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비촌만필] 만주에서 마주한 ‘有明 朝鮮國’ 비문
[선비촌만필] 만주에서 마주한 ‘有明 朝鮮國’ 비문
  • 김도 한민족공동체재단 부총재
  • 승인 2019.06.24 0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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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코리안신문과 한중교류문화원이 주관한 동북3성 항일독립운동 유적지답사 프로그램에 참여한 나는 요녕성 관전현 청산구에 세워진 비석에서 흥미로운 비문을 발견했다. 이 비석은 항일 독립운동가 이진룡 장군과 그의 부인 우씨의 의열비(義烈碑)였다.

이 의열비 비문에 ‘유명 조선국 열부 유인 우씨지묘’(有明 朝鮮國 烈婦 孺人 禹氏之墓)‘라고 새겨져 있었다. 조선시대 사대부 묘소에 세워진 비석에는 ‘유명 조선국...’으로 시작하는 비문을 흔히 볼 수 있는데 그 뜻을 이해하려면 조선 사상사와 사대(事大)의 역사를 살펴보아야 한다.

동양은 천여 년 동안 중화질서가 지배했다. 한자, 유교 문명권에 편입된 중국 주변 국가는 오랜 동안 중국이 세상의 중심이며 중국 이외의 세상을 알지 못하고 살아왔다.

거대 제국 중국에 사대하며 살아가는 것이 약자의 생존방식이라고 생각했다. 이른바 사대조공질서(事大朝貢秩序)가 그것이다.

특히 성리학을 통치 이념으로 건국된 조선은 1368년 한족이 세운 명(明)나라로부터 국호 ‘조선’을 하사받고 명나라의 연호를 쓰는 등 사대를 자청했던 것이다.

중원의 원元, 명(明) 교체기에 새로운 중화질서에 자진해서 편입된 조선은 ‘명(明)나라가 있기에 조선이 있다’는 뜻으로 ‘유명 조선국’을 자청한 조선 지배층들의 사대(事大)문구로 자리 잡았다.

명의 제후국이라는 의미의 ‘유명조선국’ 표현은 공식 문건이나 비문 등에 널리 쓰였는데 조선 전기에는 ‘대명’(大明), ‘황명’(皇明)이라는 표기도 있었으나 병자호란 이후에는 ‘유명(有明)’으로 통일된 듯하다. 명(明)이 망하고 청(淸)이 중원을 지배한 이후에도 청나라의 존재를 부정하는 반청숭명(反淸崇明) 사상과 조선 후기에 만연했던 소중화(小中華) 의식이 신도비(神道碑) 등 각종 비문에 나타났던 것이다.

일제 강점기 만주에서 항일 의병 활동을 하던 황해도 평산 출신의 이진룡 장군이 일제에 검거돼 1918년 평양 감옥에서 순국(殉國)했다. 이 소식을 들은 그의 부인 우 씨도 남편을 따라 순절(殉節)했다. 이를 기리기 위해 요녕성 관전현 청산구에 의열비를 세웠는데 우리가 참배했던 이 의열비의 비문에 ‘유명 조선국...’으로 새겨져 있었던 것이다.

1644년에 청나라에 패망하고 사라진 명나라, 1912년, 서구 열강에 망해버린 청나라, 1910년에 일제 식민지가 된 조선의 독립운동가 비석에, 그것도 옛 청나라의 발상지인 만주 땅에 20세기에 세워진 ‘의열비’의 비문이 유명(有明) 조선국이라니!

숭명사대(崇明事大) 사상의 끝이 어디인지. 망해서 없어진 나라 명(明)에 의리, 명분론으로 사대(事大)하는 숭명사대(崇明事大) 역사는 동양의 국제질서에서도 그 유래를 찾을 수 없는 희귀한 사례이다.

현지 안내자는 ‘有明’이라는 비문에 그런 역사적 배경이 있었다는 것을 몰랐다고 했다.

한편 대국(大國)을 대국으로 인정하고 약소국이 그 존립을 인정받는 ‘사대조공’이라는 위계질서에 순응했던 ‘조선’을 그렇게 폄하할 수만은 없다는 것이 사가(史家)들의 주장이다.

‘사대’란 고급 문명을 받아들여 문명국가로 발전해 가는 자연스러운 과정이며 조선은 사대를 하면서도 중화 문명에 버금가는 문명국가로 도약했다는 것이다.

고유 언어와 문자, 독자적인 천문 역법의 개척, 중국유학을 능가하는 ‘조선유학’으로 업그레이드하는 등 조선은 독자문화를 창달하고 이를 화려하게 꽃피운 이른바 ‘진경문화(眞景文化)’ 시대를 열기도 했다.

그러나 서세동점(西世東漸)의 제국주의 시대에 격변하는 국제 정세에 휩쓸려 일제의 식민지가 된 조선의 숭명사대(崇明事大)의 비극적 역사를 만주의 독립 유적지 비문에서 만나게 될 줄이야!

수천 년 지속한 동양 특유의 국가 간 위계질서였던 사대조공 체제의 현대판 이름이 ‘일대일로’(一帶一路) 프로젝트라고 한다.

G2로 부상한 중국이 과거 세계 최고급 문명이었던 중화 문명을 부활시키겠다는 소위 ‘중국몽(中國夢)’ 실현과 함께 중국이 주도할 세계질서를 ‘천하질서’라고 한다면 이 천하질서와 2차 대전 이후 70여 년 동안 지속된 미국 주도의 ‘패권질서’가 무역전쟁이라는 이름으로 충돌하고 있다.

이렇게 미중 패권경쟁으로 요동치고 있는 동북아 정세 속에서 한국의 생존 전략은 무엇인가? 분단된 한반도의 지정학적 리스크를 어떤 전략과 지혜로 극복해 나갈 것인지?

전략적 사대조공이 아닌 기회주의적이고 맹목적인 사대의식으로는 복잡하고 급변하는 국제질서에서 도태될 수밖에 없다는 역사적 교훈을 다시 한 번 확인하는 만주 항일 독립운동 유적지 답사여행이었다.

김도 한민족공동체재단 부총재
김도 한민족공동체재단 부총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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