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율 칼럼] 나의 창업스토리①- 막다른 골목에서 새길을 찾다
[이승율 칼럼] 나의 창업스토리①- 막다른 골목에서 새길을 찾다
  • 이승율 동북아공동체문화재단 이사장
  • 승인 2020.09.10 1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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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대구기독문인회 초청 인터뷰(8/28)가 있어서 대구를 다녀왔다. 오래전에 약속한 미팅이라 코로나 사태가 엄중해지고 있지만, 시간을 내어 다녀왔다. 대구시조시인협회장을 역임하신 리강룡 현 회장, 직전 회장이신 이상진 박사(한국품질경영연구원 수석컨설턴트), 대구기독교총연합회 조무제 사무총장 및 대담 기록을 맡은 소설가 남택수 장로님, 이렇게 네 분이 따뜻하게 맞아 주셨다.

약 2시간 정도 대담하는 가운데 주로 신앙 경력과 선교 활동(연변/평양과기대, CBMC, ISF 등)을 중심으로 대화를 나누었으며, 앞으로 남북한 통일 사역을 위한 대책도 많이 질문해 오셨다. 대담 도중에 내가 늦깎이로 대학을 다니면서 어렵사리 창업하게 됐을 뿐 아니라 사업을 하는 과정에 비닐하우스 생활까지 한 적이 있다고 하니 다들 얼마나 놀라워하는지!

SRT를 타고 서울로 올라오면서 (마스크를 낀 채) 눈을 감고 묵상하는 가운데 그분들의 표정이 계속 어른거렸다. 부끄럽고 창피한 일이지만 이제 이 나이(73세)가 돼 뒤를 돌아보니 그 모든 게 다 하나님의 은혜였다는 생각뿐이다. 그 얘기를 풀어 놓자면 사연이 길고 길다. 이참에 대구기독문인회에서 인터뷰한 내용을 중심으로 ‘나의 창업 스토리’를 소개함으로써 코로나 사태만이 아니라 평소에도 일자리 문제로 희망을 잃고 방황하는 청년들이 많으니, 그런 청년들에게 힘이 되고 격려가 되기를 바란다.

#2.
결혼하고 첫애를 낳은 뒤 대학(동국대 불교철학과)에 들어간 해가 1975년(28세)이다. 그 후 대학 3학년 여름방학 직전이었으니 1977년 7월 중순쯤의 일이다. 불광동 언덕배기 골목 집에 세 들어 살았으며 당시 둘째 아이를 낳은 지 얼마 안 됐을 때다. 이른 아침인데 마당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나서 나가 봤더니 집달관이 들이닥쳐 집안 곳곳에 빨간딱지를 붙이고 있었다.

내용인즉슨, 40대 후반에 과부가 돼 아이 셋을 키우며 어렵게 가계를 꾸려 왔던 집주인이 이년 넘게 사채를 끌어 쓰다가 빚을 갚지 못하자 결국 강제집행을 당하게 된 것이다. 우리는 집주인의 그런 사정을 전혀 모르고 있다가 졸지에 집주인과 함께 집 밖으로 쫓겨나는 신세가 됐다. 기실 집주인도 그동안 집을 팔아 보려고 무진 애를 썼으나 워낙 낡고 퇴락한 데다 막다른 골목 끝에 있는 집이라 아무도 둘러보러 오지 않았던 것이다.

우리 내외는 그저 기가 막혔다. 속수무책으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전전긍긍하고 있는데 채권자 되는 분이 말을 걸어왔다. “학생을 보니 사정이 매우 딱해 보여서 한 가지 제안을 해 볼 테니 의논해 보시오.” 전세금(백만원)을 안 떼이려고 이런저런 통사정을 하며 대화하는 중에 집사람이 고려대 석사과정을 나왔다고 했더니 “자신도 고대 출신이라고 하면서, 채무자로부터 받을 돈이 430만원이다. 여기서 한 푼도 더 붙이지 않고 팔 테니 부모님께 얘기해서 이 집을 인수해라. 그래서 수리를 해서 내놓으면 최소한 전세금 정도는 되찾을 수 있을 거다. 요즘 부동산 매기가 좀 나아졌으니 그렇게 한번 해 보라”는 내용이었다.

