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만주⑪] 무순 노천탄광: 일제가 우리의 국경과 탄광채굴권을 맞바꾸다
[아! 만주⑪] 무순 노천탄광: 일제가 우리의 국경과 탄광채굴권을 맞바꾸다
  • 안상경(한중문화콘텐츠연구소장)
  • 승인 2021.12.25 06: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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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북삼성으로 불리는 중국 만주에는 우리 독립운동 사적지가 곳곳에 있다. 의병운동, 민족주의, 사회주의, 무정부주의 등 독립지사들이 고민과 피가 어린 곳들이 도처에 있다. 이들 사적지를 시리즈로 소개한다.(편집자주)

지금으로부터 400여 년 전, 만주지역에 신흥강자가 등장한다. 누르하치이다. 1616년 누르하치는 신빈(新賓; 현 신빈만족자치현)에서 후금(後金)을 건설했다. 그리고 2년 후에 무순(抚顺)을 점령했다. 명나라는 10만 군사를 동원하여 후금을 일거에 격파하려 했다. 이때 조선의 강홍립(姜弘立, 1560~1627) 장군이 13,000명의 군사를 이끌고 가세했다. 그러나 사르후(薩爾滸, 현 무순시 인근)에서 단 나흘 만에 명나라 군사 45,000여 명이 몰살당했다. 조선 군사 7,000여 명도 몰살당했다. 명나라 군사는 퇴각했고 강홍립 장군은 항복했다. 

강홍립 장군의 항복(1621년 조선 훈련도감에서 편찬한 충렬록에 수록)
강홍립 장군의 항복(1621년 조선 훈련도감에서 편찬한 충렬록에 수록)

사르후 전투가 벌어졌던 무순에는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가 수감되었던 전범관리소(戰犯管理所)가 남아 있다. 푸이는 이곳에서 10년간 공산주의 사상을 교육받았다. 청나라가 발호한 곳에서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가 수감되었다고 하니, 역사란 참 아이러니하다. 또한 동서로 6.6km, 남북으로 2km에 달하는 아시아 최대 규모의 노천탄광이 있다. 대륙의 스케일을 일일이 열거할 수 없지만 탄광조차 이렇게 웅장할 줄이야, 말문이 막힐 따름이다. 그런데 이 거대한 노천탄광을 대가로 일제가 청나라와 아주 나쁜 흥정을 했다. 다시 400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관련한 이야기를 시작하려 한다.  

청나라 만주족도 백두산을 민족의 발상지이자 성지로 인식

만주지역의 여진족이 후금을 잇는 청나라를 건국했다. 그리고 중원의 패자가 되었다. 수도도 심양에서 북경으로 옮겨 갔다. 그리고는 고토였던 옛 땅을 봉금시켰다. 스스로 만주족(滿洲族)이라 칭하고, 백두산, 두만강, 압록강 이북 1,000여 리에 달하는 지역을 발상성지(發祥聖地)라 하여 사람들의 출입을 금했다. 

무순 전범관리소의 푸이 황제(1954년)
무순 전범관리소의 푸이 황제(1954년)

백두산 동쪽에 포고리산(布庫哩山)이 있다. 산 아래에는 연못이 하나 있는데, 포륵호리(布勒瑚哩)라고 부른다. 전해지는 이야기에 세 명의 천녀(天女)가 이 연못에서 목욕을 하고 있었는데, 신령스러운 까치가 붉은 과일을 물어다가 계녀(季女; 막내)의 옷에 놓았다. 계녀가 그것을 입에 넣자 갑자기 임신을 하고 남자 아이를 낳았다. 아이는 태어나자마자 말을 했다. … (중략) … 아이의 성씨를 애신각라(愛新覺羅)로 하고 이름을 포고리옹순(布庫哩雍順)이라 했다. … (중략) … 사람들은 논의하여 포고리옹순을 군주로 추대했다. 그리고 백두산 동쪽 악다리성(鄂多理城)에 정착하여 만주(滿洲)를 건립했다.

청나라를 건립한 만주족의 건국신화이다. 만주족은 백두산을 그들의 발상지로 여겼으며, 포고리옹순으로부터 누루하치에 이르는 3대를 추봉하여 신격화했다. 그러나 후대로 갈수록 신화의 전승력은 미약해졌다. 이에 제4대 강희제(康熙帝, 재위 1661~1722)가 백두산은 만주족의 발상지이자 성지이니 매년 오악(五嶽)처럼 국가 차원에서 제사를 지내라고 명했다. 그러면서 한편, 대청일통지(大淸一統志)라는 지적도 편찬을 구상했다. 그런데 이 작업 완료하기 위해서는 청나라의 발상지와 국경을 명확히 구획할 필요가 있었다. 이러한 일련의 요소들이 후일 다른 요소들과 결합하여 백두산정계비 건립으로 전개되었다. 

