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아타’로 머리 감는 여인
[칼럼] ‘아타’로 머리 감는 여인
  • 류현옥<재독 칼럼니스트>
  • 승인 2016.03.24 17:22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어머니가 마당에 맷방석을 깔고 흰 석회가루가 담긴 나무 그릇을 내다놓을 때면 조상님들 제사가 며칠 뒤로 다가왔다는 것을 알았다. 부엌 장에 깊숙이 보관해두었던 제기를 들어내서 볏짚을 둘둘 뭉쳐 만든 볏짚 수세미로 어머니는 놋쇠 제기를 닦기 시작했다. 검푸르게 쓴 녹이 씻겨 나가고 윤이 나는 청동색 놋쇠 그릇들이 차곡차곡 쌓였다. 국사발, 밥사발, 자반(머리까지 통째로 구운 생선)과 온갖 과일을 올릴 납작한 제기들, 나물을 담을, 가운데가 안으로 파진 접시, 제술을 담을 주전자와 작은 술잔들. 어머니는 바느질을 할 때처럼 콧노래를 부르며 정성을 다해 제기를 닦았다.

사대에 걸친 조상의 기일, 설과 한가위를 맞아 제를 지낼 때마다 반복되는 준비였다. 어머니는 이렇게 준비한 제기를 제사가 끝나는 대로 다시 깨끗하게 씻어 물기 얼룩이 생기지 않게 볏겨로 문질러 닦은 뒤 다음 행사를 위해 보관 장소로 옮겼다. 석회가루와 짚 쑤시게는 따로 헛간 구석에 보관됐다. 내가 만약 고국을 떠나지 않고 대갓집 종중에 시집을 갔더라면 어머니와 같은 일을 감당해야 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런 반복되는 지루한 일을 용케도 피해 도망온 셈이다.

파독 간호사 50주년을 맞아 독일 각 도시에서 행사를 준비중이다. 나도 50년 전 간호사로 독일에 왔다. 독일에 도착해 근무가 시작되고 병동의 부엌 싱크대 아래 있던 ‘아타’라는 세제를 발견했을 때, 나는 놋쇠제기를 닦던 석회가루를 연상했고 어머니를 생각했다. 둥근 플라스틱병에 담긴 가루세제는 내가 아는 횟가루만큼 무거웠고, 구멍을 뿡뿡 뚫어 필요한 만큼 뿌릴 수 있도록 돼 있었다. 근무 중 여러 번 아타로 부엌 싱크대를 닦아야 했고, 그날 쓴 의료용구들을 닦아서 소독실로 보내고 나면 세균 방제를 위해 근무실의 싱크대를 아타로 닦았다. 아타를 볼 때마다 나를 떠나보낸 뒤에도 계속 놋그릇을 닦았을 어머님을 생각하고 아타 한 병을 우편으로 보내드리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내 친구인 화가 송현숙은 독일의 물에 불편을 느낀다고 했다. 특히 비누로 머리를 감고 나면 매끄럽고 윤이 반질반질 나는 고국의 물이 그리웠다. 아타로 닦은 싱크대와 욕탕이 반질반질 윤이 나는 것을 보고, 아타 가루를 물에 타 머리를 감으면 윤기가 살아날 것 같다고 생각했다. 물론 고향의 물로 감은 만큼 원하던 윤기가 났을 턱이 없었다. 예술가다운 재치로 그림으로 표현했다. 그림은 ‘독일에 도착한 지 얼마 안 되어 그 용도를 모르는 한국 간호사가 아타(ATA)로 머리를 감는 자화상 1979’라는 제목이 붙어 ‘여성과 건강(Frauen und Gesundheit Forum fuer Medizine und Gesundheitpolitik 1981)’이라는 의료지에 실렸다.

플라스틱병을 흔들어 아타 가루를 머리에 뿌리는 장면에서 주목할 것은, 나체 여인 옆에 자리잡고 있는, 더러운 빨래를 모아 담는 자루같은 것이다. 바닥에 앉아 아타 가루를 머리에 뿌리는 모습은 마치 아타 가루가 지나가면서 머리카락에 붙은 더러움을 씻어내려 바로 자루 속으로 들어가게 하는 것 같다. 머리를 아타로 마른 청소하는 느낌이다. 근무 중 머리 위에 올라붙은 더러움을, 환자가 입었던 옷이나 이불 등 오염된 빨래를 모아 담아 세탁소로 보낼 자루 속으로 같이 털어 넣어 세탁소로 보낸다고 하면 될까?

작은 공간에 앉은 여인은 오직 머리를 감는 일에 열중하고 있고, 붉은색으로 쓴 ATA가 시선을 집중시킨다. 생소한 사회에서 소외된 노동 이민 여성의 존재를 역사에 남기게 된 귀한 그림이다. 한 권의 책으로 써도 될 이야기가 담겨 있는 상징성을 내포하고 있다. ‘재독동포 50년사’에 실렸고, 파독 간호사 50주년 베를린 행사장에도 걸릴 예정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 서울특별시 송파구 올림픽로35가길 11(한신잠실코아오피스텔) 1214호
  • 대표전화 : 070-7803-5353 / 02-6160-5353
  • 팩스 : 070-4009-2903
  • 명칭 : 월드코리안신문(주)
  • 제호 : 월드코리안뉴스
  • 등록번호 : 서울특별시 다 10036
  • 등록일 : 2010-06-30
  • 발행일 : 2010-06-30
  • 발행·편집인 : 이종환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석호
  • 파인데일리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24 월드코리안뉴스. All rights reserved. mail to wk@worldkorean.net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