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로㉕] 마그레브 지역과 그 문화를 깊이 연구하다 - 임기대 부산외국어대 교수
[아프로㉕] 마그레브 지역과 그 문화를 깊이 연구하다 - 임기대 부산외국어대 교수
  • 임기대 부산외국어대학교 교수
  • 승인 2022.01.20 1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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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f-PRO’는 국내 아프리카 전문가들의 모임이다. 외교부 한·아프리카재단에서는 이들의 활동을 소개한 책을 두 권 펴냈다. ‘Af-PRO, 한국과 아프리카를 잇다’는 제목의 단행본들이다. 한·아프리카재단의 허락을 받아, 이 책의 내용을 연재한다.[편집자주]

불어불문학을 전공하고 파리 유학길에 오른 임기대 교수는 살아있는 언어를 박제된 틀에 재단하는 듯한 당시의 언어학 공부에 회의를 느꼈다. 그리하여 박사 과정을 앞두고 언어의 역사와 인식론으로 전공을 틀었다. 언어학, 역사학, 문화사회학, 철학 등을 아우르는 통합된 학문이었다. 낯선 파리에서 하루아침에 성과를 내기란 어려웠다. 그럼에도 걸출한 교수의 세심한 지도와 오랜 시간 당구를 치며 쌓아온 상상력과 체계적 사고가 맞물려 성공적으로 박사 학위를 취득할 수 있었다. 임기대 교수는 박사 과정을 거치며 학문적 관심이 끌린 북아프리카를 보다 더 심도 있게 연구하기로 결심했다. 그맘때쯤 예상치 못한 제안을 받았다. 알제리의 국립대학인 알제대학교(University of Algiers)에서 한국학 강좌를 맡아 달라는 제안이었다. 이미 프랑스에서 수많은 마그레브(Maghreb) 사람을 보아왔지만 그들이 왜 이곳에 오고, 어떤 언어와 종교를 비롯한 문화적 특성이 있는지 늘 궁금해 하고 있던 차에 임기대 교수는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한국학 강의에 관심이 있었다기보다 알제리를 중심으로 튀니지, 모로코 등 마그레브 지역을 직접 관찰하고 연구할 일생일대의 기회로 여겼기 때문이다. 임기대 교수는 알제리에서 보낸 2년 동안 산전수전 다 겪었지만, 그 시간을 묵묵히 견딘 덕에 국내에서 마그레브 지역 연구자로 이름을 알리게 되었다. 그는 북아프리카를 단순히 아랍·이슬람 문화권 중의 하나로 여기는 사회 분위기에서 탈피하여 이곳에 실재했던 역사와 문화를 제대로 공부했을 때 개인과 국가 모두에게 더없이 좋은 기회가 열릴 것이라고 강조한다.

어학에서 파생한 새로운 학문을 통해 견문을 넓히다

불어불문학을 전공한 나는 프랑스로 유학을 떠났다. 파리 제8대학에서 언어학으로 석사 과정을 밟던 중 문득 회의감이 들었다. 언어는 생동하며 변화하거늘, 이전 세대나 유행에 따라 만든 이론의 틀에 맞춰 해석하고 공부하는 일이 더 이상 무의미하게 느껴졌다. 나는 애초에 대학에 남아 공부를 계속할 생각이었다. 이때 어문학으로는 창창한 앞날 동안 어떤 연구를 지속할 수 있을지 암담했다. 석사 과정을 겨우 마친 나는 박사 과정을 준비하며 언어의 역사와 인식론을 공부하기를 바랐다. 언어의 역사와 인식론은 언어를 중심으로 역사를 바라보고 인간의 사유 체계를 탐구하며 인간 사회가 언어를 사용할 수밖에 없는 어떠한 구조가 있는지를 연구하는 학문으로 철학과 사회지역학에 가까웠다. 실제로 어학은 물론 철학, 논리학, 문화사회학 등을 두루 공부해야 했다. 언어의 역사와 인식론에 정통한 파리 제7대학교의 실뱅 오루(Sylvain Auroux) 교수는 내가 박사 과정을 앞두고 방향을 틀어 본인의 지도를 받고 싶다고 하자 처음에는 반대했다. 그는 이 분야에서 전 세계로부터 인정을 받은 권위 있는 교수였다. 본인이 가르치는 언어의 역사와 인식론은 서양의 전체 역사부터 서양 사람들의 인식, 사고 구조 등을 꿰뚫어야 하는데, 나는 이미 한국에서 모국어인 한글로 모든 사상을 주입 받았기 때문에 이제 와 접근하는 일이 불가능하다고 잘라 말했다.

