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광호 기자가 만난 북녘땅-17] 모스크바 특파원 시절 두 전직 대통령 만나
[송광호 기자가 만난 북녘땅-17] 모스크바 특파원 시절 두 전직 대통령 만나
  • 송광호 재외동포신문방송편집인협회 고문
  • 승인 2021.01.18 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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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은 어떻게 바뀌어왔으며, 또 어떻게 변화해 갈 것인가? 1989년 이래 북한을 8차례나 방문해 취재한 송광호 토론토 주재 언론인이 방북 때마다 보고 느낀 점들을 시리즈로 정리했다. ‘바뀌어온 북한’에 초점을 맞춘 이 글은 현재와 같은 남북경색국면에서 긴 눈으로 북한의 새로운 변화를 조망하는 데 도움을 줄 것으로 보인다.<편집자주>

94년 김영삼 대통령과 조찬 모스크바 특파원단(맨왼쪽 송광호)

내가 한국 야당의 대표적인 두 지도자(김영삼, 김대중)를 만난 것은 모스크바 초대 특파원시절이었다. 김대중씨는 야인()상태였고, 김영삼씨는 당시 대선에 승리해 대통령이 되고 난 뒤였다. 그때 대선에서 떨어진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은 모스크바 이즈마일로보 벼룩시장(주말시장)에서 우연히 마주쳤다. 정 회장은 왠지 벼룩시장 한복판에 측근 없이 홀로 서 있었다. 구소련 붕괴 후 1992년부터는 매년 한국의 내로라하는 정, 재계, 학계 등 유명인사들이 지속적으로 러시아를 방문하던 시기다.

김대중씨는 1992년 3번째 대선도전에 또 실패하자 아예 정계은퇴선언 후 영국 케임브리지대학(객원연구원)에 체류할 때였다. 내 머릿속에 ‘김대중’이란 이름은 과거 40대기수로 정치계에 새바람을 일으켰던, 당시 박정희 정권에 맞섰던 쟁쟁한 야당대선후보로 각인돼 있었다. 그러한 김 후보에 열광했던 내 20대 지난날이 회상됐다. 나는 1975년 훌쩍 토론토로 가족이민을 떠나 버렸기에 그 후 한국 정계흐름은 잘 파악 못 했지만, 모스크바에서 양 김 씨와의 만남은 새로운 궁금증을 자아냈다. 김대중씨는 내 특파원시기 모스크바를 3번 방문했다. 국립모스크바대학교에서 명예박사학위 관련해 자주 왕래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는 방문 때마다 우리특파원단에 미화 3천 달러 촌지(기부금)를 주었다. 또 우리(10명 특파원)들을 호텔로 초대해 늘 식사와 함께 오랫동안 담소를 나누곤 했다. 3번째 방문 때는 특파원들끼리 3백 달러씩 나누어 가졌다. 환담 중에 한 특파원이 “총재님, 이제 정말 정치계는 완전 담을 쌓으신 겁니까. 혹시 다시 정계로 돌아갈 마음은 없으신가요?”하고 물었다. “담 벽이야 무너뜨리면 그만이지만, 내 마음은 무너뜨릴 수 없소. 절대로 변하지 않소,”하고 자신 있게 답했다. 그는 노회하고 박학다식한 정치가로 보였고, 임기응변도 능한 정치인으로 생각됐다. 김대중과 김영삼 두 정치지도자의 스타일이나 성격은 확연히 달랐다.

