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호의 역사이야기] 고양구 서오릉 탐방기(1)
[이동호의 역사이야기] 고양구 서오릉 탐방기(1)
  • 이동호 월드코리안신문 명예기자
  • 승인 2021.01.20 09:5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조선 왕조 500년 역사에 제일 오랫동안 제왕의 자리에 있었던 숙종의 능이 있는 서오릉을 찾아보기로 하고 길을 나섰다. 한양 동쪽에 동구릉이 있으면 한양 서쪽에는 서오릉이 있던 셈이다. 서오릉에 제일 먼저 묫자리를 잡은 임금은 8대 예종과 안순왕후 능인 창릉이다. 물론 예종의 형인 의경 세자(후에 덕종으로 추존) 묘를 13년 전에 이미 조성했지만 어쨌든 서오릉은 덕종·예종의 아버지인 세조가 미리 봐 놓았던 묫자리라고 보면 된다. 그 후 210년이 지난 뒤 숙종의 첫 번째 왕비인 인경왕후를 익릉에 모시고 두 번째 왕비인 인현왕후를 명릉에 모실 때 쌍릉으로 자신의 묫자리도 정하면서 명릉이라 칭했다. 숙종 자신이 명릉에 묫자리를 잡은 야사가 전해진다.

사료가 밝히는 사실과는 거리가 있지만, 숙종의 능이 이곳으로 정해진 연유와 관련한 재미있는 일화이다. 숙종이 하루는 평상복을 입고 민심을 살피기 위해 궐을 벗어나 어느 냇가를 지나가고 있었다. 그때 냇가에서 한 젊은이가 울고 있는 것이 보여 연유를 물으니, 갈처사라는 유명한 지관이 이곳에 무덤을 쓰면 좋다고 해서 땅을 파는데, 아무리 파도 물이 고이니 어쩔 줄을 모르겠다는 것이었다. 숙종은 그 지관이 장난을 쳤다고 여기고, 젊은이를 불쌍히 여겨 관청에 가서 쌀 300석을 받아올 수 있도록 적은 서신을 쥐여주었다. 그리고는 지관이 사는 허름한 오두막집을 찾아가 청년의 일을 따져 물었다. 그러자 지관은 “모르면 잠자코 계시오. 저 땅은 무덤 자리로 들어가기도 전에 쌀 300석을 받고 명당자리로 들어가는 자리라오!”라며 따져 묻는 숙종에게 오히려 핀잔을 주었다. 그의 신통함에 놀라 자신이 국왕인 것을 밝히고, 훗날 숙종이 묻힐 묫자리를 골라 달라고 부탁했다. 전해지는 일화에 따르면, 지금의 명릉 자리가 바로 신통한 지관 갈처사가 택한 입지라고 한다. 그러나 숙종 대 이후 경종, 영조 대에 이르기까지 왕손이 귀한 형국이어서인지 꼭 명당이라 칭하기는 부족한 듯싶다.

1. 명릉(明陵·숙종과 인현왕후·인원왕후)

서오릉 정문을 들어서면 바로 명릉이 나타난다. 정자각 바로 뒤쪽으로 보이는 쌍릉에서 왼쪽이 제19대 숙종, 오른쪽이 두 번째 왕비 인현왕후 능이다. 그리고 왼쪽 둔덕에 세 번째 왕비 인원왕후 능이다.

♧숙종(肅宗) 이야기♧

숙종(음력 1661년 8월15일~1720년 6월8일)은 18대 현종과 명성왕후 김씨의 아들로 1661년(현종 2)에 적장자(조선 시대에 정실부인의 첫 번째 아들을 적장자로 부름)로서 경덕궁 회상전에서 태어났다. 현종의 아버지 17대 효종도 적장자여서 19대 숙종은 적장자의 적장자로서 로열패밀리였다. 숙종은 1667년(현종 8)에 왕세자로 책봉됐고, 1674년에 14살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 14살의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올랐으나 총명하고 영특하여 수렴청정을 받지 않았다. 숙종은 46년간 장기집권하면서 3번의 친위쿠데타인 환국 정치를 통해 피의 숙청을 단행했다.