국내는 물론 아시아 전역에서 역사와 인식론의 차원에서 언어를 연구해야한다는 필요성은 제기되어왔지만, 실뱅 오루 교수가 말했듯 전혀 다른 문화권에서 나고 자란 사람에게는 쉽지 않은 학문이었던 만큼 대부분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런데 내가 동양인으로서 거의 최초로 그 교수의 제자가 되겠다고 나선 것. 그것도 학문의 마지막 관문인 박사 과정을 앞두고 말이다. 교수가 반대할 만했다. 하지만 나는 끝끝내 뜻을 꺾지 않았고 결국 파리 제7대학에서 그의 제자가 되었다. 실뱅 오루 교수는 나를 제자로 받아들이는 대신 매일매일 숙제를 내줬다. 나는 학기 내내 수십 권에 달하는 전문 서적을 섭렵했다. 그 방대한 양의 공부를 통해 나는 자연과학의 방법론만으로는 인문학과 사회학을 볼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다른 환경에서 다른 사고 체계를 형성한 내가 짧은 시간 안에 서양 언어 속 역사 인식론에 훤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도교수였던 실뱅 오루 교수의 찬사를 받으며 박사 학위를 성공적으로 취득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당구가 있었다. 나는 과감하게 당구의 산술 체계를 도입하며 새로운 이론을 세우고 내 나름의 논리를 다졌다. 자연과학의 방법만으로는 인간 언어의 체계를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이 내가 당구의 복잡한 산술 체계로부터 얻어낸 가장 커다란 성과였다.

당구가 열어준 새로운 기회

나는 예나 지금이나 못 말리는 당구쟁이이다. 대학에 진학하자마자 당구의 세계에 빠져 학과 공부에 소홀할 정도였다. 하루 5시간 이상씩 강도 높은 훈련을 받은 덕에 1년 만에 1천 점의 경지에 다다랐다. 파리로 유학을 가서도 프랑스 국가 대표들과 틈틈이 당구 실력을 겨뤘으며, 1990년대에는 프로당구사로 정식 등록하여 활동하기도 했다. 나는 당구를 치면서 당구공이 일정한 법칙과 수학의 원리에 따라 움직여야 하지만 큐를 잡은 사람에 따라 동선을 달리한다는 사실이 늘 새롭고 신선했다. 공의 무수한 원리가 자연과학처럼 늘 일정하고 체계적이지 않음을 당구의 산술 체계와 ‘나’라는 주체에서 배운 것이다. 더불어 세상에는 영원한 법칙과 규칙이 있다는 서구 과학주의 학문 방식에 회의감을 느꼈다. 나는 당구의 변화무쌍함이 인문학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인 다양성과 일맥상통한다고 느꼈다. 학문에 몰두해 생각이 벽에 부딪힐 때마다 당구에서 배운 다양성과 불규칙성을 접목시켰다. 그 결과 나는 당구의 속성을 통해 사회문화 등 다양한 분야를 포용할 수 있는 너른 시각을 가질 수 있었으며, 아프리카 언어에 대해서도 서구인이 바라보는 관점과는 다른 관점을 견지할 수 있었다. 내가 박사 논문에 당구의 원리를 접목시키자 지도교수는 자신이 봤던 그 어떤 논문보다 창의적이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당구 덕을 톡톡히 본 것.

사실 당구는 아프리카와도 인연이 깊다. 당구의 기원은 프랑스와 벨기에 왕실과 귀족 문화에 있다. 지금이야 당구공을 합성수지로 만들지만, 그전에는 코끼리의 뿔인 상아를 깎아 제작했다. 실제로 벨기에의 아라미스(Aramith)라는 회사가 전 세계 당구공의 70~80퍼센트를 생산한다. 19세기 프랑스와 벨기에가 여러 아프리카 국가들을 식민 통치하며 얼마나 많은 상아를 가져가서 자신들의 놀이거리로 썼을까. 가끔 모난 곳 없이 완벽하게 동그랗고 반짝이는 당구공을 보며 씁쓸함을 느끼는 이는 나뿐이 아닐 터. 특히 나는 박사 과정을 거치며 문화 상대주의의 관점에서 세계사를 다시 들여다보며 자연스럽게 아프리카와 같이 소외되었던 지역의 언어들이 새로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여태껏 한국에서 배운 세계사와 세계관이 얼마나 편협한지 깨우쳤다. 특히 프랑스 내 많은 인구를 차지하는 북아프리카국가 출신의 사람들 그리고 그 문화에 관심이 쏠렸다. 단언컨대 이때의 사고관은 이미 포스트코로나 시대를 맞고 있는 현재에 유용한 사고였다. 당연히 지도교수의 가르침이 단단히 한몫을 했다.

