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광호 기자가 만난 북녘땅-14] 정권 바뀌면 해외평통 구성인원도 거의 물갈이
[송광호 기자가 만난 북녘땅-14] 정권 바뀌면 해외평통 구성인원도 거의 물갈이
  • 송광호 재외동포신문방송편집인협회 고문
  • 승인 2020.12.28 1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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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은 어떻게 바뀌어왔으며, 또 어떻게 변화해 갈 것인가? 1989년 이래 북한을 8차례나 방문해 취재한 송광호 토론토 주재 언론인이 방북 때마다 보고 느낀 점들을 시리즈로 정리했다. ‘바뀌어온 북한’에 초점을 맞춘 이 글은 현재와 같은 남북경색국면에서 긴 눈으로 북한의 새로운 변화를 조망하는 데 도움을 줄 것으로 보인다.<편집자주>

함경북도 칠보산(함경도 금강산이라 칭함)

이산가족 관련 얘기다. 한번은 북 해외영접국 한 간부에게 물었다. 이산가족신청이 한창 쏟아져 들어올 때였다.

“오랫동안 헤어져 있던 가족들을 어떻게 다 찾습니까. 못 찾는 경우도 있겠지요?”
“아니요. 거의 다 전부 찾습니다. 이름과 나이만 정확하면 다 찾아요, 해당 지방에서 밤이 패도록(지새도록) 일일이 뒤져 찾지요.”

북한은 주거이전 자유가 없으니, 한국과는 다르다. 맘대로 이사를 할 수 없으니 사람 찾는 게 어렵지 않을지 모른다. 걸리는 시간도 꼬박 뒤지면 단시일에 가능하다고 한다. 사실 내 경우도 (북)강원도 산골(이천군) 외조모 조카를 하루 이틀 새 쉽게 찾지 않았던가. 그것도 방북 후 갑작스레 평양을 통해.

해외이산가족 경우 북의 친척을 만나고 온 뒤 심적 변화가 생긴 사람을 봤다. 가난한 북 가족을 지속해서 도와야 하는 경제적 이유만이 아니다. 고향을 다녀오고 후회하는 사람도 있었다. 오랜 세월 북녘 세상이 너무 달라져 있었던 것이다. 사람과 환경이 다 변했다며 다시는 고향을 안 가겠다는 것이다. 더구나 직계가족이 세상 떠난 경우는 더했다. 일부 이산가족 경우이기는 하나 답답하고 서글픈 현상이었다.

금강산 천선대(안내원과 함께). 외금강 만물상 전체가 보인다.

또 한 캐나다교포는 “북한에 가족을 만났는데 가끔 무슨 명절 때 (이곳 친북창구에서) 연락이 와요. 북 행사가 있는데 선물을 사 보내야 한다느니, 갑자기 큰물(홍수) 피해 등이 생겨 긴급구호금을 내야 한다는 등의 모금행위지요”라고 말했다. 꼭 강요는 아니지만 보통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응한다는 것이다. 만약 모금을 거부하게 되면 북한 친척에게 불이익 등 악영향을 줄 수 있을까 하는 염려 때문이었다. 평양 거주나 소위 좋은 북한 근무처를 가진 친척일수록 이에 신경을 썼다. 이 때문에 “북에 친척을 한번 만나고 온 이산가족은 코를 꿰게 된다”는 과장된 루머까지 나돌았다. 그러나 어쩌면 북에서 온 일반적 안내를 북미주 친북창구에서의 과잉 충성 행위일 수도 있었다.

내가 남북 관련 모임에서 경험한 지난 캐나다 교포사회 단면을 소개해보자. 지난 일을 새삼 따지자는 차원이 아니다. 잘잘못이 있다면 고쳐나가면 그만이다. 한국 관련해 비슷한 경우를 직접 겪었기 때문이다.

10여 년 전이다. 한국에 본부가 있는 해외기관들은 이북5도민회, 민주평화통일자문, 재향군인회 등 여러 단체가 있다. 이북5도회 경우 매년 3박4일 초청으로 한국방문을 했다. 이민1세, 2세 등으로 초청행사가 이어지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한국에서 항공권 등 모든 초청경비를 부담한다.

행사 진행 10년쯤 뒤에 나도 피초청자에 끼게 됐다. 당시 23명이 선발됐다. 그런데 방문자들을 식당에 불러놓고 초청설명회를 하는 가운데 1인당 4백달러(약 40만원) 씩 내야 한다는 것이다. 당시 대한항공 왕복요금이 1,100달러일 때였다. 단 한 명 불평하는 사람 없었다. 분위기상 혼자 공개적으로 돈을 언급하기 마음이 불편했다. 주관자인 한 간부에게 따로 물었다.

