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상윤의 음식기행] 황주(黃酒)-샤오싱(紹興)의 술
[안상윤의 음식기행] 황주(黃酒)-샤오싱(紹興)의 술
  • 안상윤 전 SBS 북경특파원
  • 승인 2017.01.24 1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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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상윤 전 SBS 북경특파원

▲ 안상윤 전 SBS 북경특파원.
황주(黃酒, 황져우)는 차조나 찰수수, 쌀을 보리누룩으로 발효시켜 빚어내는 황색의 술이다. 고량(高梁)으로 만드는 흰색의 빠이져우(白酒)와 색깔의 차이로 구분된다. 도수도 빠이져우에 비해 낮다. 하정우 감독이 2014년에 만든 <허삼관 매혈기(許三觀 賣血記)>의 원작인 중국 작가 위화(余華)의 1996년 작 동명 소설 덕에 한국에서도 많이 유명해졌다. 이 소설은 주인공 허삼관이 생계를 위해 피를 파는 이야기이다.

허삼관은 피를 파는 날엔 피의 양을 늘리기 위해 아침을 굶은 채 “이 뿌리가 시큰해질 때까지” 물을 들이킨다. 피를 뽑고 나면 보혈을 위해 돼지 간볶음에 황주 두 냥을 마신다. 이 소설이 영화의 덕을 보면서 한국에서도 많이 팔렸다.

무엇보다 황주에 대한 이해가 늘어나 내 주변 사람들에게서도 “돼지 간에 황주 한잔 하자”는 이야기를 듣곤 한다. 황주는 우리 동동주처럼 누룩 맛을 내 향과 목 넘김이 좋다. 소설 속 허삼관처럼 데워서 마시면 더욱 맛이 난다. 도수가 20도 정도여서 만만하게 보이지만, 홀짝홀짝 마시다 보면 어느새 확 취하므로 조심해서 마셔야 한다. 중국술이 모두 그러하듯 기름진 음식을 안주로 해서 마시는 게 궁합이 맞다.

황주는 저쟝성(浙江省) 소흥(昭興, 샤오싱)의 술이어서 중국에서는 ‘샤오싱져우((紹興酒)’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이 지역 감호(鑒湖)의 물맛이 작용하는 까닭이다. 옛 월(越國)국이었던 샤오싱이 배출한 걸출한 인물들은 모두 샤오싱져우에 얽힌 일화 한 자락씩을 안고 있다. 샤오싱이 배출한 인물들 가운데 <아Q정전(阿Q正傳)>의 작가 노신(魯訊)이 있다.

노신은 고향을 사랑했고 고향의 술을 좋아했다. 무능한 청조 정부 타도를 외치며 일본 망명길에 올랐다가 20년 만에 샤오싱을 다시 찾았을 때 고향에는 겨울비가 내렸다. 노신은 허전함을 견디지 못한 채, 집으로 가지 못하고 운하 옆 주막에서 황주를 마시며 회한을 달래다 마침내 흐느껴 울고 말았다. 망명 기간 내내 노신의 뇌리에 담겨있던 인문학이 꽃 피고 낭만이 넘치던 샤오싱의 모습은 사라지고 없고 차가운 겨울비만이 그를 맞았던 까닭이었다.

2009년 12월 쟈싱(嘉興)의 친구를 만나러 간 김에 벼르던 월국(越國) 방문에 나섰다. 쟈싱에서 시외버스를 타고 50분을 달려 샤오싱에 도착하자마자 곧바로 동창방구(東昌坊口) 18호에 위치한 루신 고가와 길 건너편의 삼미서옥(三味書屋)을 둘러보고, 이어서 루신이 즐겨 찾았던 노신로(魯迅路)의 함형주점(咸亨酒店)으로 발길을 재촉했다.

이 세 곳은 모두 루신의 명작들인 「아침 꽃을 저녁에 줍다」, 「외침(吶唅)」, 「고향」, 「공을기(孔乙己)」, 「내일」, 「풍파(風波)」 등을 탄생시킨 산실들이다. 주점에 앉으니 “따끈한 술 두 사발과 회향두 한 접시 주시오”라는 「공을기(孔乙己)」의 한 대목이 떠오르면서 소흥주를 한 잔 하지 않을 수 없었다.