실뱅 오루 교수는 늘 내게 우리 세대는 경계를 넘나들며 학문을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언어학뿐만 아니라 철학, 사회학, 인류학, 논리학 등을 아우르는 그의 분야야말로 탈경계에 해당하는 ‘통섭’의 학문이었다. 그런데 아무래도 프랑스와 우리나라 사이에는 인식이 변화하는 속도에 차이가 있었다. 혹은 온도 차이라고 할까. 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귀국한 나는 오히려 대학에서 설 자리가 별로 없었다. 내 공부가 불어불문학에도 그렇다고 철학과에도 속하지 못했다. 실제로 불어불문학회에 가서 논문을 발표하면 돌아오는 반응은 ‘정말 좋은 내용이나 이것을 국내에서 어떻게 활용할지’였다. 한편, 철학학회에서는 순수 철학이 아니라고 선을 그었다. 경계와 분야를 나누기 좋아하는 한국 학계에서 어느 쪽에도 끼지 못해 한동안 방황한 나는 결국 대안을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예전부터 학문적 관심이 머물던 북아프리카 공부를 보다 더 심도 있게 해보기로 결심했다.

게다가 이 지역 연구는 내 공부의 연장선상에 있으니 이보다 더 좋을 수가 없었다. 많은 사람들이 리비아, 튀니지, 알제리, 모로코 등 아프리카 북서부 일대에 속하는 지역을 단순히 이슬람 문화권 중의 하나로 한정지어서 본다. 그래서 이 지역을 아랍어로 ‘서방’을 의미하는 ‘마그레브’라고 부르는 것도 동일한 맥락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들 지역을 대표하는 종교가 이슬람교이기는 하다. 하지만 마그레브에 속하는 지역 사람들의 실제 목소리를 들어보면 그들은 종교가 이슬람교일 뿐, 자신들이 아랍화되었다는 견해를 부정한다. 민족의식이 강한 그들은 스스로를 ‘아마지그(Amazigh)’라 부르기도 한다.

‘아마지그’는 자체 민족어로 ‘자유로운 사람’ 혹은 ‘고결한 사람’을 뜻한다. 한편, 서양 사람들은 아마지그를 ‘베르베르(Berber)’라고 부른다. 아무래도 베르베르가 우리에게 더 익숙한 단어인 만큼 나는 우선 그들을 베르베르라고 부르고 소개한다. 국내에서 가뜩이나 낯선 존재이자 관념인 만큼 최대한 익숙한 단어를 활용하는 쪽이 더 낫다고 판단해서다. 수천 년 동안 외부로부터 침략을 받아왔던 베르베르인들은 특히 이슬람교의 영향을 받으며 많은 사람들이 아랍화됐다. 마지막까지 아랍화에 저항한 사람들이 명맥을 이은 베르베르 문화와 언어는 마그레브 사회 전반에 널리 퍼져있다. 나는 마그레브 지역의 역사와 문화를 공부하며 국제 사회가 이 지역을 얼마나 편협한 관점으로 바라보고 있는지 깨달았다. 아프리카 지역에 있는 고유의 문화, 게다가 사하라(Sahara)의 베르베르인은 아프리카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이런 지역을 아랍-이슬람으로만 해석하다니! 마그레브 지역에는 우리나라 기업이 특히 많이 진출해 있다. 이때 우리가 그 지역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면 진정한 교류나 교역이 이뤄지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마그레브 지역과 베르베르어를 연구할 당위성을 느낀 나는 향후 대학에 마그레브 연구소를 개설하며 이 지역을 본격적으로 탐구하리라 다짐했다.