재위 기간 동안 1680년에 경신환국(유악(油幄) 사건으로 남인에서 서인으로 정권 교체), 1689년에 기사환국(경종 탄생으로 원자 칭호 문제로 서인에서 남인으로 정권 교체), 1694년에 갑술환국(인현왕후 복위 문제로 남인에서 서인으로 정권 교체)으로 서인과 남인 정권을 이용하여 강력한 왕권을 확립했고, 전국적인 대동법(大同法) 시행과 양전(量田)의 시행, 화폐 주전을 통용하는 등 경제정책에 전력을 다했다. 1712년(숙종 38)에는 백두산정계비를 세워 국경선을 확정시켰고, 2대 정종의 묘호 추숭과 단종과 정순왕후의 복위, 소현세자빈 강씨를 복위, ‘선원록’ 작성 등 왕실의 기강을 확립했다. 그 후 1720년(숙종 45)에 경덕궁 융복전에서 60세로 세상을 떠났다. 숙종의 일대기로 보면 정치는 뛰어나게 했으나 가정사가 정치에 얽매이는 처복도 없고 자식복도 없는 파란만장의 일대기라 할 수 있다. 숙종은 세 분의 왕비와 여섯 분의 후궁 사이에서 세 아들만을 두게 됐는데 세 아들 모두 후궁들에게서 낳게 되고 이 중 두 아들 경종과 영조가 정비의 양자로 입적시켜 왕위에 오르게 된다.

♧인현왕후(仁顯王后) 이야기♧

숙종의 두 번째 왕비 인현왕후 민씨(1667년 4월23일~1701년 8월14일)는 본관이 여흥인 여양부원군 민유중과 은성부인인 송씨의 딸로 1667년(현종 8)에 반송동 사저에서 태어났다. 숙종의 첫 번째 왕비가 세상을 떠나자 1681년(숙종 7)에 왕비로 책봉됐다. 당시 조정은 당파 간의 분쟁이 한창이었는데, 왕실의 여인들이 중심이 되어 암투가 벌어졌던 상황으로, 1689년(숙종 15)에 숙종의 후궁 장씨가 왕자(경종)를 낳자 원자(元子) 책봉 문제로 서인과 남인이 대립이 있었다. 이 일로 기사환국이 발생하여 남인 정권이 들어서자 왕비의 자리에서 폐위되어 출궁됐다. 하지만 1694년(숙종 20)에 복위 운동 문제로 갑술환국이 발생하면서 서인 정권이 다시 들어서자 왕비로 복위됐다.

이때 나온 소설이 ‘사씨남정기(謝氏南征記)’라는 소설이다. ‘사씨남정기(謝氏南征記)’는 조선 시대의 문신이자 소설가인 김만중이 그의 말년에 유배지에서 쓴 한글 소설이다. 소설의 주인공 사씨는 성품이 곱고 후덕한 인물이지만, 남편 유연수의 교활한 첩 교씨의 모함을 받아 결국 내쫓김을 당하게 된다. 유연수의 첩 교씨가 아들을 낳은 후 정실부인이 되기 위해 갖은 계략을 꾸미며 그녀를 몰아낸 것이다. 소설은 한림학사 유연수의 처 사씨의 바른 품행과 그녀를 시기하는 악한 첩 교씨가 그녀를 음해하기 위해 꾸미는 악행들, 그리고 소설 끝에 가서는 누명을 썼던 사씨가 귀양지에서 돌아오고 악행이 들통난 교씨는 처형당하는 권선징악 구조의 내용을 다루고 있다.

이는 숙종의 인현왕후 폐위 사건을 모델로 당대의 현실을 소설화한 것으로 서인이었던 김만중은 이 소설로서 인현왕후를 폐위하는 것이 부당함을 밝히는 의도로 지었으나, 끝내 인현왕후가 복위되는 것을 보지 못한 채 유배지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 후 1701년(숙종 27)에 창경궁 경춘전에서 35세로 세상을 떠났다. 인현왕후가 세상을 떠난 후 희빈 장씨가 인현왕후를 저주한 죄가 드러나 무고의 옥(신사옥사)이 일어나기도 했다. MBC 드라마 ‘인현왕후전’에서 기억에 남는 장면들이 생각난다.