우리 내외는 다른 대책이 없어서 그날부터 일주일간 주어진 시간 여유를 갖고 온 사방에 ‘돈’을 알아봤다. 결과적으로 친가에서 백만 원, 처가 장모님이 백만 원을 지원해 주시기로 했다. 그때 천사가 나타났다. 불교대학 동급생인 P 군이 자기 아버지가 제일은행 명동지점장이라서 형 이야기를 했더니 한번 찾아오라고 하신다는 전갈이었다. 지점장님을 만나 상황 설명을 해 드리고 수리를 해서 집을 파는 대로 융자금을 일시에 다 갚겠다고 소신 있게(?) 말씀을 드렸다.

나를 한참 뚫어지게 쳐다보시더니, 하도 딱하셨던지 “알았다. 이백만 원 내가 보증해서 빌려줄 테니 꼭 성공하라”라고 하시는 게 아닌가! 아! 이렇게 고마울 수가 있나! 나는 너무나 감사하여 무릎을 꿇고 큰절을 드렸다.

그 후 우리 내외는 친구들로부터 빌리거나 아르바이트해서 모은 ‘돈’을 보태어 채권자에게 430만원을 건네고 집수리를 시작했다. 여름방학 한 달간 일꾼 두 명을 데리고 꼬박 매달려 일했다. 그런 8월 마지막 주일 오후에 복덕방 세 군데서 집을 둘러보러 왔다. 저녁 무렵이 다 돼 갈 때 그중 한 군데 복덕방 영감님이 손님을 모시고 와서 계약하자고 했다. 그래서 우리는 더 물어보지도 않고 복덕방에서 이끄는 대로 매매 계약을 마쳤는데, 결과적으로 집값 원금은 물론 전세금 100만원을 찾고 수리 비용과 복비를 합친 금액 100여만원과 거기에 100만원이 더 남는 750만원으로 집을 팔았다. 한마디로 기적이 일어난 것이다! 그때 수익금으로 남은 백만원이 그다음 해(1978년) 회사를 창업하는 종잣돈이 됐다.

#3.
나는 집사람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는 어차피 불교대학에 왔으니 여기 눌러앉아 교수 자리 찾는 길 외에는 더할 게 없어요. 그러니 당신 전공을 살려서 사업을 하도록 해요. 조경은 실무분야이고 잘만하면 나중에 건설회사도 만들 수 있을 테니 그리해 봐요. 나도 도우리다.”

그동안 집사람은 학부에서 원예를 전공한 후 서울에 올라와 신규 기술 분야로 각광을 받기 시작한 조경학을 전공한 후 취업을 위해 여러 기관에 응시했으나 여성이고 또 기혼자라는 이유로 여러 번 퇴짜를 맞은 경험이 있다. 그래서 천행으로 생긴 귀한 ‘돈’을 아무 데나 쓰지 말고 집사람의 전공을 살리는 데 사용코자 했던 게, 그동안 고생하며 나를 뒷받침해 왔던 집사람에게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도리였다. 여러모로 준비한 끝에 다음 해 2월 초 강남 영동시장 앞 길거리에 12평 되는 사무실을 세 얻어 개업한 회사가 ‘반도조경공사’였다.

그때 창업 팀으로 참여했던 직원들은 동국대 조경학과 1기생으로 4학년 올라가기 직전에 있던 3명이었다. 동국대에서 늦깎이 공부를 하면서 조경학과 학생들에게 야구를 코치할 때 눈여겨 봐두었던 3명의 학생이 바로 그들이다. 그해 첫해 일 년간 맡은 일이라곤 고작 가정집 정원공사 세 건과 조그만 모텔 한 곳 조경공사에 불과했다. 그 첫 번째 일이 5월 중순, 영동대로 길 건너편 언덕 위의 주택 마당-대문에서 현관까지 이르는 10m 정도의 진입로에 붉은벽돌을 까는 일이었다.

지금도 그때 일했던 장면이 눈에 선하다. 인부도 없이 직접 시공을 해 본다면서, 멜빵 지게를 지고 낑낑대며 마당으로 올라가 짐(붉은벽돌, 시멘트, 모래, 자갈)을 부려 놓은 후 어설프게 콘크리트 타설을 하던 직원들의 모습이다. 그런데 일의 결과가 어찌 됐나? 며칠 후 비가 왔던 그다음 날, 주인아주머니로부터 급한 연락이 와서 직원들과 함께 뛰어가 봤다.