한국학 교수로 마그레브 현장을 찾다

국내에서 마그레브 연구에 몰두하려는 순간 뜻밖의 인연이 찾아왔다. 알제리에서 한 교수가 내한했는데, 그가 알제대학교에 한국학과를 개설하고 싶어 한다며 지인이 만남을 주선했다. 그는 알제대학교 의과대 소속의 교수였고, 그를 통해 알게 된 사람이 페리얼 필랄리(Ferial Filali) 교수였다. 나는 상상했다. 내가 만약 알제리에 간다면? 알제리의 학생들을 상대로 한국학을 가르치는 일도 의미 있겠지만, 내가 하고 싶은 공부와 연구를 현장의 중심에서 이어갈 수 있으리라. 게다가 내 박사 연구의 후속 연구가 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니 이런 기회가 있을까.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즉시 만남에 응했다. 페리얼 필랄리 교수는 내게 알제리로 함께 가서 한국학을 가르쳐줄 것을 제안했다. 가족들과 상의해야 할 문제였지만, 나는 이미 약속 장소에 나오며 마음을 거의 굳힌 상태였다. 물론 가족 중 누군가가 극구 반대한다면 다시 심사숙고해야 했기에 결심을 번복할 1퍼센트의 가능성은 남겨둬야 했다. 나는 페리얼 필랄리 교수를 처음 만난 자리에서 솔직한 내 심정을 그대로 드러냈다. 그는 자못 놀란 눈치였다.

왜냐하면 여태껏 한국인 교수를 여럿 만나 의사를 물었다가 매번 단칼에 거절당하거나 미온적 반응을 받았기 때문이다. 내가 당장 앉은 자리에서 99퍼센트 함께 갈 생각이라고 하자 그는 오히려 놀라워했다. 다행히 가족들 중 극구 반대하는 이는 없었다. 나는 강한 운명의 기운에 이끌려 앞뒤 가리지 않고 알제리행을 택했다. 당시 알제리는 우리에게 낯설고 두려운 나라였다. 알제리는 1990년대에 지금의 시리아보다 더 끔찍한 내전을 겪었다. 알제리에 거주하던 외국인 전원이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탈출하다시피 했다. 그때 우리나라 대우자동차가 남았다가 지사장이 피살되는 비극을 겪기도 했다. 한편, 1990년대 후반 알제리 테러리스트들은 프랑스 마르세유 공항에서 비행기를 납치해 인질극을 벌이는 등 국제적인 범죄를 저질러 전 세계 사람들로부터 공분을 사기도 했다. 다른 교수들이 페리얼 필랄리 교수의 제안을 단칼에 거절한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2004년 나는 오직 한 사람만 믿고 바라보며 여전히 두려움의 대상이던 알제리로 향했다.

알제 공항에 내리자 낯선 사람이 나를 맞이했다. 마중 나온 그는 나를 어느 한 아파트에 데려다 주더니 아무 말 없이 가버렸다. 영문을 몰라 답답했지만 다음날이면 페리얼 필랄리 교수를 만날 수 있으리라는 생각에 스스로를 다독이며 잠들었다. 하지만 그 후로 2주 동안 나를 이 집에 데려다 준 사람 말고는 아무도 만날 수 없었다. 심지어 그 사람은 내가 깊은 잠이 들었을 때 슬그머니 와서 식량을 채워주고 사라졌다. 수중에는 200유로밖에 없었다. 휴대전화도 오자마자 개통할 생각에 놓고 왔다. 대사관에서는 이미 내가 입국한 사실을 알 터였지만 내가 연락을 안 하니 대사관에서도 난리가 났다고 한다. 현지에 한국학 강의가 개설되는 것 자체가 대사관 측에서는 중차대한 일이었기 때문에 많은 관심이 있었다. 가족에게는 무사히 도착했다는 기별을 하지 못했으니 얼마나 걱정하고 있을까. 나는 발을 동동 굴렸다. 설상가상으로 개학일이 다가오고 있었다.