숙종이 인현왕후를 쫓아낼 때는 가마도 도착하지 않았는데도 “빨리 나가라”면서 버선발로 내보내는 장면, 인현왕후가 5년 만에 복위됐지만 못된 남편(숙종)을 둔 탓에 마음고생 하며 시름시름 앓다가 7년 만(1701년)에 승하하고 마는 장면.

숙종은 한때는 죽고 못 살았을 정도로 아꼈던 희빈 장씨에게 사약을 먹여 죽일 때 이런 말을 하는 장면 “이 약을 상으로 알고 받으라”고…. 그것도 모자라 장씨의 입을 강제로 벌린 채 세 사발이나 들이붓는 장면“빨리 먹이라!” 하면서, 숙종이 희빈 장씨의 죄를 물으면서 “다시는 후궁이 중전의 자리에 오를 수 없게 하라”(숙종실록·1701년)는 명을 내리는 장면, 이래놓고 자신은 1702년(숙종 28년) 당시 15살의 인원왕후(1687~1757)를 세 번째 정부인으로 맞이하게 된다.

♧인원왕후(仁元王后) 이야기♧

숙종의 세 번째 왕비 인원왕후 김씨(1687년 9월29일~1757년 3월26일)는 본관이 경주인 경은부원군 김주신과 가림부부인 조씨의 딸로 1687년(숙종 13)에 순화방 사저 양정재에서 태어났다. 숙종의 두 번째 왕비가 세상을 떠나자 1702년(숙종 28)에 왕비로 책봉됐다. 왕비로 있을 때 천연두와 홍역을 앓아 위기를 넘기기도 했다. 1720년에 경종이 왕위에 오르자 왕대비가 됐으며, 1721년(경종 1)에 연잉군(영조)을 왕세제로 책봉시키고 양자로 입적했다. 경종 연간에 있었던 노론과 소론의 대립인 신축임인옥사(신임옥사)에서 생명의 위협을 받은 영조를 끝까지 보호해 주었으며, 1724년에 영조가 왕위에 오르자 대왕대비가 됐다. 그 후 1757년(영조 33)에 창덕궁 영모당에서 71세로 세상을 떠났다.

인원왕후가 궁중 생활을 기록하여 엮은 ‘선군유사(先君遺事)’와 ‘선비유사(先비遺事)’가 세간에 소개됐다. ‘선군유사"는 아버지에 관한 회상, ‘선비유사’는 어머니에 관한 회상을 말한다. ‘선비유사’에서 그녀는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궁 안에 머무르시면 새벽에 일어나시어 문밖에 오셔서 내가 잠에서 깨기를 기다리시고 내가 청하여 “누운 자리에 들어오소서” 하면 “황송하노라” 사양하시고, 내가 청하여 자리를 한 가지로 하고자 하면 반드시 머뭇거려 사양하셨다. 이 두 권의 기록에서 인원왕후는 궁에 들어와 부모님을 그리는 마음과, 중전으로서 부모님과 사사로운 정을 나눌 수 없음을 안타까워하는 마음을 잘 드러내고 있다.

‘선군유사’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도 보인다. 15세에 이르되 항상 무릎에 두시고 이마를 어루만져 잠깐도 버려두지 않으시더니 내가 이 지위에 오르자··· 내가 그 좌석이 너무 멂이 민망하여 가까이 옮겨가고자 하면 아버지께서는 종종걸음으로 물러나 사양하셔서 내가 감히 사사로운 정을 펴지 못했다. 훗날 인원왕후는 이 기록을 친정으로 보내 사람들에게 귀감이 되도록 했다. 이 두 권의 문집과 더불어 발견된 세 권의 문집은 인원왕후가 노년에 썼을 가능성이 크며, 단아하고도 기품 있는 글솜씨가 당시 그녀의 학문과 독서의 깊이를 가늠할 수 있게 해준다.

2. 수경원(綏慶園·추존 장조 생모 영빈)

수경원(사도세자 생모 영빈 이씨의 묘)의 전경. 재실 옆길에 조금만 오르면 단출히 자리해 있다. 1764년(영조 40)에 영빈 이씨가 세상을 떠나자 양주 연희궁 대야동(현 서울 서대문구 신촌동 연세대학교)에 의열묘(義烈墓)라는 이름으로 묘를 조성했다.