평양시내 거리

“내용이나 알고 돈을 냅시다. 왜 4백달러씩 걷는 거요?”
“아, 한국본부에 선물도 하고 인사를 해야지요.”

너무 한심하게 들렸지만 아무 소리 안 하고 지불했다. 토론토 고국방문단장도 이미 한국을 다녀왔던 도민회 간부였다. 2-3년 전 모처럼 토론토 평통자문위원(18기)이 됐다. 어느 단체 간부가 토론토총영사관에 새 평통 자문위원으로 나를 추천한 때문이다. 아마 내 방북 경험이 많으니 모임에 좀 도움이 될까 고려한 듯싶다. 온타리오주 1백여 명 평통 위원 명단이 비공식 발표된 후 고지서가 곧 날아왔다. 1인당 회비 5백달러였다. 한국 평통 자문본부에선 예산도 없나. 1백명 당 5백달러씩이면 적은 돈이 아니다.

얼마 후 첫 특별 초청강사를 초빙해 1박2일 특별강연을 듣는다고 참여하라는 연락이 왔다. 강사는 내가 아는 뉴욕 한인교포였다. 그는 평소 정치에 관심이 많은 강원도 출신이라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남북 관련해선 전혀 문외한인데 어떻게 초청 강사가 됐는지 의아했다. 아무튼 그런 걸 따지겠는가. 나만 빠지면 그만인걸.

회비만 보내고 그 후 모임에 일절 관여하지 않았다. 다른 일로 바쁘기도 했거니와 평통 모임은 내가 추측한 그런 남북 관련을 위한 모임이 아니었다. 교포사회 행사일이 거의 전부였다. 한 정권이 바뀌면 그 정치 색깔에 따라 교포 구성인원도 거의 물갈이 된다. 소위 토론토 지도자급 인사주축으로, 내겐 별개 세계에서 움직이는 봉사자들로 보였다. 내 친형제와 사촌 동생도 오랜 세월 토론토 평통자문위원이었다. 현재도 평통자문위원(19기)이다. 두 명 다 무슨 공을 세웠는지 대통령 표창도 받았다.

평양 겨울 여 전사(하위계급)
평양 겨울 여 전사(하위계급)

해외 동포사회에선 매년 여름 대한민국 훈장이나 표창 등 포상신청 기회가 주어진다. 예전 한번은 타 지역의 B노년회장 교포 한 분이 전화가 왔다.

“이번에 국민훈장 동백장을 받기로 됐어요. 원래 모란장 추천을 했다는데, 신청인이 많아 하나 아래인 동백장으로 됐다고 해요. 총영사관에서 양해해 달라고 연락이 와 그냥 괜찮다고 했지요.”
“아, 그래요? 축하드립니다. 대한민국 국민훈장 수상이니 가문의 영광이군요.”

그간 캐나다에만 약 20명 정도 한인교포가 모란장 등 각종 훈장을 탄 것으로 추정한다. 캐나다 약 20만 명 한인교포에 비해 20명 남짓한 국민훈장 수여는 결코 적은 숫자가 아니다. 무궁화장 빼고는 전부 받았다. 무궁화장/모란장/동백장 아래는 목련장, 그 밑에 석류장으로 5등급이다. 훈장 아래는 국민포장. 그다음이 대통령표창 등.

B회장을 30년 이상 알고 지내지만, 그가 화를 내거나 남을 나쁘게 평하는 걸 본 적이 없다. 그는 교회목회를 한 적이 없지만, 목사직도 갖고 있다. 늘 친절하고 사람이 좋은 분이다. 인간성 좋다고 무슨 국가 공적 없이 정부훈장까지 받는가.

아마 내가 모르는 다른 무슨 공적이 있나 해서 같은 지역 유명 교수인 C박사에게 전화했다. 마침 원고청탁 관련 문의할 일이 있었다. 그에겐 B 노년회장이 국민훈장을 타게 됐다는 얘기는 안 했다. 대화 도중 얘기가 나왔다.

평양 어린이 하교 길
평양 어린이 하교 길

“그곳 B 노년회장 잘 아시죠? 교포사회 평판이 어때요?”
“왜 갑자기. 그 사람 얘기는 하지 맙시다. 잘 몰라요.”