무순 노천탄광 전경
무순 노천탄광 전경

조선과 청나라 심마니들의 잦은 충돌로 백두산정계비 건립

당시 백두산으로부터 두만강과 압록강의 상류지대는 이를테면 무주공산이었다. 이 틈을 타 삼을 캐거나 사냥을 하거나 토지를 개간하려는 조선인의 수가 증가했다. 물론 조선 정부도 두만강과 압록강 대안지역으로 사람들의 왕래를 금했다. 그러나 국내외에서 삼과 초피(貂皮; 담비가죽)의 수요가 증가하자 이를 구하기 위해 처벌도 불사하고 봉금지역으로 찾아 들었다. 반면 만주지역을 관할하던 성경(盛京; 현 심양시)의 성경장군은 매년 일정 기간에 제한된 인원을 봉금지역으로 들여보내 삼과 초피를 채취하도록 했다. 당연히 조선인과 충돌할 수밖에 없었고, 그 과정에서 약탈 및 살인 사건이 발생했다. 

“사실인가 보네 그 소문 말이야. / 뭔 소문이요? / 산삼을 탐해 폐사군 땅에 들어간 여진족들이 몰살을 당했대.” 넷플릭스 드라마 〈킹덤-아신전〉의 한 장면이다. 여기서 폐사군(廢四郡)이란 백두산 인근의 여연(閭延), 우예(虞芮), 무창(茂昌), 자성(慈城) 등 4개 군을 말한다. 그런데 이는 드라마의 상상이 아니다. 무참한 사건들이 현실에서도 벌어졌다. 예컨대 1658년에 20여 명의 조선인이 월경하여 삼을 캐다가 청나라 관리를 살해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1710년에는 평안도의 심마니 9명이 압록강을 건넜다가 청나라 심마니 5명을 살해하고 그들이 캔 삼과 소지품을 약탈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외교문제로 번질 수밖에 없는 사안이었다. 

무순 노천탄광 채굴 초기 모습(연도 미상)
무순 노천탄광 채굴 초기 모습(연도 미상)

강희제는 양국의 경계가 불분명하여 이러한 사건이 발생한다고 보았다. 오라총관(烏喇摠管) 목극등(穆克登)을 사신으로 보내 두만강과 압록강의 지리를 확인하라고 명했다. 조선 정부에서도 접반사(接伴使) 박권(朴權)을 파견했다. 문제는 두만강과 압록강의 수원(水原)을 확인하는 일이었다. 강을 경계로 국경을 정할 때는 발원처를 기준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다행히 압록강의 수원은 쉽게 찾았다. 그러나 두만강의 수원을 찾기 위해서는 천지로부터 거슬러 내려와야 했다. 결국 목극동이 천지를 거슬러 내려오며 수원을 확인했다. 그리고 자신이 정한 분수령(分水嶺)에 양국의 경계는 “서쪽은 압록강 동쪽은 토문강”이라는 내용의 정계비를 세웠다. 

19세기 이후 조선과 청나라 사이에 간도영유권 분쟁 발생

1869년부터 몇 해 간이나 함경도 지역에 흉작이 들었다. 조선의 농민들은 살 길을 찾아 두만강과 압록강을 건넜다. 회령부사(會寧府使) 홍남주(洪南周)는 농민들이 개간청원서를 제출하면 이를 허용하는 방식으로 두만강 대안지역으로 이주를 지원했다. 압록강변의 강계부사(江界府使)는 서간도 일대의 땅을 28개 면으로 편성하여 관할했다. 한편 산해관(山海關) 서쪽의 관내지역에 거주하던 한족들도 기근을 피해 압록강 북쪽, 즉 서간도로 이주하기 시작했다. 

넷플릭스 드라마 〈킹덤-아신전〉의 한 장면(폐사군 내 여진족 몰살)
넷플릭스 드라마 〈킹덤-아신전〉의 한 장면(폐사군 내 여진족 몰살)

그런데 이전, 1858년에 청나라는 러시아와 훈춘조약(琿春條約)을 체결하고 연해주를 양도했다. 청나라는 만주지역까지 러시아의 여파가 미칠 것을 염려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1881년에 만주지역의 봉금을 폐지했다. 그리고 북간도를 개간하기 위해 훈춘(琿春)에 초간국(招墾局)을 설치하고 관원을 파견했다. 이를 계기로 북간도에 조선 농민들이 대거 이주하여 황무지를 개간하고 있음을 알았다. 1882년 청나라의 길림장군(吉林將軍) 명안(銘安)은 간도에 거주하는 조선인의 철수를 조선 정부에 요청했다. 청나라는 토문강이 아니라 두만강을 양국의 경계로 인식했던 터였다. 