모스크바 겨울

김대중씨가 대통령에 당선되고 난 후 그에 대한 평소 존경심은 점차 부정적으로 변했다. 소문대로 ‘행동하는 양심’인지, ‘행동하는 욕심’인지 구별도 쉽지 않았다. 캐나다이민생활 중 고국의 새 대통령이 당선될 때마다 한인교포사회는 잠깐 술렁거리나 곧 조용해진다. 그러나 김대중 대통령 당선 때는 교포사회가 정말 요란했다. 10여명 교포들이 아예 보따리를 싸고 역이민으로 한국에 들어갔다. 들려오는 말이 이권을 찾아 꽤 재미를 본다는 소문이었다. 그들 중 한 명인 C씨는 전라도 한 지역에서 공천받아 국회의원에 당선되기도 했다. 정말 당적에 따라 ‘막대기만 꽂으면 국회의원에 당선된다’는 말이 실감됐다. C씨는 두 번째 의회선거 때는 공천이 안 되자 다른 당적으로 출마해 실패했다. 나는 김대중 대통령이 정의롭고 숱한 역경을 이겨낸 백전노장으로만 생각했다. 그러나 기대가 크면 실망 또한 컸는지 모르지만, 예전 한때의 존경심은 눈 녹듯 사라져 버렸다.

러시아 국빈방문에 초청된 김영삼 대통령은 순진하고 좀 어수룩하게 느껴졌다. 평생 부잣집 도련님환경에서 살아온 우여곡절이 많은 정치인으로 알고 있다. 김영삼 대통령은 크렘린 궁전에서 특파원들과 조찬을 가졌다. 우리들은 대통령과 비교적 자유롭게 대화를 나누었다. 나는 한국 관련해선 특히 공적인 자리에선 듣기만 하는 편이다. 오랜 세월 캐나다에서 생활했기에 한국정치, 사회문제 등을 논하기에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또 주요간담회 자리는 늘 질문자가 넘쳐나기 마련이다. 김 대통령과 특파원과의 대충 질의문답이 끝나갈 때, 내 앞에 앉은 동료특파원이 “송 선배도 한마디 해요”하고 거들었다.

사할린을 취재했을 때 한인교포(고려인)들의 한 맺힌 목소리가 생각났다. 국적문제를 꺼냈다. “우리 한국정부에서는 이중국적문제 관련해 어떤 구체적인 계획이 있나요?”하고 물었다. 김 대통령은 “국적이 하나도 없는 사람도 있는데, 무슨 국적이 두 개씩이나 필요하겠나”며 일축해 버렸다. 당시 너무 앞서가는 질문이었는지 모른다. 아무 의미도, 청사진도 없다는 뜻으로 들렸다.

모스크바  국회

아무튼 세월이 지난 오늘에 와서는 상당수 북미 거주 교포노년층들이 이중국적자로서 한국을 오고 간다. 만 65세가 넘으면 신청 후 먼저 한국 거소증(3년 유효기간)을 받고, 다음 이중국적신청 때 한국여권도 취득된다. 나는 매년 한국 언론행사로 자주 들락거리면서도 장기체류가 힘들어 꾸물거리다 코로나19로 인해 기회를 놓친 상태다.

김영삼 대통령은 6월 초 3박4일간 러시아 국빈자격방문을 끝내고, 약 2달 뒤엔 7월25일부터27일까지 3일간 평양에서 김일성 주석과 남북정상회담이 합의돼 있던 시점이었다. 회담 2주 정도 앞두고 갑자기 김 주석이 7월8일 묘향산에서 심장병으로 사망했다. 정상회담은 무산된 채, 북한 조평통(조국평화통일위원회)에선 남한조문단을 환영한다고 담화를 발표했다.

미국 빌 클린턴 대통령은 김일성사망에 애도를 표하고, 미 갈루치 북미회담 대표가 주 제네바 북한대표부 분향소를 찾아 헌화했다. 정작 정상회담 당사자였던 김영삼 정부는 달랐다. 조의, 조문을 거부하고 애도표명도 허용 안 했다. 호칭도 통칭 부르던 대로 김일성 주석이 아닌 과거 김일성으로 되돌아갔다. 북한 노동신문은 “남조선의 조의는 고사하고 애도표시마저 않는 것은 상식 이하 불손하고 무례한 행위”라고 맹비난했다. 개인적 소견이지만 ‘아무리 상대가 적이라도 약속한 회담 직전 갑작스레 상대방이 죽으면 최소 애도표명은 하는 게 상식이고 예의’라고 본다. 미국도 애도를 표했는데, 김영삼 대통령이 이를 완전 무시한 것은 현명치 못한 처사 같았다. 이후 남북관계는 더욱 냉랭한 기류가 형성됐다. 사할린 얘기로 돌아간다. 당시 이스라엘 경우와 비교해 본다.