♧영빈 이씨(暎嬪 李氏) 이야기♧

영빈 이씨(1696년 7월18일~1764년 7월26일)는 본관이 전의인 증 찬성 이유번과 한양김씨의 딸로 1696년(숙종 22)에 태어났다. 1701년(숙종 27)에 입궁하여 궁녀 생활을 하다가 1726년(영조 2) 영조의 후궁이 되어 1730년(영조 6) 영빈으로 책봉됐다. 영빈 이씨는 영조의 총애를 가장 많이 받은 후궁으로 영조 사이에서 1남(사도세자) 6녀를 낳았다. 사도세자의 생모였으나 아들에 대한 일을 일절 간섭하지 않았으며, 혜경궁 홍씨가 저술한 한중록’에 의하면 영조가 사도세자의 처분을 놓고 고민하고 있을 때 영빈 이씨가 영조에게 ‘대처분’을 청했다고 할 정도로 냉정하고 강한 어머니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 후 1764년(영조 40)에 경희궁 양덕당에서 69세로 세상을 떠났다. 1899년(광무 3)에 사도세자가 장조의 황제로 추존되면서 영빈 이씨는 황제의 사친 지위로 추존되어 시호를 소유(昭裕)라 했다.

현재 서울 서대문구 봉원사 입구에서 연세대학교로 넘어가는 곳에는 나지막한 고개가 있다. 사람들은 그 고개를 벌고개 또는 버리고개라 불렀다. 고개를 넘은 곳에 영빈 이씨의 수경원이 위치해 있었는데, 수경원 조성 이후 주룡(主龍)에 해당하는 산 능선을 사람들이 넘어 다니게 되면 등성이가 낮아질 뿐만 아니라 불경스러운 일이 된다고 하여 통행을 금지했고, 만일 다니는 사람이 있으면 벌을 내렸으므로 ‘벌(罰)고개’라 했으며, 이 말이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면서 ‘버리고개’로 불렸다는 설이 전해진다.

♧사도세자와 혜경궁 홍씨의 한중록 이야기♧

조선 시대 궁중문학의 백미로 손꼽히는 ‘한중록’의 저자이자 뒤주에 갇혀 죽어간 사도세자의 부인이었던 혜경궁 홍씨의 파란만장한 삶의 기록인 한중록은 후대의 독자들에 의해 그 분위기에 따라 ‘闲中錄’ ‘恨中錄’ ‘泣血錄` 등으로 붙여진 혜경궁 홍씨의 기록이다.

임오화변, 정조의 왕위 등극 등 굵직굵직한 조선 영·정조 대 정치사가 섬세한 여성 심리를 통해 그려질 뿐만 아니라 인물의 내밀한 심리와 성격이 리얼하게 묘사되어 있어 당시 사람들을 생생하게 만나볼 수 있는 귀중한 사료이다.

3대에 걸친 비극, 남편 사도세자의 죽음과 아들, 조선 왕실 역사상 유례가 없는 사건이 벌어졌다. 영조의 아들로 한 나라의 왕세자이자 혜경궁의 남편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죽임을 당한 것이다. 이 충격적인 사건을 지켜봐야 했던 혜경궁 홍씨, 그녀는 임금인 시아버지 앞에서 남편을 위한 어떠한 항변도 할 수 없었다. 아들만은 살려야 했다. 죄인으로 몰려 죽은 남편을 따라 아들조차 왕위를 위협받는 상황이었다. 혜경궁은 어떻게든 왕세손을 보호해야 했다. 혜경궁은 왕세손을 보호하기 위한 행보를 한다. 영조가 머무는 경희궁으로 정조를 떠나보내고 당시의 권력의 핵심이었던 시누이 화완옹주를 찾아가 아들의 안위를 부탁한다. 남편처럼 의지해온 아들을 보호하기 위해 선택한 생이별 그녀는 어머니였다.