느낌이 무척 부정적이었다.

“왜요? 노년회 봉사 일이랑 많이 하시잖아요?” “하여튼 그 사람 얘긴 그만두자고요.”

C박사는 B회장보다 나이도 많고 이민생활도 길다. 무슨 사연이 있나 했지만 다른 대화로 끝냈다. 나중 알았지만 C박사는 자신이 직접 겪지 않은 사람에 대해선 남을 절대 쉽게 평하는 자체를 자제한다고 들었다.

교포사회에선 분명한 이유 없이 남을 폄훼하는 말을 종종 듣는다. 이런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이런 얘기를 길게 부연하는 이유는 나 역시 오래전 내 포상신청 경우가 회상됐기 때문이다. 그때 두 가지 건으로 내 공적 조서를 당시 유지은 토론토 부총영사에게 전달한 적이 있었다. 충분히 포상대상이라는 언질을 미리 받았기 때문이다.

평양 육아원 간판
평양 육아원 간판

하나는 러시아 상주 시 탈북자(벌목공 등)를 모스크바 유엔난민기구에 첫 등록시켜 창구개설로 그들을 한국으로 오게 만든 일이다. UN에 처음 등록한 당시 서류를 증거자료로 제출했다.

또 하나는 일제강점기 관동군에 징병, 징용된 당시 조선군 명단 약 6,400명을 모스크바 국립군사박물관에서 발굴한 공로였다. 한국정부로선 관동군 징병 관련 자료가 전무해 대단히 귀중한 역사자료발굴로 인정받고 있던 터였다. 이는 해외교포사회에서 무슨 봉사활동으로 국민훈장을 받게 되는 경우와는 차원이 달랐다.

그러나 약 2주 후 유 부총영사로부터 연락이 와서 만났다. 그는 본국정부에 신청조차 못 했다고 전했다. 이유는 교포사회 유지급 인사 네댓 명을 불러 교포 포상문제를 함께 논의했는데, 모두 내 정부 상신을 극구 반대해 부결됐다는 통보였다. 그들에게 “왜 송 특파원이 큰일을 했는데 포상을 반대하는 이유를 알려달라고 해도 전부들 묵묵부답”이라는 것이다. 다만 한 사람은 “송광호는 친북파 최홍희(태권도) 측근이라 안 된다”고 했다며 전했다.

도대체 토론토 유지가 누구란 말인가. 묻지도 않았지만, 그가 말해줄 리도 없다. 유 부총영사는 “과거 교포사회에 무슨 잘못한 것이 있었나요?”하고 오히려 내게 물었다. “80년대 초 나는 첫 교포일간지에서 기자 겸 광고국장을 맡았을 때 좀 극성스럽게 일했지요. 일간광고가 중요한데 텅텅 광고란이 비었으니, 무리했어요. 또 잠깐 영문백과사전 책 장사를 18개월가량 할 때도 그랬고. 토론토 조선일보 발행인으로 활동할 때는 임수경을 옹호해 교포사회에 좋은 인상을 안 주었을 테고. 그렇다고 일생 신용(돈)관계가 좋고, 스캔들 없고, 단 한 번 범죄행위가 없는데. 친북이나 오만하다는 등 성격상 결함 때문이라면 정말 억울하지요. 아예 그 토론토유지라는 사람들과 대면시키고 따지든지. 포상 문제란 개인 실적(공적)만을 놓고 가려야지요”하고 항변했지만 이미 늦었다. 다른 평판 좋은 봉사자를 결정해 상신했다고 했다. 유 부총영사와는 나중 과테말라 취재(동계 올림픽개최지 결정) 때 만났다, 그는 과테말라 대사로 부임해 있었다.

평양 애육원 화장실
평양 애육원 화장실

남북에서 갑자기 자연재해(산사태나 홍수 등)가 발생할 때 종종 있다. 그때 곤경에 처한 주민들을 돕는다는데 누가 뭐라고 하겠나. 같은 민족인데 도와야지. 2년 전쯤 한국에도 고성, 속초 등지에 큰 산불이 났다. 그때 토론토 강원도민 몇 명이 십시일반으로 5백만원인가 걷었고, 미주 애틀랜타 강원도민회는 4천만 원가량 모아 한국에 전달한 적이 있었다.

