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성주의 ‘박정희·김대중’③] 군인 박정희
[강성주의 ‘박정희·김대중’③] 군인 박정희
  • 강성주 전 MBC 보도국장
  • 승인 2023.09.09 07: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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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와 김대중은 한국 현대사에 큰 족적을 남긴 인물이다. 과연 후세는 이들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강성주 전 MBC 보도국장이 박정희과 김대중을 재조명하는 작업에 들어갔다. 그가 심혈을 기울인 부분들을 연재로 소개한다.<편집자주>

해방 당시 박정희는 28살, 김대중은 21살이었다. 박정희는 만주에서 해방을 맞아 귀국한 뒤(1946.5) 바로 남조선국방경비사관학교(1946.5~1948.9)에 입교해 단기간 교육을 마치고 포병 대위로 임관돼(1946.12), 군인의 길을 이어간다.

미 군정은 1946년 4월 30일 자로 군사영어학교를 폐교하고, 5월 서울 근교 태릉에 남조선국방경비사관학교를 창설했다. 남조선국방경비사관학교는 1946년 6월 15일 남조선국방경비대가 남조선경비대로 이름을 바꾸고, 같은 날 남조선경비사관학교로 개칭된다. 남조선경비사관학교는 1기부터 6기까지 1,254명의 장교를 배출했다.

미 군정은 군 간부를 빨리 양성하기 위해 1기부터 4기까지는 일본군, 만주군, 광복군 출신 군 경력자들을 입교시켰다. 이 때문에 장교의 절반 이상이 일본군 출신이 차지했다. 5기는 5년제 중학 이상의 민간인을, 6기는 우수 하사관이나 사병들을 대상으로 교육생을 모집했다. 6.25 때 1기생 연대장부터 6기생 중대장까지 30%가 희생됐다. 정부 수립 후인 1948년 9월 5일 국군 창설과 동시에 육군사관학교로 이름을 바꾸었다.

박정희는 소령 시절 군부 내 남조선노동당(남로당) 군사부 부책임자라는 혐의로 체포돼 1심에서 사형 구형에 무기징역을, 2심에서 징역 10년으로 감형받고 형의 집행도 면제받았다.

육군사관학교 1중대장이던 박정희 소령은 1948년 11월 11일 김창룡의 특무대에 체포된다. 여순사건(1948.10.14.) 이후 군은 군 내에 침투한 좌익분자들을 색출하고 있었다. 그 과정에서 수사당국은 남로당 군 총책 이재복을 검거했고, 이 명단 앞머리에 있는 박정희도 체포됐다. 이재복은 박정희의 셋째 형이자 좌익운동가였던 박상희의 친구였는데 박정희는 이재복에게 포섭돼 남로당에 가입했었다.

박정희는 검거된 뒤 작성한 자술서를 통해 “대구 10.1사건으로 형 박상희가 우익에 피살되자 그에 대한 복수심과 형 친구 이재복의 권유로 남로당에 가입했다”고 진술했다. 1949.2.8. 1심 재판에서 박정희는 국방경비법 위반으로 사형 구형에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이 판결로 그는 육군 소령에서 파면됐고, 급료도 몰수당했다. 함께 재판을 받았던 최남근 중령, 오일균 소령, 조병건 대위 등은 모두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박정희가 사형을 면할 수 있었던 것은 김창룡 특무부대장과 백선엽 정보국장 등 당시 군 주요 간부를 차지했던 만주군 인맥 덕분이었다. 그는 강제예편을 당한 뒤(1949), 문관(文官)으로 육군본부 정보국에서 근무했다. 1949년 12월 말 박정희 문관이 작성한 보고서는 ‘북한이 조만간 남침할 가능성을 거의 정확하게 예측’한 것으로서, 군 안에서 그의 능력이 다시 인정받는 계기가 되었다.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했다. 그는 백선엽 등 선배들의 도움을 받아 현역 소령으로 군에 복귀했고, 1953년 11월 육군 준장(准將)으로 진급해, ‘별을 달았다’. 만주국 중위에서 국군 대위로 임관되는 등 덜커덩거리기는 했지만, 기어코 별을 달았다. 하긴 어릴 적부터의 꿈이 군인이었으니, 남달랐을 것이다. 이후 5사단장, 7사단장 등을 지내고 1959년 육군 소장으로 진급했다.