혜경궁 홍씨의 아들이 정조가 되다. 그녀의 판단은 정확했다. 영조는 세손을 왕세자로 책봉하고 죽은 사도세자의 형인 효장세자의 아들로 입적시키며 왕세자로서의 확실한 입지를 갖게 되고 정조는 마침내 왕위에 등극하게 된다. 그러나 이로 인해 혜경궁은 왕의 어머니라는 법적 지위를 상실하게 된다. 누구도 견디기 힘든 상황에서 그때그때 현명한 판단으로 비극을 헤쳐나간 한 여인, 절대로 나약하지 않은 이 여인의 삶은 한(恨)이 된다.

80세의 파란만장한 삶을 산 혜경궁 홍씨 자신 주변에서 벌어지는 일이었지만 어찌하지 못하는 암담한 상황의 연속, 그러나 그녀는 울고 있지만은 않았다. 혜경궁은 10여 년 동안 4번에 걸쳐 한중록을 썼다. 그것은 어쩌면 가혹한 세월을 살아오면서 자신을 추슬러왔던 한 가닥 희망의 끈이었을지 모른다.

정조 즉위 후 맞이하게 된 혜경궁 홍씨의 행복, 어머니 혜경궁에 대한 효심이 남다른 정조가 왕위에 오르면서 그녀의 인생에도 다시 꽃이 피어나기 시작했다. 서기 1795년. 정조와 혜경궁, 그리고 그녀의 두 딸이 사도세자의 무덤인 현륭원으로 원행을 떠난다. 사도세자의 죽음 이후 처음으로 혜경궁의 온 식구가 함께한 이 행차는 혜경궁의 환갑을 기념하기 위한 것이었다. 마침내 고통의 세월이 지나고 평화가 찾아온 듯했다. 이것은 혜경궁이 살아온 한스러운 생애의 보상이었다.

그러나 계속된 혜경궁 홍씨의 위기는 사라지지 않았다. 정조 즉위 후 풍산 홍씨 일가는 외척 세력으로 탄핵을 당한다. 혜경궁의 남편 사도세자의 죽음에 책임이 있다는 죄였다. 임금이 된 아들에게 정치적 걸림돌이 된 친정, 혜경궁의 가슴은 타들어갔지만, 아들 앞에서 어떠한 내색도 할 수 없었다. 환갑잔치 후 정조는 갑자년(1804년)에 혜경궁 친정 식구들의 명예를 회복시켜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장밋빛 미래의 꿈은 아들 정조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산산조각이 났다.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른 손자 순조를 대신해 수렴청정에 나선 정순왕후는 풍산 홍씨 일가에 정치적 보복을 가하기 시작한다. 혜경궁은 더는 의지할 곳이 없었다. 절망의 끝에서 그녀가 기댈 곳은 붓끝뿐이었다. 한 자마다 눈물을 흘리며 기록하니, 한중록의 또 다른 이름은 ‘읍혈록’ ‘피눈물의 기록’이란 뜻이다. 자신의 말대로 한 자마다 눈물을 흘리며 쓴 이 기록은 그녀보다 오래 살아남았다.

80년 후 한중록을 읽은 고종은 그녀의 마지막 한을 풀어주었고 1899년 혜경궁은 마침내 황후로 추존된다. 여기서 우리는 사도세자의 생모인 영빈 이씨와 정조의 생모인 혜경궁 홍씨의 삶이 비교된다. 버리고개라는 전설이 진설이 아닌가 싶다.

3. 익릉(翼陵·숙종비 인경왕후 능)

홍살문에서 바라본 익릉 전경, 정자각이 다른 정자각보다 웅장하다. 익릉은 수경원과 바로 이웃해 있다. 익릉은 조선 왕조 19대 숙종의 첫 번째 왕비인 인경왕후 김씨가 세상을 떠난 이듬해인 1681년 숙종 7년 바로 이 자리에 조성됐다.

♧인경왕후(仁敬王后) 이야기♧

숙종의 첫 번째 왕비 인경왕후 김씨(1661년 9월3일~1680년 10월26일)는 본관이 광산인 광성부원군 김만기와 서원부인인 한씨의 딸로 1661년(현종 2)에 태어났다. 1671년(현종 12)에 왕세자빈으로 책봉됐고, 1674년에 숙종이 왕위에 오르자 왕비로 책봉됐다. 숙종 사이에서는 두 공주를 낳았으나 일찍 죽는 비운을 겪었고, 1680년(숙종 6)에 천연두로 경덕궁 회상전에서 20세로 세상을 떠났다.