사할린 수도 유지노 사할린스크 승리의 광장<br>
사할린 수도 유지노 사할린스크 승리의 광장

1992년 특파원발령 후 첫 취재 방문한 곳이 사할린 땅이다. 사할린주에는 약 3만 명의 한인동포들이 살고 있었고, 절반 이상 수도 유즈노사할린스크에 몰려 생활했다. 그들은 러시아대륙 고려인들과 달리 일제강점기 탄광취업 등 근로노동자로 와서 귀국하지 못한 한인들이 많았다. 구소련이 붕괴되자 사할린교포들은 꿈에 그리던 귀향을 학수고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 교포들은 국적조차 불투명한, 좌절된 상태로 한이 맺힌 또 하나의 제1세 이산가족일 뿐이었다. 무국적자 신세로 한국정부는 결코 해결점을 풀지 못했다.

그때 구소련 붕괴와 함께 같은 상황에 처했던 이스라엘 정부의 유대인 송환문제는 대처능력이 사뭇 달랐다. 이스라엘 정부는 소련 땅의 동포유대인들의 본국 송환을 100% 수용키로 전격 결정 내린 것이다. 당시 이스라엘 정부정책은 대단한 결단이었다. 소련 유대인 귀향 인구만 무려 1백만 명이나 됐기 때문이다. 천문학적 숫자였다. 한국과는 견줄 수조차 없었다.

더구나 이스라엘 면적은 남한 크기의 5분의 1밖에 안 된다. 강원도 땅덩어리만 하다. 또 엄청난 수의 동포이주민을 먹여 살리기 위해 미국 등지에서 차관까지 끌어다 썼다. 본토 동포들도 힘을 합쳤다. 이스라엘은 내 모스크바시절 1인당 국민소득이 1만7천 달러였고, 한국 경우 1만2천 달러정도였다. 최근 통계는 그들 개인소득이 4만1천 달러가 넘는다. 한국도 1인당 소득 3만 달러를 넘어섰지만, 한국은 조막만한 이스라엘에 정신, 물질 측면에서 상당히 뒤처져 있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미국 3대 주간지인 US뉴스 & 월드리포트는 지난해 코로나19기간 중 <세계국력 Top 10> 국가순위로 7위 일본, 8위 이스라엘, 9위 한국이라고 밝혔다. 1위는 미국이다.

북한 애국열사릉
북한 애국열사릉

한국은 특히 고질화된 교육제도의 침체로 인해 미래가 밝게 보이지 않는다. 지금 한국은 검찰개혁도 중요하겠지만 진작 선행돼야 할 점은 ‘교육개혁’이라고 본다. 캐나다 교육제도와 한국 교육 시스템을 돌아보면 아쉬운 점이 한둘이 아니다. 어린 시절부터 나는 한국교육자에 대한 불신과 기득권을 쥐고 있는 그들만의 반칙이 머리 한구석에 남아있다. 지금은 개선되었기를 믿지만 1960년대 학교 교사 되기가 쉬웠다. “하다하다 잘 안되면 학교 선생이라도 하지”라는 말이 주변에 돌았을 정도였다. 60년대 초까지는 고교(사범학교)만 나와도 초교 교사생활이 가능했고, 1962년 처음 2년제 교육대학이 신설된 것으로 알고 있다. 대학시절엔 무슨 학과를 전공했든 4년간 교육학을 선택과목으로 이수하면 어느 대학이라도 중등 준교사증이 나오던 시대였다.

이번 17편은 북한 얘기는 잠깐 내려놓고, 18편에서 다시 시작키로 하겠다. 이번엔 내 학창시절 경험한 교육자 관련한 개인적으로 겪은 얘기다.