소령 때의 박정희(왼쪽 사진, 1948, 광주 반군토벌사령부에서)와 소장 때의 박정희(국가재건최고회의, 1961)
소령 때의 박정희(왼쪽 사진, 1948, 광주 반군토벌사령부에서)와 소장 때의 박정희(국가재건최고회의, 1961)

6.25전쟁을 치루면서 박정희는 진급도 빨랐지만, 박정희보다 나이 적은 상관도 많았다. 30대 참모총장, 30대 사령관이 그들이다. 나라가 젊은 탓에 군 지휘관이나 지도자들도 젊었다. 전쟁이 끝나고 난 뒤의 진급 적체는 그 뒤 5.16 거사의 한 원인도 된다.

국군은 6.25 남침을 받을 당시 10만명에도 미달했지만, 전쟁 때문에 55만 명(1953), 72만 명(1958)까지 늘어났다. 국군은 양적으로만 늘어난 것이 아니라 매년 1,000명 이상의 장교와 하사관들이 미국으로 장단기 연수를 다녀와 군사 기술과 조직관리 등에서 선진 기법을 익혔다. 한국 내 어느 집단보다 유능했고 잘 조직화 돼 있었다. 당시에는 군부와 대학생 등 두 집단이 가장 교육받은 조직이었다. 젊은 장교들은 부패하고 억압적인 한국군 수뇌부와 정치상황에 대해 실망이 컸다. 당시 한국은 정치, 경제, 사회 등 거의 모든 면에서 후진적이었고 가난의 흔적이 넘쳐났다. 송복(宋復) 기자의 관찰이다.

바로 뒤 취재를 통해 안 일이지만 그들은 내가 다녔던 서울대를 가고도 남을 정 도로 고등학교 때 성적이 우수했다. 거기에 장교로서 미국에 유학하며 세계를 보았고, 바깥 세계를 알게 됐다. 우물 안 개구리나 다름없던 지식인, 기성 정치인과는 차원이 달랐다. 차원이 다른 만큼 사람이 달랐다. 나는 쿠데타를 직감했다. 1960년, 그때까지 군사쿠데타가 일어나지 않은 신생국은 우리뿐이라고 할 정도로 우리는 쿠데타에서 예외가 되어 있었다.(차하순 등, 한국현대사, 2015)

거기다가 6.25전쟁을 거치면서 유엔군사령관에게 한국군의 작전통제권이 넘어가 있어, 주한미군사령관을 겸하는 유엔군사령관과 군 통수권자인 한국 대통령 사이에서 ‘흐름을 잘 읽어야’ 하는 정치적 훈련(?)도 경험한다. 무장한 군대가 ‘정치적인 집단’으로 변해간다. 이승만 대통령은 군부 내에 출신 지역이나 학교 등에 따른 몇개의 파벌을 용인해, 서로 견제하도록 하는 방식으로 군부를 통제해 나갔다.

이처럼 다른 사회 집단에 비해 돌출적으로 팽창해 있는 가운데 정치적 상황에 매 우 예민한 지도부를 둔 군부가 조만간 정치에 개입할 것은 어느 정도 예측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 결과 군부에 잠재한 정치성은 수뇌부가 집권세력과 결탁해 부패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군부의 수뇌부는 원조로 주어진 군수물자 일부를 착복하거나 자유당의 정치자금으로 헌금하여 진급을 보장받는 권력 연합을 형성하였다. 부패하고 무능한 군의 수뇌부는 자유당 집권세력이 부정선거를 획책할 때 그에 협조했다.(이영훈, <대한민국 역사 나라만들기 발자취 1945~1987’>, 2013)

1960년 ‘3.15부정선거’에 항의해 일어난 학생과 시민들의 시위가 많은 호응을 얻어 정권퇴진 시위로 발전하면서 제1공화국 정부가 무너졌다. 온 나라의 각 분야가 4월 혁명을 계기로 더 좋은 나라를 만들기 위해 나선다. 전쟁을 치르면서 엄청나게 팽창한 군부도 마찬가지로 혼란했고, 부패 또한 극심했다. 전쟁이 끝나고 나니 군에 대한 바깥의 시선도 그리 곱지 않았다. 4·19 혁명 이후 젊은 영관급 장교들은 정군운동(整軍運動)을 시작했다. 김종필, 김형욱, 길재호 등 육사 8기 영관급 장교들은 부정선거에 협조하고 부패한 군 수뇌부의 퇴진을 촉구하는 연판장을 돌렸다.

