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성주의 ‘박정희·김대중’①] 두 사람, 세상을 만나다
[강성주의 ‘박정희·김대중’①] 두 사람, 세상을 만나다
  • 강성주 전 MBC 보도국장
  • 승인 2023.08.25 14: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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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와 김대중은 한국 현대사에 큰 족적을 남긴 인물이다. 과연 후세는 이들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강성주 전 MBC 보도국장이 박정희과 김대중을 재조명하는 작업에 들어갔다. 그가 심혈을 기울인 부분들을 연재로 소개한다.<편집자주>

박정희와 김대중은 일제 강점기 때 한반도에서 태어나 젊은 시절을 보냈다. 박정희는 1917년 경상북도 구미 농촌에서, 김대중은 전라남도 무안군의 섬(하의도)에서 1924년 태어났다. 이들이 일제 치하의 조선(朝鮮)에서 태어나 ‘조선인(朝鮮人)’으로 살아간 세월이 짧지 않다. 식민지의 삶은 암울하고 너나없이 가난했다.

김대중보다 7살이 많은 박정희(朴正熙)는 대구사범학교를 마치고 문경(聞慶)에서 교사로 근무하다가(1937.3~1940.3) ‘긴 칼을 차는’ 군인이 되고 싶어, 만주로 건너간다. 그는 어릴 때부터 군인을 꿈꾸었다. 당시 ‘긴 칼’은 권력의 상징이었다. 만주 신경군관학교(2년)를 마치고 일본 육군사관학교에 편입해 졸업하고 만주군 장교가 됐다.

만주 신경군관학교는 본래 펑텐(奉天)에서 ‘동북왕’(東北王) 장작림(張作霖)이 운영하던 중국 육군사관학교의 후신으로 1931년 이후에는 만주에 주둔하던 일본 관동군(關東軍)이 인수해 운영했다. 당시 식민지 조선의 상류계층이나 중부나 남부 지역 젊은이들은 일본의 육군사관학교로의 진학이 많았던 반면, 만주군관학교에는 사회적 지위가 낮은 빈농 출신들, 그리고 지역적으로 함경도나 평안도 출신이 많았다.

대구사범학교 시절의 박정희(왼쪽)와 목포상업학교 시절의 김대중
대구사범학교 시절의 박정희(왼쪽)와 목포상업학교 시절의 김대중

만주군관학교에 대한 조선인 입학은 1934년 이후 꾸준히 증가해 1930년대 말에서 1940년대 초에 절정을 이루었다. 만주군관학교 예과(2년)를 수석으로 마친 박정희는 만주군관학교 본과(2년)가 아니라 일본 내 육군사관학교 본과로 진학한다. 박정희는 일본 육군사관학교 본과도 3등의 성적으로 졸업한다. 졸업할 때 한국인으로서는 유일하게 일본 육군대신상을 받았다. 당시 일본 육군사관학교는 신입생을 한 해 2,000명 정도 받았다. 전쟁 중이어서 초급장교의 수요가 많았기 때문이다. 1944년 4월 20일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면서 일제의 괴뢰국인 만주국 장교로, 만주군 제8단 소위로 배속된다. 제8단의 주요 임무는 모택동 휘하의 팔로군 제17단에 대한 방어와 토벌을 담당했다.

해방된 조국에 돌아와서도 박정희는 군인이었다. 당시 만주(滿洲)는 중화제국과 일본제국이 교체되는 전환기 속에서 관련 국가들과 인간들의 정치와 욕망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던 특이한 공간이었다.

만주(滿洲)는 중국의 동북(東北) 지방을 일컫는 이름이다. 만주족의 발상지여서 통상적으로 만주로 부른다. 만주는 좁게는 랴오닝(遼寧), 지린(吉林), 헤이룽장(黑龍江)성 등 중국의 동북 3성을 의미하기도 하고, 내몽골자치주의 동쪽 지역을 포함하기도 한다. 하북성 북부의 옛 러허(熱河)성 지역을 포함할 때도 있고(내만주), 제일 넓게는 우수리강과 아무르강 바깥의 러시아 영토와 사할린섬(외만주)을 포함하기도 한다. 그래서 면적도 좁게는 81만㎢에서 113만㎢, 넓게는 223만㎢에 이르기도 한다. 인구도 동북3성만 볼 때는 9,000만 명이나, 넓게는 1억2,800만 명이 된다.