이게 웬일인가! 직원들이 그렇게 튼튼하게 시공했다고 스스로 대견해 마지않았던, 15㎡에 불과한 진입로가 빗물에 침하돼 온통 움푹움푹 찌그러져 있지 않은가! 나중에 비상 대책회의(?)를 하면서 안 사실이지만 지극히 초보적인 일, 즉 땅바닥에 콘크리트 길을 만들 때는 반드시 ‘버림 콘크리트’로 먼저 기층을 만들어 놓고 그 위에 와이어매쉬 또는 철근을 조립한 다음 일정 두께로 메인 콘크리트를 타설하는 게 원칙인데 이를 모두 빠뜨린 것이다. 이처럼 어설프고 멋모르며 시작한 일이 지금에 이르기까지 40여 년의 세월이 흘렀으니, 그동안에 또한 얼마나 많고 많은 일이 있었겠는가!

#4.
창업한 뒤 일 년 동안은 워밍업 기간이라고 치자, 그다음 해(1979년)로 넘어오자 약간 조바심이 났다. 나는 대학 졸업과 동시에 곧바로 대학원(철학과)에 입학하여 학업을 계속할 뜻이 분명했지만, 막상 회사를 세워 놓았는데 일감이 없으니 그냥 공부만 하고 있을 수가 없었다. 집사람이 여기저기 일감을 찾으러 다녔지만 신통치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우선 공사 단종(조경) 면허가 없다 보니 정부 발주 공사에 입찰할 자격이 없었고 그러다 보니 정부 공사를 수주한 도급기업에서 하청을 받는 일도 여간 어렵지 않았다.

당시는 요즘처럼 하도급 업무 규제가 철저하지 않아서 무면허 업자도 간혹 하청을 하긴 했지만, 수주 경쟁에서 후순위로 밀려나기에 십상이었고, 특히 대기업 또는 중견기업 산하에는 오너(Owner)의 친인척 되는 사람들이 고정적으로 하청을 하면서 아성을 이루고 있었기 때문에 그 벽을 뚫고 들어가기가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갈 만큼 어려웠다. 그러다 보니 제대로 된 공사는 아예 근접도 못 하고 그저 개인 집 정원공사나 일반 사업자가 발주하는 조그만 일 이외에는 할만한 일이 없었다.

나 역시 아직 학생 신분을 면치 못하고 있는 주제에 어디 가서 ‘일’을 따 오겠는가! 집사람을 도우려고 애를 써봤지만 마땅한 대책도 없고 또 사회적인 연줄도 없었다. 참으로 갑갑해졌다. 그런 가운데 이런 생각이 들었다. 기왕 게임을 할 밖엔 ‘큰 놈’하고 한판 붙어보자란 생각이 떠올랐다. 희한하게 그때도 내게 희망의 길잡이가 돼 준 것은 ‘경북고 야구’였다. 경북고에서 같이 야구를 했던 친구이며, 대학에서 토목을 전공하고 현대엔지니어링에 입사하여 토목부 대리(代理)로 근무하고 있던 K 군을 만나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었을 때다.

당시 그가 참여해 있던 프로젝트가, 설계와 시공을 한 회사가 몽땅 책임지고 실행한 다음 준공 시 키(Key)만 돌려준다고 해서 이름이 붙여진 ‘턴키 베이스’ 프로젝트로, 국내에서 처음으로 시도한 ‘아산화력발전소(지금은 평택화력발전소로 불림)’ 건설 사업이었다. 그를 만나 ‘턴키 베이스’ 프로젝트를 얘기 들었을 때 나는 갑자기 어떤 기발한 ‘아이디어’가 생각났다. 그 ‘아이디어’가 그 후 우리 회사의 진로에 굳건한 토대가 돼 주었고, 또한 나의 인생을 건설해 나가는 데 있어서 ‘턴키 베이스’ 방식을 선호하는 소중한 계기가 됐으니 이게 천운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인도하심인가!