영관급인 이들은 계속 군 숙정(肅正:부정을 엄격히 다스려 바로잡음)을 주장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이에 이들은 “그렇다면, 군 부패도 문제지만, 나라의 발전이 이렇게 정체돼서야 희망이 없다. 혁명(革命)으로 나라 전체를 싹 바꿔버리자”고 결의하기에 이른다(1960.9.10). 이 단계에서 청년 장교들은 지도자로 박정희(朴正熙) 장군을 염두에 두었다.

정군파 장교들은 군부에서 강직하고 청렴하다는 평판을 얻고 있던 박정희 육군소 장을 지도자로 추대했다. 박정희 역시 오래전부터 국가의 부패하고 후진적인 현실에 근본적인 불만을 품으면서 혁명의 기회를 모색해 왔다. 그의 주변에는 혁명을 꿈꾸어온 군부의 엘리트들이 자연스럽게 결집해 있었다.

그들을 군영 밖으로 끌어낸 다른 한편의 요인은 앞서 말한 대로 4·19 이후에 격심하게 벌어진 정치의 혼란과 사회의 방종이었다. 특히 1961년 들어 급진 좌익세력에 의한 민족통일 운동은 대다수 국민에게 이 나라가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에 대한 근본적인 위기감을 안겨주었다.(이영훈, <대한민국역사, 나라만들기 발자취 1945~1987>, 2013)

박정희는 강직하고 청렴한 장성으로 군(軍) 내에서 소문이 자자했다. 나라 전체가 가난했던 당시 부정한 방법으로 살아가는 군 간부들이 많았지만, 박정희는 달랐다.

1955년 7월 1일 내가 제5사단장으로 전보된 이후, 노량진 한 운수업자의 문간방에 세 들어 살 때 가족들이 가장 비참한 가난을 경험하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방에 불도 들지 않고 물이 줄줄 새어, 군인들의 비옷을 바닥에 깔고 지냈고, 눕기도 힘들어 낮이나 밤이나 서성거리기 일쑤였습니다. 솥을 걸 데가 없어서 풍로를 사다가 냄비로 음식을 끓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근혜는 아파서 울곤 했지요. 가정의 살림을 돌보지 않은 내 성격 탓도 있지만, 부대 물자를 빼돌려 돈을 마련하지 않으면 달리 방법이 없었습니다. 참 나쁜 가장(家長)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때 가족들을 생각하면 아직도 많이 미안합니다.(류상영, <박정희와 김대중의 대화>, 2022)

박정희는 그 뒤에도 가족을 고생스럽게 했다. 1960년 1월 박정희는 부산 군수기지사령관으로 부임한다. 군수기지사령부는 부산에 있던 제2 군관구 사령부가 1960년 1월 14일 자로 해체되고, 창설된 부대다. 6.25 전쟁 발발 이후 부산항은 미국 등 외국에서 오는 엄청난 원조물자와 군 장비 등의 물류를 도맡았고, 그 중심에 군수기지사령부가 있었다. 부대 안팎에서 비리가 끊이지 않았는데, 부산 지역에서는 박정희가 사령관으로 부임한 뒤(1960.1~1960.7) 대대적인 인적 쇄신이 일어나고 부패가 일소됐다는 평가가 돌았다.

이 무렵 박정희는 우연히 대구사범학교 동기동창(1937년 졸업)인 황용주 부산일보 주필(主筆)을 만난다. 4·19 이후 부산 지역에 계엄령이 선포돼 있어, 이 회의 자리에서였다. 박정희는 대구사범 동기인 언론인 황용주와 의사 조증출(1919~1984), 그리고 이들의 친구인 소설가 이병주(李炳注) 등과 자주 어울리며, 엉망으로 돌아가는 세상에 대해 울분을 토하곤 했다.

