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지혜의 시가 있는 아침] 아버지의 만년필 - 한혜영
[신지혜의 시가 있는 아침] 아버지의 만년필 - 한혜영
  • 뉴욕=신지혜 시인
  • 승인 2019.10.21 08: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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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혜영 시인
한혜영 시인

아버지의 만년필 

만년필 늘 품고만 다녔을 뿐
그것으로 뭔가를 적는 아버지를 본 적이 없습니다
함부로는 쓸 수 없는
칼이나 권총쯤 되는 줄 알았어요
우유부단의 수뇌부였던 아버지

그 흔해터진
사랑한다는 말 한 마디도 적지 못했던
어린 새끼들 데리고 어떡하든지 살아남아야 한다는
유언장 작성 따위는 더구나 엄두도 못낸

아버지 돌아가시자 어머니
만년필 쑥 뽑아들더니 힘껏 내던져버렸습니다
한평생 가슴에
꽂았다 뺐다 하면서 만지작거리기나 했을 뿐인

아버지의 마음은 아랫집 함석지붕을 데굴데굴
구르면서, 왈칵 쏟아내면서
딱 한 번
일필휘지로 시원스럽게 육두문자를 휘갈겨 썼습니다

생에 대한 야유조차도
어머니가 아니었으면 끝내 할 수 없었던 당신

아버지의 마음을 유품으로
챙겨드리지 못한 점을 이해하세요
저승에 가서도 아버지, 그 약해빠진
마음을 품고 다니며 전전긍긍할까 봐 그랬습니다


이 시가 우리 마음을 울컥이게 한다. 아버지! 라고 저절로 불러보게 된다.

‘만년필 늘 품고만 다녔을 뿐 /그것으로 뭔가를 적는 아버지를 본 적이 없습니다’ 라고 시인은 말한다. ‘우유부단의 수뇌부였던 아버지’

즉 ‘우유부단의 수뇌부’란, 그만큼 마음이 약하고 선량하여서 남을 속이거나 남에게 악행을 저지를 수 없는 타고나신 선한 성품이 아니겠는가. 타인에게 함부로 상처나 피해를 주지 않고 배려하는 조용한 인품의 소유자이셨던 것이다. 한번도 ‘그 흔해터진 / 사랑한다는 말 한 마디도 적지 못했던’ 그 만년필을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아버지의 유품인 만년필을 어머니가 애통해하시며 내던지게 되었고 ‘아버지의 마음은 아랫집 함석지붕을 데굴데굴 / 구르면서, 왈칵 쏟아내면서/ 딱 한 번/ 일필휘지로 시원스럽게 육두문자를 휘갈겨 썼습니다’ 라고 시인은 역설적으로 묘파한다.

즉 이 일필휘지야 말로, 아버지가 표현하신 유언이자, 사랑이자, 침묵의 영원한 빛남이었음을 함의하고 있다.

‘아버지의 마음을 유품으로 / 챙겨드리지 못한 점을 이해하세요/ 저승에 가서도 아버지, 그 약해빠진 / 마음을 품고 다니며 전전긍긍할까 봐 그랬습니다’ 

아버지의 만년필이 유일한 유품이었으나 간직할 수 없었음에 이해와 용서, 사랑의 언어로 승화된 시인의 절절함 그리고 안타까움과 애절한 그리움이 읽는 이의 가슴 속 깊이 파고들지 않는가. 

이 거칠고 험난한 세상에서 아버지가 힘겨운 마음으로 버팅겨 준 삶의 그늘 밑에서 쑥쑥 자란 자식들, 바로 아버지! 라는 단어만으로도 눈물겨워지는 그 ‘아버지’ 이시다. 이 감동적인 시로 하여 아버지의 인생을 다시 생각해 보며 함께 가슴이 먹먹해지지 않을 수가 없다.

한혜영 시인은 충남 서산 출생. 1989년《아동문학연구》 동시조 당선. 1994년《현대시학》 시 추천. 1996년《중앙일보》신춘문예 시 당선. 1998년 《계몽아동문학상》 장편동화 당선. 시집으로 『태평양을 다리는 세탁소』 『뱀 잡는 여자』 『올랜도 간다』가 있으며, 시조집 『숲이 되고 강이 되어』 장편소설 『된장 끓이는 여자』 장편동화 『팽이꽃』 『뉴욕으로 가는 기차』 『붉은 하늘』 『날마다 택시 타는 아이』 『형이 왔다』 『뿔 난 쥐』 『비밀의 계단』 『이민 간 진돌이』 『로봇이 왔다』 『영웅 소방관』 『마음을 읽는 카드』가 있으며, 동시집으로 『닭장 옆 탱자나무』 『큰소리 뻥뻥』 『개미도 파출소가 필요해』 가 있다. 미주문학상, 한국아동문학창작상 등을 수상했다.

필자소개
《현대시학》으로 등단, 재외동포문학상 시부문 대상, 미주동포문학상, 미주시인문학상, 윤동주서시해외작가상 등을 수상했다. 세계 계관시인협회 U.P.L.I(United Poets Laureate International) 회원. 《뉴욕중앙일보》 《미주중앙일보》 《보스톤코리아》 《뉴욕일보》 《뉴욕코리아》 《LA코리아》 및 다수 신문에 좋은 시를 고정칼럼으로 연재했다. 시집으로 『밑줄』<한국문화예술위원회 우수도서>을 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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