▲ 심원(沈園).
삶은 누에콩 회향두(茴香豆)와 말린 두부(干豆腐)를 안주로 홀짝홀짝 마시다 보니 기분 좋게 취했다. 이튿날 서남쪽 회계산(會稽山) 아래 자리 잡은 난정 풍경구(蘭亭風景區)를 찾았다. 난정(蘭亭)은 샤오싱의 정수에 해당한다. 월나라 정신문화의 보고이다. 지금의 모습은 명나라 때 중건한 것을 1980년에 전면 보수한 것이다. 동진(東晉)의 전설적 서예가 왕희지(王羲之, 307~365)의 일화가 어린 곳으로 유명하다.

이곳 연못에서 오리들의 헤엄을 보며 왕희지 필법이라는 새 서법을 창조했고, 문인들로 수결사(修潔社)라는 시서회(詩書會)를 만들어 이곳의 유상곡수(流觴曲水)나 양란저(陽蘭渚)의 정자에서 제를 올린 후 시를 짓고 술을 마시며 놀았다. 술은 바로 황주, 즉 샤오싱져우(紹興酒)다. 난정은 고아했던 당시의 정경을 그림과 의식으로 재현해 옛 선비들의 격조 높은 풍류를 오늘에 전하고 있다.

난정(蘭亭)은 육유(陸遊)의 슬픈 러브스토리를 빼놓고는 지나칠 수 없는 곳이기도 하다. 바로 9백 년 전, 이곳에서 있었던 唐婉(당완)과의 로맨스이다. 두 사람의 러브 스토리에도 황주가 등장한다. 육유는 이종 간이었던 당완(唐琬)과 사랑했다. 둘은 결혼해 부부로 살았으나 육유 어머니의 극심한 구박으로 헤어지고 만다. 각각 재혼해 살던 중, 10년이 흐른 어느 날, 우연히 심원(沈園)에서 조우한다.

둘은 한동안 망연자실, 말을 잃은 채 서로 쳐다보기만 했다. 마음 아파하는 남자에게 여자가 황주를 보내왔다. 남자는 붓을 들어 화원의 벽에 시를 써 내려갔다. 채두봉(釵頭鳳), ‘비단 비녀 꽂은 머리’였다. 황주를 따라주던 옛사랑의 기억이 오랜 망각 속에서 격렬하게 솟구쳐 나왔을 것이다.

그대는 연지 바른 손으로
황등주를 부어 주었지
성 안에 넘친 봄빛
실버들로 늘어졌구나
동풍이 미워라 인연이 깨졌으니..
옛일 생각하니 수심은 실타래라
몇 해를 헤어져 찾았던고
아아 돌이킬 수 없는 잘못이여

(하략)

▲ 왕희지가 술잔을 돌리며 시사를 즐겼던 류상곡수(流觴曲水).
이날의 만남이 이 둘에게는 마지막이 되었다. 당완은 오래 못 가서 숨지고 육유는 90이 되도록 살아 많은 시를 남겼다. 옛 연인이 마지막으로 따라 준 황주를 육유는 오래도록 기억했을 것이다. 루쉰과 왕희지, 육유의 사례에서 보듯이 황주는 소흥의 역사와 함께 한다. 술을 좋아해 주태백(酒太白)으로 불린 시선(詩仙) 이백(李白)을 비롯, 시성(詩聖) 두보(杜甫), 월왕 구천, 오왕 부차, 충신 범려, 침어(浸魚) 서시 등 영웅호걸들이 소흥에서의 날들을 황주와 함께 했을 것을 생각하면 황주는 곧 소흥의 역사가 된다.

소흥 사람들은 삼겹살에 즙을 발라 볶은 뒤 곰팡이가 피도록 내버려 두었다가 말린 갓 절임과 함께 질그릇에 담아 두어 시간 정도 졸여 만든 매간채소육(霉干菜燒肉)을 즐겨 먹는다. 물론 황주를 반주 삼는다.가을이 깊어지면 돼지 간볶음도 좋지만 부드럽게 혀에 감기는 기름진 매간채소육에 황주 한잔 하러 소흥으로 달려가고 싶다. 국물이 당기면 절세미인 서시가 어머니를 위해 만들었다는 서시갱(西施羹)으로 속을 달랠 것이다.

비가 내리는 운하 옆 주막에서 백 년 전 이 곳을 찾았을 루쉰을 떠 올릴 수 있으면 더욱 술맛이 날 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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