황용주(黃龍珠, 1919~2001)와 조증출(曺增出,1918~1984)은 박정희와 대구사범학교(1932~1937) 동기였다. 동기생은 90명이 입학했다. 이들이 입학할 당시에는 서울, 대구, 평양 등 사범학교가 세 군데에 불과했다. 밀양 출신의 황용주는 대구사범에서 퇴학당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중학교와 와세다대학 불어불문학과를 졸업한다. 조증출은 대구사범을 졸업한 뒤 평양의전을 마치고 의사가 된다.

1950년대 부산에는 부산일보(사주 김지태)와 국제신보(사주 김형두, 1977 국제신문으로 개명)가 유력지로 발간됐다. 국제신보 사주 김형두는 진보적인 성향이었고, 부산일보 사주 김지태는 사업가에 정치를 겸한 현실주의자였다. 그래서 진보적인 지식인 황용주는 국제신보 주필로 필명을 날리다가 김지태의 권유로 부산일보로 옮겨가 주필과 편집국장으로 변신한다. 그러자 국제신보는 소설가로 필명을 날리기 시작한 이병주(1921~1992)를 스카우트한다(1958). 이후 부산 언론계는 황용주와 이병주가 겨루게 된다.

이 무렵 황용주와 조증출의 대구사범 동기인 박정희가 부산 군수기지사령관(1960.1~1960.7)으로 부임해 만남이 이루어졌다.

왼쪽부터 군인 박정희(1917~1979), 언론인 황용주(1919~2001), 소설가 이병주(1921~1992)
왼쪽부터 군인 박정희(1917~1979), 언론인 황용주(1919~2001), 소설가 이병주(1921~1992)

4.19를 전후한 시절, 세상은 많이 부패했고 또 혼탁했다. 다음은 이병주의 회고다. 여기서 H는 황용주를 말한다.

박 장군, 조증출, H, 그리로 내가 모인 자리에선 주로 H가 말을 많이 했다. H의 시국관은 날카롭고 그의 비전은 원대하고 한마디로 말해 그는 일류에 속한다. 지식인이다. H의 태도엔 되도록 박 장군을 계몽하려는 의도가 보였다. 군인의 틀을 벗어난 활달한 인간을 만들어 보겠다는 정열이 H에겐 있었다. 가끔 도의(道義: 사람이 마땅히 행해야 할 도덕상의 의리)에 관한 설교를 하기도 했는데 H의 역점은 한국군은 어느덧 타성의 늪에 빠져 무기력할 뿐 아니라 부패 현상이 심해 국민의 신뢰를 얻지 못하고 있으니 도의적으로 재건되어야 한다는 데 있었다. H는 또 드골 (De Gaulle) 같은 사람을 예를 들어 군인이자 정치가인 탁월한 인간상을 그려 보이기도 하며 한국에 그런 인물이 나타나야 한다는 기대론(期待論)을 펴기도 했다.… 그러자 박 장군이 어깨를 펴며 결연하게 말했다. “여기 도의적으로 말짱한 사람이 있어, 걱정하지 마.”(이병주, <대통령들의 초상>, 1991)

이병주의 회고를 보면, 그네 사람은 짧은 기간 동안 아주 자주 어울려, 저녁을 겸한 술자리를 가지면서 시국에 관해 토론도 하고 말싸움을 한 것으로 보인다. 한번은 박 장군이 또 일본의 5.15, 2.26 사건을 일으킨 일본제국군 장교들을 들먹이며 찬사를 늘어놓자 H가 열을 받았다.