하루는 가까운 어느 이산가족 지인 집을 방문하니 일러준다. 그는 “평양에서 무슨 특별한 때라고 선물을 보내라고 해서 8백달러(80만원)짜리 물품을 구입해 보냈는데, 포장이 안 좋다.”며 “자기들이 따로 선물박스를 만들어 있다”고 연락이 왔다는 것이다. 예전부터 친북창구를 통해 이산가족교포들을 이용하는 경우가 있는 것을 안다. 그리곤 “세계 각국 어디에서 우리 위대한 위원장 동지를 흠모해 특별선물을 보내왔다”는 등 정치적인 선전을 해왔다. 요즘은 그러한 관행이 없어졌으리라 본다. 더구나 코로나19로 인해 모든 일이 중단상태지만 최근 그러한 행태는 들어보지 못했다.

만경대 혁명학원(김정일 모교)
만경대 혁명학원(김정일 모교)

평양에서 우연히 만났던 고교 선배 고 최건국 사장(독일 거주) 얘기를 잠깐 다시 언급한다. 그는 현대판 이산가족이기 때문이다. 부모 (최덕신/류미영 부부)만 월북해 살았지, 형제자매 등 다른 가족들은 서울과 미국, 독일로 흩어져 살았다. 한국에는 블랙리스트 명단에 올라있어 오랜 세월 출입금지상태였다, 그러던 중 독일에서 갑작스러운 폐렴으로 다시는 한국 땅을 밟지 못한 채 세상을 등졌다. 최 선배는 늘 대한민국 여권을 지니고 다녔다. “어떻게 아직 한국여권으로 다니시나요?” “그럼, 북한여권을 갖고 어딜 다닐 수 있겠어? 평양공항에서 두 번 한국여권으로 티격태격했지만, 문제는 없었네. 한국여권은 만료되니 다시 연장해 주더라고.”

나는 최 선배를 평양에서만 3번 만났다. 방북 때면 독일로 먼저 전화해 가능한 선배의 방북 스케줄과 맞추려 했다. 내가 취재 기사를 평양에서 팩스로 독일 최 선배께 보내면 그는 동시에 한국으로 중계해줬다. 그는 성격이 원만했고 통이 컸다. 그래서 고 이건희 삼성 회장도 동기동창인 그를 삼성 간부로 불러들인 것 같다. 나중 부모월북 등 집안 환경이 급변하자 스스로 회사를 물러났다. 최 선배를 70년대부터 잘 아는 뮌헨에 거주하는 남정호 전 한국일보 독일특파원(82)은 “최 형이 타계하기 전에도 프랑크푸르트인 그 집에 놀러 가 며칠 자고 올 정도로 독일에서 가까운 사이였다”며 “집안이 빨갱이라고 주위에서 전부 멀리했지만, 그는 참 아까운 인재로 일찍 세상을 떠나 그립다”고 애석해했다.

평양 겨울 군밤과 군고구마 인기<br>
평양 겨울 군밤과 군고구마 인기

팩스 얘기다. 캐나다에서 기자 생활을 시작할 1981년 때 처음 팩스가 사용했다. 한국에 칼라TV가 80년 말 등장할 즈음이었다. 북한에는 80년대가 다 지나도록 팩스가 없었다. 그러나 칼라TV는 북한이 한국보다 먼저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모스크바 특파원 때는 수년간 팩스만으로 기사 송고를 했다. 지금이야 팩스는 고물단지가 되고 거의 활용을 하지 않지만, 그때는 인터넷이 나오기 전이라, 팩스가 절대적이었다.

이산가족 찾기가 한창일 1980년-90년대 초부터 북한간부들 연령층이 젊어지기 시작했다. 김정일 위원장이 정권인수 준비를 하면서 세대교체를 시도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당시 청년 세대 1기생으로 처음 선발됐다는 한 토론토 탈북자 제1호가 알려줬다. 그래선지 평양에서 40대 중반 이후 간부들을 차츰 찾기 힘들어졌다. 그때는 김일성 주석보다 김정일 위원장 면회가 북에서 더 만나기 힘들었다고 한다. 당시 일본 조총련 한덕수 의장이나 최홍희 태권도총재 등 해외 거물인사도 방북 즉시 김 위원장을 만날 수 없었다. 더구나 북한경제가 하향곡선을 긋고 있을 때라 평상시 분위기가 아니었다. 그래도 정권이 3대로 승계된 지금처럼 공포정치는 느껴지지 않았다.(계속)

필자소개
강원도민일보 북미특파원, 재외동포신문방송편집인협회 고문
대한민국 인권상 수상, 관훈클럽 국제보도상 수상, 한국신문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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