나는 해방 이후 서울 중구 한복판(예장동)에서 태어났다. 6.25전쟁 시 부산 피난 생활 2년을 빼곤 서울 밖을 떠나본 적이 없다. 고향 하면 내 귀엔 늘 도시소음과 먼지, 전차소리만 생각난다. 부산시절 임학시험을 보고 초등학생이 됐다. 학교는 약 6대1 경쟁으로 특수귀족학교나 다름없었다. 국립 서울사대부속 국민(초)교. 한 학년에 2개 반만이 있었다. 전쟁시절이라 다른 일반학교들은 학급수도 많고 콩나물시루처럼 학생들이 바글바글할 때다.

북한 손전화기

초교동기생으론 대한민국 거물급 군 장성, 정치, 재계, 교육계 등 자녀들 모두가 모인 듯했다. 군번1번 이형근대장, 원용덕장군, 백선엽장군 동생 백인엽장군 장녀 백남옥(서울대 음대교수), 이호 법무부장관, 농림부장관, 한국은행총재 아들 등이 전부 초교동기들이다. 영풍그룹 장형진(현재 회장), 서울대학교 총장 아들 역시 동기생이다. 조선일보 사주 방 회장 두 아들도 초교후배였고, 박정희 장군은 정권을 잡은 이후 박지만이 부속초교에 첫 입학했다. 사대부속초교는 매년 서울운동장을 빌려 전교생 운동회를 했고, 수학여행 때는 경주 불국사를 다녀왔다.

나는 공부를 안 하고 놀기만 좋아했다. 대신 구기운동이나 잡기()놀이, 달리기를 아주 잘 했다. 운동회 때는 늘 릴레이선수로 뽑혀 학년 반 대표였다. 빤빤히 놀다가도 시험을 앞두고는 당일치기로 며칠 밤새워 겨우 상위그룹(10등 남짓)을 유지했다. 이후 상위성적 순위는 서울사대부중/고교 때도 거의 변하지 않았다. 초교 6년 때는 남학생이 두 반으로 성적순으로 앉았다. 한 줄씩 1등에서 8등까지, 다음은 9등에서 16등. 17등에서 24등. 이런 식으로 성적순 8명씩 한 줄에 키순서대로 앉았다. 이 때문에 동기생들 성적이 밖으로 드러나 누구든 쉽게 상대 학업 실력을 알 수 있었다.

당시 서울 사대부중은 특차였다. 특차는 1차보다 먼저 입학시험을 치루고, 시험결과 발표 전 1차 학교시험이 시작된다. 부속초교는 국립이라 무시험(입학)제도가 있었다. 그때 사대부중에서 지정한 한차례의 모의고사 성적만으로 무시험합격자 당락을 가렸다. 그때 초교 20여명 동기생들은 전부 무시험에 통과된 듯했다. 나만 떨어져 화제대상이 됐다. 초교 측은 내 탈락이란 생각조차 않았다한다. 다른 동기생들보다 단연 평소성적이 앞서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정식 입학시험을 치루고 부중에 들어갔다. 그때 부속초교 동기생들은 거의 4군데 학교로 나뉘어 입학시험을 치렀다. 특차 서울사대부중 외에, 1차 경기, 서울, 경복중학 등이다. 중상위권에 속한 초교동기생들은 거의 경기중학을 선호했다. 별로 성적이 안 좋았던 동기생 한 명이 경동중학에 입학한 것으로 기억한다. 사대부중 반 I.Q 테스트결과가 130으로 기억된다. 1965년 고교졸업당시 경기고교와 서울고교 수석졸업자가 부속초교 동기생이었다고 전해졌다. 내 오랜 옛 시절 추억을 토로하는 것이니 학교 관련 글에 거부감이 있다면 깊은 해량 있기를 바란다.