“너 무슨 소리를 하노, 놈들은 천황 절대주의자들이고 따라서 일본 중심주의자들이 고 케케묵은 국수주의자들이다. 그놈들이 일본을 망쳤다는 걸 모르고 하는 소린 가, 알고 하는 소린가!” 하고 반박하자 박 장군은 “일본의 군인이 천황 절대주의 하는 게 왜 나쁜가. 그리고 국수주의가 어째서 나쁜가!” 하고 흥분했다. H는, 앞으로의 세계는, 요원하더라도 세계는 하나이다 하는 이념으로써 움직여 나가야 하는데, 자기 나라만 제일이라는 그런 고루한 생각으로서는 세계평화에 해독이 될 뿐 아니라 결국 나라를 망치게 될 것이라며 자기 나름의 이론을 폈다. 그러나 박 장군은 “그런 잠꼬대 같은 소리를 하고 있으니까 글 쓰는 놈들은 믿을 수가 없다”며 열을 띠어 말을 계속했다. “아까 너 일본의 국수주의 장교들이 일본을 망쳤다고 했는데 일본이 망한 게 뭐꼬, 지금 잘해 나가고 있지 않나. 역사를 바로 봐야 해. 패전 후 얼마 되지 않아 일본은 일어서지 않았나.” “국수주의자들이 망친 일본을 국수주의를 반대한 자유주의자들이 일으켜 세운 거다. 오해하지 마”(이병주, <대통령들의 초상>, 1991)

박정희는 부산 군수기지사령관을 6개월 정도 지냈다. 그리고는 육군본부 작전참모부장, 다시 6개월 뒤에는 제2군사령부 부사령관(1960.12)으로 연속적으로 자리를 옮긴다. 이병주는 그 짧은 만남을 통해 박정희를 이렇게 파악해서 기억하고 있다.

이승만의 장기집권에 생리적인 혐오를 가지고 있는 사람, 부정선거에 반발하는 사 람, 국수(國粹)적인 사상을 가진 사람, 청렴한 사람, 무식하지만 군인으로서의 신념은 가진 사람, 남의 말 잘 듣지 않고 자기 의견만을 고집하는 사람, 특출나게 자존심이 강한 사람, 즉 유아독존적(唯我獨尊的:세상에서 자기 혼자만이 잘 났다고 뽐내는 태도)인 사람 등등이다.(이병주, <대통령들의 초상>, 1991)

박정희는 좋은 남편, 자상한 아버지가 아니었지만, 사회적으로는 청렴한 사람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어느 날 전속부관 이낙선 소령이 난감한 표정으로 황용주 주필에게 하소연했다. 육영수 여사가 한 달에 두 차례 생활비를 받으러 부산에 왔다. 한 번은 박정희가 전액을 가불해서 썼기에 잔액이 없다는 것이었다. 황은 의사인 조증출을 주선하여 약간의 용돈을 마련해 준다. 술자리에서 “생활비는 부인께 좀 드리는가?” 은근하게 스치고 가듯이 용주가 물었다. 박정희의 대답인즉 “그게 어디 내 돈이냐? 조직관리하고 참모 용돈 주라고 한 거지.”(안경환, <황용주, 그와 박정희의 시대>, 2013)

박정희 전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
박정희 전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

아마 박정희는 본인의 말처럼 ‘나쁜 가장(家長)’이었을 것이다. 본인도 인정하고 있듯이 경제적으로 ‘나쁜’ 가장의 부류에 속했다. 부인 육영수 여사에 대한 사랑과 신뢰가 높은 편이었지만, 가끔 성질을 부렸다. 박정희의 3선 개헌 시도에 대해 야당과 학생들의 반대가 심했을 때의 일이다.

육 여사의 눈두덩이가 퍼렇게 된 적이 있어요. 대학생들의 격렬한 데모가 끊이지 않고 저항이 계속되자 육 여사가 1968년 11월 한국외국어대를 시작으로 고려대, 공주사대, 한양대, 숙명여대 등지를 직접 돌아다니면서 대학생들을 만나 시국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어요. 대통령에게 민의(民意)를 제대로 전달하기 위한 대학 순 방이었던 셈이죠. 어느 날 육 여사가 자신이 직접 보고 들은 이야기를 가감 없이 대통령에게 전달했는데 그 과정에서 열을 받은 박 대통령이 ‘임자가 뭘 아냐’면서 주먹을 날렸다고 합디다.( 김순희, <‘대통령 상전’ 영부인 열전(3)>, 신동아 2007년 8월호)

필자소개
MBC 보도국장, 포항 MBC 사장, 미국의 소리(Voice of America) 서울지국장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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