내 아이디어는 단순했다. 아산화력발전소가 ‘턴키 베이스’ 프로젝트라면 우리도 ‘턴키’ 방식으로 한번 접근해 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친구를 통하여 현대엔지니어링의 아산화력발전소 담당 PM 측에 이렇게 제안했다.

“그동안 건설된 한국의 발전소를 살펴보니 공장 건물만 웅장하게 지어 놓았지 환경문제나 지역주민들에게 대한 배려가 전혀 없어요. 일본만 하더라도 발전소를 공원화해서 환경 정화는 물론 지역주민들이 친근하게 발전소를 탐방하도록 해주고 있어요. 이번 프로젝트가 국내에선 처음으로 실시되는 ‘턴키 베이스’이니 귀사에서도 조경 부문에 한번 특별한 대안을 만들어 보시지요. 일단 저희가 공짜로 아산화력발전소 공원화 기본계획을 세워 드리겠습니다. 한전 측에서 관심을 가지면 제가 직접 한전에 출입하면서 현대엔지니어링 이름으로 설계를 마무리할 수 있도록 책임지고 일하겠습니다. 그리고 나중에 공사가 발주되면 그때 현대건설 측에 부탁해서 이런 회사(반도조경공사)가 그동안 우리를 도와주었다고 소개만 해주시면 그걸로 족합니다.”

이 제안이 그대로 수용돼 현대엔지니어링을 통해 국내 발전소 공원화 계획의 첫 작품을 설계할 수 있었고, 그리고 나중에 현대엔지니어링뿐만 아니라 한전 측에서도 도움말을 주어 현대건설이 아산화력발전소 ‘조경 및 준공대비공사’를 발주할 때 하도급 업체로 우리 회사를 우선순위로 채택해 주었다. 부끄러운 얘기지만, 그때 당시 업계에서는 면허도 없는 회사가 발전소 조경 같은 큰일을 한다고 시기하는 소리가 컸다. 그러나 현대 측이나 한전 측에서 모두 우리 회사의 실력과 성의를 최대한 인정하여 그 후 아산화력발전소뿐만 아니라 국내에서 건설된 원자력발전소, 화력발전소, 양수발전소 등 대부분의 발전소 조경 및 준공대비공사에 우리 회사가 협력사로 참여하도록 길을 열어 주었다.

#5.
1979년 대학원(1년 차) 학교 공부도 해야 하지만 또 한편 아산화력발전소 ‘턴 키’ 프로젝트는 내가 직접 제안하고 추진한 일이라 현대엔지니어링과 현대건설 토목부 및 한전 본사 출입과 현장을 뛰는 일도 (집사람을 대신하여) 내가 직접 주도적으로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보니 학교 공부가 태만해질 수밖에 없었다.

특히 한전 측 현장 소장이 주재하는 매주 월요일 공정회의에 참석하는 등 현장 출장이 많아져 실제로 학교 가는 일이 반도 못 됐다. 부득이 석사과정 일 년만 다니고 그다음 해(1980년)는 휴학을 하고 말았다. 그렇게 된 근저에는, 불교 철학의 학문적 공부가 비현실적으로 느껴질 만큼 발전소 건설 현장의 ‘일’을 통해서 체험하는 박진감 넘치는 ‘현실 상황’이 인생에 대한 철학적 이해를 높이는 데 더 큰 영향을 미쳤다고 하는 게 정직한 고백이겠다. 아무튼, 1월부터 한전 본사를 출입하여 설계를 확정한 후 3월 중순 현대건설로부터 하도급 업체로 선정돼 곧바로 공사 현장(아산화력1, 2호기 건설공사)에 투입된 지 반년 만에 1단계 공사를 마쳤다. 그런 과정에 그 일을 수행할 만한 전문적인 팀워크가 필요했는데, 그 팀워크를 멋지게 잘 짜고 관리한 것이 공사의 결과를 우수하게 만드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발전소 ‘조경 및 준공대비공사’의 주요 공정은 발전소 부지 전체의 식재 공사와 공원화 사업에 따른 환경시설 및 준공을 위한 부대시설공사를 망라하고 있었다. 이 모든 공정을 한 묶음 하여 ‘턴키 베이스’로 공사를 하였으니 도급업체인 현대건설뿐만 아니라 우리 회사가 받은 하도급 규모도 상당히 컸다. 난생처음으로 큰 공사를 맡았고 또한 수익금도 컸다. 그때 나를 도와서 우리 회사의 아산화력발전소 현장 소장으로 취임했던 분이 (지금은 돌아가셨지만) 박수현 소장이시다. 그는 남산미술원(동작동 현충원 구내 조각물 및 신세계백화점 앞 분수대 시공)에서 일한 부장급 요원 중의 한 사람이었는데, 아산화력발전소 분수공원을 기획, 설계하는 중에 조언을 구한 분으로 내가 만나본 인력들 가운데서 실무적으로 가장 뛰어난 실력자였다.

