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만주①] 노학당 기념비: 의병의 노래로 간도에서 독립을 외치다
[아! 만주①] 노학당 기념비: 의병의 노래로 간도에서 독립을 외치다
  • 안상경(한중문화콘텐츠연구소장)
  • 승인 2021.09.24 11:13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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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북삼성으로 불리는 중국 만주에는 우리 독립운동 사적지가 곳곳에 있다. 의병운동, 민족주의, 사회주의, 무정부주의 등 독립지사들이 고민과 피가 어린 곳들이 도처에 있다. 이들 사적지를 시리즈로 소개한다.(편집자주)

윤희순 진영

의병운동과 3․1운동, 그리고 국내외 무장투쟁에 이르기까지 민족 독립을 위해 수많은 선열들이 목숨을 내던졌다. 여성도 독립운동의 대열에 함께 했다. 어린 소녀부터 학생, 교사, 양반가 부인, 기생 등 모두가 나라를 되찾기 위해 한마음이었다. 그들은 사회의 제도와 시대의 제약을 뚫고 남성 못지않게 당당히 저항했다. 특히 여성 의병장으로서 의병운동과 독립운동을 전개한 여성이 있었다. 바로 윤희순(尹熙順, 1860~1935)이다.

윤희순은 국내 의병운동 25년과 국외 독립운동 15년으로, 40년간 항일운동에 투신한 여성 독립운동가이다. 신분제도가 엄격했던 유교 집안의 여성이었지만, 국권상실의 위기 속에서 구국운동의 대열에 뛰어들었다. 윤희순은 1875년, 16세 되던 해에 결혼했다. 남편 유제원은 화서학파 유중교 선생에게 수학했고, 시아버지 유홍석은 최초의 의병가사인 ‘고병정가사(古兵丁歌辭)’를 제작해 의병의식을 고취시킨 인물이다. 또한 시백부가 위정척사운동과 의병운동을 주도했던 의암 유인석이다. 당연히 시댁 가풍을 통해 세상을 보는 가치관도 달라졌을 것이다.

명성황후 시해 후, 단발령 시행이 공포되면서 의병운동이 확산됐다. 윤희순의 시아버지인 유홍석도 위정척사 계열의 의병장으로 제천과 춘천을 중심으로 활동했다. 남편도 춘천의병에 가담해 참모 역할을 했다. 윤희순은 시아버지를 따라 의병에 출정하겠다고 했지만 주위의 만류로 나설 수 없었다. 이에 윤희순은 무사안일을 기도하며 의병들의 뒷바라지를 했다. 또한 나라가 위급한 데 방관해서는 안 된다며 의병가사를 제작, 배포함으로써 국가 위기에 대해 여성들이 인식하도록 했다.

안사람의병가
안사람의병가

아무리 왜놈들이 강성한들 / 우리들도 뭉쳐지면 왜놈 잡기 쉬울세라 / 아무리 여자인들 나라사랑 모를 소냐 / 아무리 남녀가 유별한들 나라 없이 소용있나 / 우리도 의병하러 나가보세 / 의병대를 도와주세 / 금수에게 붙잡히면 왜놈 시정 받들소냐 / 우리 의병 도와주세/ 우리나라 성공하면 우리나라 만세로다 / 우리 안사람 만만세로다!(안사람의병가 中에서)

이렇게 윤희순은 을미의병에서 의병가사를 활용해 항일의식을 고취시켰다. 그리고, 나아가 정미의병 시기에 윤희순은 더욱 두각을 나타냈다. 당시 윤희순은 군자금 모금과 ‘안사람의병단’을 통해 여성의 의병활동을 이끌었다. 안사람의병단은 강원도 춘천 여성 30여 명으로 구성됐는데, 주로 화서학파 유생 부인과 선비 아내들이었다. 이들이 600여 명의 전투 의병을 지원하는 무기 및 탄약 제조, 군수품 전달, 군자금 모금 등을 맡았다.

윤희순의 의병활동은 해외로 이어졌다. 처절하게 항쟁했음에도 국권을 상실하자, 국내에서 활동한 선각자들은 해외로 이주해 독립활동을 이어갔다. 윤희순을 비롯한 의병 가족도 1911년에 간도로 이주해 독립활동을 지속했다. 우선 윤희순은 환인현에서 동창학교(東昌學校) 분교로서 ‘노학당(老學堂)’을 건립해 항일 인재를 양성하는 데 주력했다. 이때 윤세복, 이회영, 우병렬 등이 도움을 준 것은 물론 중국인들조차 조력자로 나섰다. 윤희순의 끈질긴 설득과 조화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노학당 전경
노학당 전경

그러나 1913년 시아버지 유홍석이 숨을 거두었다. 시동생 유재열도, 그를 따라 그의 부인도 숨을 거두었다. 1915년에는 남편 유재원이 숨을 거두었다. 그리고 결국, 시백부 유인석이 숨을 거두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일제의 탄압에 의해 노학당이 폐교되고 말았다. 윤희순의 독립운동은 애국계몽운동에서 무장투쟁운동으로 선회한다. 만주와 연해주, 간도지역에 흩어져 있던 의병의 후손들과 문인들을 규합해 1920년에 조선독립단(朝鮮獨立團)을 조직했다. 이제는 아들 유돈상, 유민상이 윤희순 곁에 섰다.

조선독립단은 한중연합투쟁 활동에 주력했다. 윤희순은 중국인에게도 의병가사를 보급하며 한중연합투쟁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이러한 노력이 기저가 되어, 1931년 만주사변이 발발하자 한중연합투쟁이 본격적으로 전개될 수 있었다. 1932년 조선독립단은 요녕민중자위군과 연합해 무순탄광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을 소탕했다. 이를 빌미로 일제는 3시간 만에 3천여 명의 민간인을 학살하는 평정산 참안 사건을 벌이기도 했다. 이후 조선독립단은 양세봉이 이끄는 조선혁명군과 합세해 흥경성전투, 영릉가성전투를 승리로 이끄는 데 일조했다.

그러나 1935년 7월 19일, 무순감옥에서 갖은 고문을 당하며 버텨왔던 아들이 세상을 떠나자 일생 동안 조국의 독립을 향해 버텨왔던 몸과 마음도 무너지고 말았다. 아들을 가슴에 묻은 지 10일 후, 그제야 윤희순도 치열했던 삶을 마감한다. 윤희순은 평생토록 남녀라는 구분을 넘어 그 누구라도 구국운동에 참여해야 한다는 것을 의병장으로서 실천했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2002년 8월 노학당 유지비가 건립됐으며, 2019년에는 중국 심양의 한중교류문화원과 한국의 국가보훈처가 협력해 시설 개보수사업을 추진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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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순엽 2021-11-09 20:27:22
안상경소장님 오랫만에 뵙습니다. 좋은글 연재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많이 배우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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