너무 답답한 나는 잠자는 척하고 있다가 공항에 마중나왔던 사람을 붙들고 어찌된 영문인지 따져 물었다. 그는 내게 그저 기다리라고만 했다. 숙식을 해결할 집만 있을 뿐 고아나 다름없는 처지가 된 나는 아파트 앞 골목에 나가 하루 종일 멍하니 서 있다 들어오곤 했다. 그러다가 정말 개학일에 다다르자 나는 도저히 더 이상 참지 못하겠다 싶어 알제대학교를 직접 찾아 나섰다. 길을 물어물어 교정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뙤약볕에 두 시간 넘게 걸은 후였다. 길도 대중교통도 모르고 헤매며 온 교정이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관계자를 만나지는 못했다. 화가 났지만 기진맥진하여 더 이상 따져 묻지 못한 채 나는 다시 온 길을 되돌아갔다. 그 다음날은 노선을 변경하여 대사관을 찾아갔다. 물론 걸어서. 다행히 대사관에서는 나를 반겨줬다. 이미 내가 온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으나 연락이 닿지 않아 그들도 걱정하던 찰나였다고 했다. 나는 전화기를 빌려 가족들에게 가까스로 안부를 전하고 든든하게 밥도 얻어먹었다. 원래 해외로 나갈 때 고추장이나 라면, 김치 등을 챙기는 편이 아닌데, 그때 대사관에서 먹은 라면 맛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개학일이 코앞에 다다르자 나를 이 낯선 곳으로 이끈 페리얼 필랄리 교수를 비로소 다시 만날 수 있었다. 그리하여 2주간 가슴 졸인 시간을 뒤로 한 채 계획대로 한국학 강좌를 열 수 있었다.

우리가 마그레브를 공부해야 하는 당위성

알제대학교 학생들은 우리나라에 상상 이상의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학기 내내 강의실이 꽉꽉 찼을 뿐더러 수강 신청할 때 경쟁률도 무척 높았다. 수강 신청에 실패하여 도강하는 학생들도 꽤 있었으나 나는 마음이 갸륵하여 못 본 척했다. 대사관 측에서도 학생들의 뜨거운 반응을 큰 외교적 성과로 여길 만큼 기뻐했다. 한편 2006년 3월, 지금은 고인이 된 노무현 전 대통령이 알제리를 방문했을 때 권양숙 당시 영부인이 알제대학교를 방문하여 한국학 수업을 듣는 학생들과 만남의 장을 마련하기도 했다. 알제대학교와 우리나라의 세종학당재단은 내가 알제리에 세종학당을 세워 지속적으로 한글과 한국학을 가르치기를 바랐다. 하지만 내게는 한국학을 가르치는 일보다 더 중요한 목표가 있었다. 베르베르 문화를 비롯하여 마그레브 지역의 진정한 모습을 연구하는 일이었다. 그중에서도 베르베르 연구야말로 지중해와 아프리카를 연결할 수 있다는 중요한 영역이었다. 이 지점이야말로 내가 박사 학위 공부할 때부터 학문의 경계, 지역의 경계, 인종의 경계를 무너뜨리며, 경계를 넘나들 수 있다고 생각했던 영역이다. 나는 한국을 방문했던 페리얼 필랄리 교수와 처음 만난 자리에서 알제리행을 결정했을 정도로 강한 신뢰를 보여줬을 뿐 아니라 도착해서도 일종의 시험 기간이었던 2주를 잘 버텼으며, 생활고도 잘 견딘 덕에 그와 그의 주변 사람들로부터 큰 신의를 얻었다. 교수로 초빙 받아 갔음에도 불구하고 생활고를 겪었던 이유는 당시만 해도 알제리의 행정 체계가 다소 혼란스러워 월급이 제때 들어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 상황에서도 나는 현지 사람들의 커뮤니티에 깊숙이 스며들었다.

그 덕에 현지인들조차 쉽게 가지 못할, 선사 시대의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한 사하라 사막과 오지를 돌아다니며 현장 조사를 할 수 있었다. 연구 현장에서 수많은 사람을 만나 그들의 목소리를 듣고 수만 장에 달하는 사진 자료를 확보했다. 나는 그 과정에서 베르베르인이 얼마나 민족의식이 강하며 자부심이 센 민족인지 알 수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아랍인으로 치부되는 일을 완강히 거부했다. 베르베르인들은 이슬람교를 있는 그대로 수용한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문명을 바탕으로 이슬람교를 흡수하여 차별화된 문화를 만들어냈고 사하라 이남으로까지 확장해갔다. 2010년 말 중동과 북아프리카 전역을 뒤흔든 ‘아랍의 봄’ 시위도 베르베르인들의 기저에 내제된 정서가 영향을 미친 결과였다. 나는 북아프리카 특히, 마그레브 지역의 역사와 문화를 단순히 이슬람과 아랍의 관점에서 보는 행위가 얼마나 단편적이고 근시안적인지 알게 되었다.