만주는 고대부터 여러 종족의 삶의 터전이었고, 청나라가 건국된 뒤 발상지를 보호한다며 봉금령을 선포해 압록강과 두만강 이북 1,000여 리에는 사람이 살지 못하도록 해, 이주가 금지되기도 했다. 1870년대부터는 조선인들이 이주해 터를 잡고 살면서 일제시대에는 항일민족운동의 중심지가 되기도 했다. 20세기 들어서 제국주의 열강의 침략을 받았으며, 1905년 러일전쟁의 결과, 남만주는 일본의 세력권으로, 북만주는 러시아의 세력권에 편입됐다.

일제는 1932년 이 지역에 만주국(滿洲國)을 창설했고, 만주 개발과 인력 부족을 메꾸기 위해 가까운 지역에 사는 조선인에 대해서도 이민을 장려했다. 많으면 200만 명의 조선인이 만주 곳곳에 흩어져 살았다. 해방 이후에도 이 중 대다수는 만주 지역에서 남아서 거주해, 중국이 성립한 이후에는 조선족(朝鮮族)이라고 불렸다.

김대중(金大中)은 목포공립상업학교(1939~1944)를 졸업하고 해운회사에 들어가 세상과 사업의 이치를 배웠다. 명석하고 말을 조리 있게 잘했던 그는 정치에도 관심이 많았다. 김대중도 대학 진학 등의 목적으로 만주로 가려고 한 적이 있었다. 만주는 식민지 조선에 비해 일제의 억압이 덜하고 덜 갑갑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김대중은 자서전에서 “3학년 때 나는 진학반으로 옮겼다. 이유는 물론 대학에 가기 위해서였다. 만주에 있는 건국대학교를 마음에 두고 있었다. 그때는 이미 한반도를 비롯한 주변의 정세가 극도로 혼미했다. 좀 넓은 곳으로 가서 답을 찾고 싶었다. 건국대학교는 등록금은 물론 숙식까지 무료였다”고 썼다.

일제의 괴뢰국 만주국이 고급관료를 길러내기 위해 설립한 건국대학교는 1938년 첫 입학생 150명을 뽑고, 1945년까지 존재했다. 학비, 기숙사비, 피복비까지 공짜였고, 한 달에 5원의 용돈까지 주는 당시로서는 ‘꿈의 대학’이었다. 개교를 앞두고 1937년 가을, 건국대학교 입시요강이 발표되자, 조선에서는 25명 모집에 1,000여 명이 지원해 전대미문의 경쟁률을 보였다.

건국대학교는 당시 조선, 일본, 만주, 대만, 몽골, 러시아 등 6개 지역에서 150명의 신입생을 뽑을 계획이었다. 응시자들은 거친 만주 생활을 이겨내도록 신체검사를 우선 통과해야 했다. 2차 시험은 학교가 위치한 신경(만주국 수도: 지금의 창춘)이었는데, 응시자는 왕복 교통비와 숙박료 등을 지원받고 면접시험에 응했다. 여기서 일본인 2명을 포함해 11명이 조선에서 합격했다. 7년 동안 모두 91명의 조선인 학생들이 수학했으며, 전기 3년 후기 3년 등 6년간 수학했다.

개교 당시 육당 최남선이 유일한 한국인 교수였다. 당시 만주국은 일본 내 제국대학 교수의 월급 2배에 해당하는 금액을 교수 월급으로 지급했다. 총리를 지낸 강영훈은 육당의 재임 소식을 듣고 건국대학으로 진학할 마음을 먹었다고 술회했다. 당시 경성제대나 사립 전문학교, 일본 내 유학은 비용이 많이 들어서, 가난한 수재들이 건국대학 진학의 꿈을 갖고, 응시했다.

당시 만주는 조선 청년들에게 철조망과 감시가 따라다니는 식민지가 아니라, 닫힌 현실을 벗어나는 가능성이 가득 찬 드넓은 광야(廣野)의 이미지로 존재했다. 박정희, 김대중 두 사람 다 영민(英敏)했고 부지런해 학업 성적이 좋았다. 박정희는 내성적이었지만 야무진 모범생이었고, 김대중도 바다 건너 세상에 대한 호기심이 많은 학생으로 세상을 받아들였다.

필자소개
MBC 보도국장, 포항 MBC 사장, 미국의 소리(Voice of America) 서울지국장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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