4. 창릉(昌陵·제8대 예종과 안순왕후의 능)

서어나무길이 시작되는 서오릉 끝자락에 동원이강릉 형식으로 자리잡고 있다. 창릉은 조선 8대 예종과 두 번째 왕비 안순왕후 한씨의 능이다. 창릉은 서오릉에서 1457년 경릉(추존 덕종과 소혜왕후 능)이 조성된 후 13년 만에 왕릉으로 조성된 두 번째 능으로, 같은 능역에 하나의 정자각을 두고 서로 다른 언덕에 능침을 조성한 동원이강릉(同原異岡陵)의 형태이다.

♧예종(睿宗) 이야기♧

예종(1450년 1월1일~1469년 11월28일)은 세조와 정희왕후 윤씨의 둘째 아들로 1450년(세종 32)에 수양대군 사저에서 태어났다. 세조가 왕위에 오른 후 해양대군(海陽大君)에 봉해졌고, 형인 의경세자(추존 덕종)가 20세의 나이로 일찍 세상을 떠나자 1457년(세조 3)에 왕세자로 책봉됐다. 1468년(세조 14)에 세조의 선위를 받아 19세에 왕위에 올랐다. 즉위 초에 남이의 옥사를 진압했으며, 1469년(예종 1)에는 세종의 영릉(英陵)을 여주로 천장했다. 재위 1년 2개월 동안 각 도의 병영에 속한 둔전(屯田)을 일반 농민이 경작하게 하여 백성들을 가난에서 벗어나게 하는 등의 업적을 세웠다. 그러나 재위 1년 2개월 만에 경복궁 자미당에서 20세로 세상을 떠났다.

예종은 효성이 지극했던 아들이었다. 조선 후기의 학자 이긍익이 지은 야사 모음집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에는 예종이 부왕 세조가 세상을 떠난 것에 충격을 받아 건강을 해쳤다며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예종이 세자일 때 세조가 병환이 생기니 수라상을 보살피고 약을 먼저 맛보며 밤낮으로 곁을 지키며 여러달 동안 한잠도 못 잤다. 세조가 돌아가매 슬픔이 지나쳐 한 모금의 물도 마시지 않았으므로 마침내 건강을 해치게 되어 이해 겨울에 세상을 떠나게 됐다.

♧안순왕후(安順王后) 이야기♧

예종의 두 번째 왕비 안순왕후 한씨(?~1498년 12월23일)는 본관이 청주인 청천부원군 한백륜과 서하부인인 임씨의 딸로 태어났다. 1463년(세조 9)에 왕세자의 후궁인 소훈(昭訓, 내명부 세자궁 종5품)에 간택됐고, 예종이 즉위하자 왕비로 책봉됐다. 예종이 세상을 떠난 후 원자인 제안대군이 왕위를 이어받는 것이 원칙이었으나, 나이가 어렸기 때문에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의경세자의 둘째 아들인 자산군(성종)이 예종의 양자로 입적되어 왕위에 올랐다. 성종이 즉위한 후 인혜왕대비가 됐고, 연산군 즉위 후 대왕대비가 됐다. 그 후 1498년(연산군 4)에 창경궁에서 세상을 떠났다.

필자소개
월드코리안신문 명예기자
중국 쑤저우인산국제무역공사동사장
WORLD OKTA 쑤저우지회 고문
세계한인무역협회 14통상위원장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 서울특별시 송파구 올림픽로35가길 11 (한신잠실코아) 1214호
  • 대표전화 : 070-7803-5353 / 02-6160-5353
  • 팩스 : 070-4009-2903
  • 명칭 : 월드코리안신문(주)
  • 제호 : 월드코리안뉴스
  • 등록번호 : 서울특별시 다 10036
  • 등록일 : 2010-06-30
  • 발행일 : 2010-06-30
  • 발행·편집인 : 이종환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석호
  • 파인데일리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21 월드코리안뉴스. All rights reserved. mail to wk@worldkorean.net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