특히 최근에는 모로코, 튀니지, 알제리에서 베르베르인을 중심으로 민족 저항 운동이 계속 일어나고 있으며, 그 기세가 점점 강해지는 추세다. 나는 실제 현장에서 사람들의 목소리와 사회 분위기를 직접 목도하며 베르베르와 마그레브를 연구할 필요성을 더욱 절실히 느꼈다. 학자로서 지적 호기심이 강하게 작용한 것이기도 하지만, 국가 경제를 고려했을 때도 분명 필요한 부분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알제리는 아프리카대륙에서 우리나라 기업이 가장 많이 진출한 나라다. 내가 알제리에서 한국학을 가르칠 당시에도 내전 등 극한의 상황에도 불구하고 알제리에 남아준 대우 자동차를 향한 고마운 마음이 남아 있어서인지 현지 사람들은 우리나라에 무척 호의적이었다. 하지만 그 이후 알제리에 진출한 기업들은 대우 자동차와는 달리 현지 사람들과 소통하려는 노력이 부족해보였다. 그저 물건을 하나라도 더 팔고자 하는 모습으로 보였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는 관계가 점점 느슨해질 수밖에 없으며 호감도도 떨어지기 마련이다. 알제리에 진출한 기업들이 장기적으로 보다 성공적인 결과를 거두기 위해서는 알제리와 마그레브 지역 전체에 퍼져 있는 베르베르인을 올바른 시각으로 볼 줄 알아야 한다.

나는 심층적 연구를 위해 알제리에 더 체류하기를 희망했다. 하지만 집안 사정으로 2년 만에 귀국행 비행기에 올라야 했다. 다행히 국내에서도 점점 불어불문학과나 프랑스학과에서 불어권 아프리카를 공부하려는 움직임이 불기 시작했다. 특히 노무현 전 대통령이 알제리를 방문한 후 국내 기업들이 알제리를 포함한 마그레브 지역에 관심을 쏟기 시작했다. 당시 기업에서 마그레브 지역에 진출하는 데 있어 전문가의 소견이 필요할 때마다 내게 연락을 취하곤 했다. 때마침 한국외국어대학교 프랑스학과에서 마그레브 지역에 대한 강좌를 개설한다 하여 프랑스학과에서 강의하는 동시에 아프리카학부에서 강의하는 진귀한 경험을 하기도 했다. 이후 한국외국어대학교 아프리카연구소에서 근무하다 현재는 부산외국어대학교 지중해지역원에서 마그레브 및 서아프리카 일대 연구를 이어가고 있다. 나는 왜 아프리카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이 동아프리카의 스와힐리어에는 주목하면서 북아프리카의 베르베르어에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지 늘 의아해했다. 동아프리카의 스와힐리어를 연구하듯 북아프리카의 베르베르어를 공부하면 독자성을 가질 수 있을 뿐더러 정부나 기업이 북아프리카에 진출할 때 새로운 내용을 안내해줄 수 있다. 지난해 나는 교내 아랍어 전공자들을 데리고 알제리를 다녀왔다.

그때 학생들은 현지에서 아랍어만큼 베르베르어가 중요하다는 사실을 절실히 깨우쳤다. 국내에 베르베르인을 연구하는 사람이 드물다 보니 아랍, 안달루시아, 심지어 시칠리아까지 엮여 있는 방대한 역사를 발굴하는 일이 쉽지 않다. 스페인 안달루시아가 아랍이 아닌 베르베르인이 정복하여 이룬 문화였다는 사실을 누가 알고 있겠는가! 상황이 이렇다 보니 안타깝게도 베르베르어 연구는 늘 뒷전으로 밀린다. 나는 올해 베르베르 문화를 소개하는 책을 출간 할 계획이다. 마그레브가 중동과 어떻게 다른지, 동시에 아프리카대륙과는 어떠한 연관성을 보이는지 등 베르베르가 갖는 의미와 내용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하여 소개할 예정이다. 혼자 집대성 중인 베르베르 문법책은 내후년쯤 발간하기를 계획하고 있다. 나는 알제리에서 힘든 시절을 보내기도 했으나 학문적으로는 정말 큰 도움을 받았다. 당시만 해도 국내에서 북아프리카라고 했지, 그 누구도 마그레브라는 표현을 쓰지 않았다. 그때 내가 국내 학계에 확신을 가지고 마그레브라는 새로운 개념을 계속 주장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내게 생생한 이야기를 기꺼이 들려주고 자료를 보여준 알제리와 마그레브 사람들이 있다. 내가 그들에게 보답하는 길은 세상의 편견에 가려진 그들 고유의 역사와 문화를 하나라도 더 알리는 일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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