어보는 이에게 나는 ‘기회의 나라’이니까 라고 강조한다. ‘기회’란 꿈과 노력이 보상받을 수 있을 때 ‘기회’이다. 많은 사람들이 미국과 같은 선진국을 ‘기회의 땅’이라고 한다. 그들의 꿈과 열정이 보상받을 수 없는 기업환경과 사회조건을 갖추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것은 진정한 의미의 ‘기회’가 아니라는 생각이다. 차라리 잠비아 같은 아프리카가 용기와 노력을 보상받은 땅이라고 생각한다. 아프리카는 기회의 땅이다.

내게 아프리카 잠비아는 또 다른 의미에서 ‘기회의 땅’이었다. 내가 한국을 떠날 때는 강아지 뽀미를 데려왔지만 이제는 이곳에서 어느 덧 10살이나 된 세상의 둘도 없는 복덩이인 딸을 가졌다. 아내를 설득하기 위해 한국에서 고군분투하던 그 시절을 생각하면 요즘 아내는 아예 한국에 같이 가자고 해도 잘 들어오지 않는다. 어쩌면 아내의 기회의 땅도 아프리카 잠비아였을 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우리 가족에게도 ‘딸’이라는 기회도 갖게 해주었다.

지금 잠비아에 살고 있는 한국인이 대략 150명 정도 된다. 그들마다 독특하고 그들마다 절절한 사연들이 있을 것이다. 이곳에 와서 영어 한마디 못하고 시작한 사람들도 많다. 요즘 한국의 젊은이들은 기본적인 회화정도는 다 하는 걸로 알고 있다. 나와 가족이 이 곳 생활을 시작할 때와는 조건부터가 다르다. 그러니 그들에게는 더욱 좋은 시작이 될 것이라 믿는다.

요즘 나는 잠비아 보건부와 함께 질병퇴치와 관련된 사업을 준비하고 있다. 알려진 것처럼 아프리카는 많은 질병들로 고생하고 있는 나라들이 많다. 질병퇴치를 위한 사업은 아프리카에서는 윈윈할 수 있는 좋은 전략적 사업이라고 생각된다. 잠비아는 열악한 환경으로 좋은 사업파트너가 많지 않다. 또한 현지인들 중에서 제법 사업적 재능을 가진 이들도 외국인들과 함께 사업을 하고자 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새로운 사업을 시작하게 될 때마다 늘 설레는 마음을 갖게 된다. 무엇이 성공의 조건이냐라는 질문에 쉽게 답하지 못하지만 나는 어떻게 하면 성공할 수 있는가라는 물음에는 늘 같은 답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시련 속에서 스스로를 강하게 만들고 단단하게 만들어 지치지 않고 앞으로 나갈 수 있는 용기가 그 답이다. 내가 아프리카에서 경험한 삶의 대부분은 그랬고 나는 용기를 내서 살아야 했다.

나는 언젠가는 한국으로 돌아올 것이다. 아프리카의 기회를 충분히 제공받았고 나는 열정을 그 곳에 쏟았다. 잠비아는 우리나라의 60년대와 현재가 공존하는 나라이다. 자동차도 많고 러시아워도 있으며, 대형 쇼핑몰도 있는 아프리카 나라이다. 그러나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열악한 환경에서 살고 있다.

내가 꿈을 위해서 한국을 떠났다면, 이제 꿈을 이루고 한국으로 돌아올 계획이다. ‘same’이란 간단한 영어단어를 몰라서 물건을 팔지 못했던 내가 주경야독으로 쉼없이 달려와 가족과 가정을 이루고 살아온 잠비아의 생활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삶의 특별한 철학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분명한 것은 투자만큼의 가치를 이루기 위해 노력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결실이 제대로 이루어진다면 그 때야말로 고향으로 돌아올 때일 것이다.

고향에 돌아온다면 남을 돕는 단체에 가입하여 나이 많은 사람들을 위해 봉사하며 살고 싶다.
 

 
▲ 빅토리아폭포를 찾아서
▲ 빅토리아폭포 앞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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