나진 해외동포 치과봉사

문제는 당시 초교졸업 때 반에서 중하위권에 속했던 서너 명 동기생이 경기중학에 입학한 사건이다. 더구나 그들 부모는 군 장성이나 정치권 등 권력층 인사가 아니었다. 전부 초교교사 등 교육자들이라 놀랐다. 그때 처음 한국교육자들의 묵인된 ‘반칙’을 알게 됐다. 교육자들 자녀 경우 특혜를 허용한다는 규정은 불법사항은 아닌지 몰라도 내게 그건 분명 반칙이었다. 65년 고교에서 대학에 입학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서울대 입시 경우 부모(직계)가 서울대 교수이면 역시 서울대학교에 특혜입학이 됐다. 그것도 서울대 의대, 공대 등 보다 입학이 어려운 단과대학으로 들어갔다. 내 고교동기 가운데 10명이 그 혜택을 입었다.

1960년대는 서울에서도 돈만 내면 다닐 수 있는 대학들이 즐비했다. 또 고교만 졸업하고 4급이나, 5급 공무원(당시 직급)이 되기란 쉬웠다. 대학을 안 가고, 혼자 따로 고시공부를 해서 사법고시에 붙는 수도 있었다.(사실 내 고교졸업생들은 그러한 내용을 전혀 몰랐다. 누구든 대학에 진학해야만 한다는 일념뿐이었지, 그런 정보나 내용을 몰랐다.) 우물 안 개구리 식이었다. 학교는 다르지만 그 시절 대표적인 예가 노무현이다. 그는 부산상고를 나와 고시공부에만 치중해 고졸학력 변호사가 되고, 대통령까지 되지 않았는가.

6.25당시 폐허가 된 평양

나는 첫해 서울대를 지원했다가 실패한 후 이듬해인 1966년 서강대에 입학했다. 그해 많은 고교동기들이 재수를 통해 서울대에 들어갔다. 상대와 공대가 많았다. 나는 서강대 2년 때 중퇴하고, 대기업노무자 일을 했다. 당시 고교동기 한명이 서울대 문리대를 중퇴하고, 서강대 신입생이 된 친구도 있다. 그는 나중 한국은행에 입행해 박사학위도 따고, 상당한 직위까지 올라갔다. 당시 서울대, 서강대, 이화여대 3개 대학만이 편입학을 허용 안 했다. 다른 대학들은 편입학이 가능했다. 1차 대학에 떨어지면 2차 대학에 다니다 연세, 고대 등 1차 대학으로 옮기는 경우다. 한 고교동기는 서울대에 떨어지자 2차 경희대에 입학했다가, 2학년 때 편입시험으로 고려대로 옮기는 경우를 봤다. 또 당시 한때는 고려대 경우 법대와 상대를 제외하곤 나머지 학과는 2차에 속했다. 이렇게 시대에 따라 대학상황도 상당히 달라지고 있었다.

1966년 외국어대학에 일본어과가 새로 신설됐다. 대한민국 대학교들 중 정식으로 첫 개설된 일본어과였다. 친했던 고교동기가 함께 시험을 보기를 원했다. 그는 얌전했는데 당구를 무척 좋아했다. 고교 시절 당구 4백점 이상을 쳤다. 결국 나는 그와 함께 시험을 치르기로 약속했다. 20명인가 뽑는데 입시생들이 엄청 몰렸다. 내 수험번호는 1915번, 그는 1916번 바로 옆자리였다. 시험과목은 영어, 국어, 국사 등 세 과목으로 모두 4지선다형 문제였다. 다만 국어에서 다섯 개 단어 한문쓰기, 영어도 다섯 문제가 주관식이었다. 한자쓰기는 늘 자신 있었고, 영어문제 또한 쉬운 편이었다.

무난히 둘이 다 합격했다. 그러나 나는 외대를 포기하고 서강대 역시 중도에 포기했다. 일단 학교 얘긴 여기서 끊는다. 다음호엔 북한 관련한 기초내용부터 글을 이어갈 것이다.

필자소개
강원도민일보 북미특파원, 재외동포신문방송편집인협회 전 대표
대한민국 인권상 수상, 관훈클럽 국제보도상 수상, 한국신문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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