나는 그분을 우리 회사로 모셔 오기 위해 삼고초려를 마다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가 우리 회사에 참가한 이래(아마추어 직원들을 가르치고 훈련하면서) 발전소 준공대비공사 가운데 (식재 공사는 집사람이 주관했으므로 이 일은 빼고) 까다롭고 힘든 구조물 공사 및 환경시설 공사의 대부분을 맡아서 현장 소장 업무를 수행해 주었다.

지금 와서 돌이켜 보면 꿈같은 일이다. 천지도 모르고 덜컥 회사를 개업해 놓고, 대학을 갓 졸업한 아마추어 직원들을 데리고 한국 최대의 국가기관인 한국전력의 발전소 공사를, 그것도 (단종이라는 기초 면허도 없이) 한국 최대의 건설회사인 현대건설을 상대로 ‘턴키 베이스’로 게임을 벌려 성공적인 결과물을 도출해낸 그 초인적 발상(?)의 아이디어와 열정을 돌이켜 보니 그저 꿈같이만 여겨진다. 내가 자랑삼아서 하는 얘기가 결코 아니다.

고학위 출신이지만 일자리를 못 잡아 여기저기 기웃거리면서 봉급 많고 편하게 일할 수 있는 직장이 어디 없나 하고 배회하는 젊은 친구들에게 한마디 충고 겸 격려를 해주고 싶어서 하는 말이다. 마음에 드는 좋은 직장을 구하면야 천만다행이지만 만일 이도 저도 안 될 때는 차라리 맨땅에 헤딩하는 기분으로 창업을 해 보라고 권하면 어떨까? 그렇다고 무조건 막무가내로 준비 없이 하라는 얘기는 결코 아니다. 다음 몇 가지 항목을 창업의 기본원리로 삼아 뜻과 정성과 목숨을 다하여 한번 도전해 보라! 어차피 한번 사는 인생이 아닌가! 할 수만 있으면 (웬만하면) 빨리 짝을 구해 결혼하고, 그런 후 두 사람이 함께 손잡고 힘을 합쳐 자기 앞의 인생 고지를 향해 죽기 살기로 한번 부닥쳐 보라! 그러면 어느 날 반드시 그 고지의 꼭대기에 승리의 깃발을 꽂을 날이 찾아올 것이다. 그것을 자신의 힘으로 이루어 낼 수도 있겠지만, 혹시 어쩌면 하나님이 도와서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라는 그 격언을 이루어 주실 줄 누가 알겠는가!

불광동 언덕 위 막다른 골목에서 인생의 새길을 열어갈 수 있도록 인도해 주신 하나님께 먼저 감사드린다. 어릴 적에 만나 어렵사리 결혼하고 그 후 더 큰 고난과 시련이 와도 꿋꿋이 기도하며 삶의 기반을 지켜 준 집사람이 또한 더없이 귀하고 고맙다. 그렇게 흘러온 건설 인생의 주춧돌 겸 기업가 정신(Entrepreneurship)으로 내가 감히 주장하고 싶은 ‘창업의 원리’는 이렇다.

첫째, 일단 할 수 있다고 생각하라!
둘째, 자신의 적성과 여건을 최대한 활용하라!
셋째, 사업의 방향과 목표를 분명히 하라!
넷째, 팀워크로 도전하라. 끝까지 함께 하라!

필자소개
연변과학기술대학, 평양과학기술대학의 대외부총장, 한국기독실업인회(CBMC) 중앙회장 역임
현 참포도나무병원 이사장, 신아시아산학관협력기구 이사장, 북경대동북아연구소 객원연구원, (중국) 중앙민족대학 민박동학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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