북간도의 조선 농민들은 백두산정계비를 직접 찾아 나섰다. 그리고 그것을 근거로, 종성부사(鐘城府使) 이정래(李正來)에게 자신들의 철수를 철회해줄 것을 호소했다. 서북경략사(西北經略使) 어윤중(魚允中)도 조선 농민들의 귀환을 처리하기 위해 현장에 파견되었다가 백두산정계비의 실체를 확인했다. 그리고 일련의 상황을 고종에게 보고했다. 고종은 청나라에 국경 획정을 위한 감계회담을 제안했다. 이에 1885년에 제1차 을유감계회담(乙酉勘界會談), 1887년에 제2차 정해감계회담(丁亥勘界會談)을 개최했다. 그러나 1차, 2차 회담 모두 “동쪽 토문강의 원류”를 어디로 볼 것인지에 대해 합의를 이루지 못한 채 결렬되고 말았다. 

백두산정계비(1929년, 일본 사진집 “국경”에 수록)
백두산정계비(1929년, 일본 사진집 “국경”에 수록)

일제가 탄광채굴권과 철도부설권 대가로 간도를 청에 귀속

1905년 일제는 을사늑약(乙巳勒約)을 체결하여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했다. 초대 통감 이토 히로부미는(伊藤博文)은 전국에 12개의 이사청(理事聽)을 설치하고 외교와 내정을 장악했다. 1907년에는 간도의 한인들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간도통감파출소를 설치하여 일본군 헌병과 경찰을 용정(龍井)으로 파견하려 했다. 이에 “간도에 있는 수십 만 한인들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기 위해 통감부 관리를 파견하기로 결정했으니 간도에 있는 청국 관리에게 명하여 착오를 빚지 않도록 해 달라.”라는 성명을 청나라 정부에 제출했다. 그러나 청나라는 간도가 자국의 영토이므로 제안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거절했다. 

청·일 간에 간도 영유권 회담이 벌어졌다. 양국의 회담은 1907년 8월부터 1909년 9월까지 이어졌다. 그러나 뚜렷한 성과가 없었다. 이에 청나라는 봉천(현 심양시)에 주둔하고 있던 1개 연대의 병력을 간도에 증파하려 했다. 일본도 병력을 출동시켜 간도를 점령하려 했다. 일촉즉발의 상황이었지만 일본이 먼저 동삼성육안(東三省六案)을 내놓았다. 동북삼성, 즉 만주지역과 관련한 6개의 제안이었는데, 핵심은 청나라가 일본에게 무순, 연대의 탄광채굴권과 만주의 철도부설권을 보장하면 그 대가로 일본은 청나라에게 간도 영유권을 보장하겠다는 것이었다. 

간도통감파출소(현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 용정시 인민정부)
간도통감파출소(현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 용정시 인민정부)

이 안을 토대로 1909년 9월 4일 간도협약(間島協約)이 체결되었다. 일제는 백두산정계비에 명시되어 있는 “토문강”을 무조건 “두만강”으로 규정했다. 그러나 토문강의 수원은 현재 국경선으로 구획되어 있는 두만강의 원류와 지리적으로 30여 km나 차이가 날뿐더러, 토문강은 송화강에서 흑룡강으로 흐르지만 두만강은 동해로 흐른다는 점에서 어느 강을 원류로 하느냐에 따라 커다란 영토 차이를 유발한다. 일제도 이러한 문제를 인식했음인지 1931년에 만주사변을 일으키고 백두산정계비를 철거했다. 그리고 일제는 무순 노천탄광에서 30여 년간 2억 톤에 달하는 석탄을 캐내고, 심양과 단동을 잇는 철도를 부설하여 그것을 자국으로 실어 날랐다. 

그렇다면 우리는, 간도협약은 무효하니 중국과 다시 국경 논쟁을 벌여야 할 것인가? 지난 100년간의 모든 피해를 보상하라고 일본에 종용해야 할 것인가? 과연 그것들이 가능할지, 실익이 있을지 의문이다. 그렇다면 차라리, 안중근 의사가 바랐던 동양평화를 목표로, 당장에 물리적인 국경을 허물 것이 아니라 문화적인 국경, 경제적인 국경으로써 우리의 영토를 확장하고 우리의 위상을 높이는 것이 타당하지 않을까, 함께 고민할 필요가 있겠다.

필자소개
안상경 한중문화콘텐츠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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