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승의 붓을 따라] 자식으로부터 해방되기
[이영승의 붓을 따라] 자식으로부터 해방되기
  • 이영승 한국 수필문학가협회 이사
  • 승인 2023.09.25 11:4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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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이 며칠 남지 않았다. 우리 민족의 대표적 명절이 설과 추석인데 설은 부모님께 세배드리고 나이를 한 살 더 먹으며, 추석은 조상의 산소를 벌초하고 햇곡식으로 차례를 올리는 날이다. 나는 1년 중 가장 추운 계절인 설보다 더위가 물러가고 오곡백과가 무르익는 추석에 더 명절의 의미를 느낀다.

그런데 명절이 우리 민족의 미풍양속인 것은 분명하나 마냥 즐겁기만 한 가정이 얼마나 될까? 명절을 쇠기 위해서는 누군가의 희생과 고통이 따라야 하는데 시대가 변한 요즘도 가정불화의 화근이 되고 있다. 내가 어릴 적 어머니는 명절 때마다 실로 감당키 어려운 고생을 하셨다. 설과 추석이면 삼촌 3형제분이 어린 자녀를 줄줄이 앞세우고 매년 우리 집으로 와서 하루를 묵었다. 할아버지 생신 때도 마찬가지였다. 어머니는 시집오는 날부터 홀로되신 할아버지를 40년 넘게 모시며 이웃 사람들까지 초청해 생신 잔치를 했는데 자식으로서 가장 기본이 되는 의무로 생각하셨다. 끼니 걱정을 하던 시절에 대식구를 맞아 음식 준비를 하자니 고초가 오죽했으랴!

어머니는 15세에 결혼하셨다. 당시는 조혼 시대라 혼례를 올린 후 이삼 년 뒤에 신행했으나 어머니는 혼례 후 1년도 되기 전에 할머니가 돌아가시어 상주의 몸으로 조기 신행했다. 막내 삼촌은 삼칠도 되기 전이라 새색시가 이웃 산모들을 찾아다니며 젖동냥을 했단다. 호랑이 담배 피울 적 얘기 같으나 내가 듣고 겪은 실화이다. 한 세대의 세월이 지났을 뿐인데 마치 한 세기도 더 흐른 듯 세상의 관행이 상전벽해가 되었다.

세월이 흘러 내 나이도 고희가 지났다. 세태가 많이 변했으나 아들딸 결혼 후부터 명절과 우리 부부의 생일이 되면 옛날 어머니 생각이 난다. 그리고 손주들이 태어난 후에는 자식들 입장을 먼저 생각하게 되는데 솔직히 마냥 즐겁지만은 않다. 특히 추석은 마음이 더 무겁다. 아내 생일이 나보다 3일 앞이고 추석이 내 생일보다 12일 후라 2주 사이에 세 행사가 연속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무슨 대책이 없을까를 늘 고민했는데 지난해 아내가 자식들을 좀 편하게 해주자며 기발한 아이디어를 냈다. ‘우리 부부의 생일이 든 주말에 1박 2일 콘도를 예약해 하룻밤 묵으며 합동으로 생일을 하자’는 안이다. 자식들을 편하게 해준다는 취지이지만 실은 우리 부부가 편하기 위한 방편이기도 하다. 생일이다 명절이다 하고 찾아오면 반갑기야 하지만 요즘은 자식도 손님이라 음식을 준비하는 아내가 너무 고달픈 게 사실이다. 그렇다고 식당에서 만나 밥 한 끼 먹고 헤어질 수도 없는 노릇이니 이 이상 좋은 방법이 없을 듯했다.

작년에는 홍천 비발디파크를 예약해 우리 부부 합동 생일을 시범으로 했는데 우리도 편하고 자식들도 좋아했다. 그래서 올해는 일찌감치 양평 소노휴 콘도를 예약해 자식들에게 일정을 미리 알렸다. ‘노후의 행복은 자식에 대한 집착에서 얼마나 벗어날 수 있느냐에 달렸으며, 부모가 자식들 앞에 자존을 지키는 방법은 그들에게 손을 벌리지 않는 것’이라 했다. 그래서 자식들에게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 숙박과 식사 비용은 일체 우리가 부담하겠다고 미리 못을 박았다. 그렇다고 빈손으로 올 수는 없겠지만 온 가족이 하룻밤을 묵으며 함께 즐기고, 행사 횟수도 줄이게 되니 얼마나 혁신적 사고인가!

작년에는 손자가 너무 어려서 며느리가 아이 보느라 힘들었는데 올해는 외손녀가 5살, 손자가 3살이라 둘이 어울려 잘 놀아주니 의미가 더욱 있었다. 그리고 외손녀가 여덟 가족이 케이크에 촛불을 켜고 생일잔치 하는 모습의 그림을 커다랗게 그려와서 벽에 붙여 놓고 ‘생일축하’ 노래를 불렀으며, 자기 장난감과 그림책을 많이 갖고 와서 동생에게 물려주는 이벤트 행사도 했다. 다음날 점심을 먹은 후 헤어지게 되자 모두 만족하고 아쉬워했다. 혹시나 자식들이 부모 합동 생일인데 너무 미흡하다고 생각하지나 않을까 싶어 내가 먼저 “우리는 손주들의 생일축하 노래를 들은 것만으로 대만족이다”며 미리 준비한 봉투를 손주들에게 나눠주었다. 이것이 바로 사람 사는 모습이구나 싶어 온종일 가슴이 뿌듯했다.

6.25 전쟁 전후 태어난 사람들을 ‘낀 세대’라 한다. 부모를 모셨으나 자식들로부터는 보호를 받지 못하고 도리어 늦도록 돌봐야 하는 과도기 세대를 비유한 말이다. 부모에 대한 효도야 자기 몸을 물려받았으니 당연하겠지만 평생 몸 바쳐 희생한 자식에게 소외당했을 때 상처받지 않을 사람 누가 있으랴. 가만히 생각하니 우리도 자식 일로 남모르게 가슴앓이한 지난 일들이 아득히 꿈만 같다. 하지만 지금은 어엿한 사회인으로 안정된 직장생활을 하고 있으며, 손주들 재롱까지 안겨주니 무엇을 더 바라겠는가!

헤어지기 전에 아내와 논의된 사항을 깜짝 공개했다. “다가오는 추석은 연휴가 길고 만난 지도 얼마 안 되니 우리 집에는 오지 않아도 좋다. 여행을 가든 처가나 시댁에 가든 자유롭게 보내라.”라고 했다. 예상치 못한 선언에 어안이 벙벙한지 아들딸 모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우리 집안의 정서상 아직은 너무 파격적이나 기회 봐서 설에도 부부가 해외여행을 한번 떠나볼 예정이다. 이 또한 자식을 편하게 해주기 위함만은 아니며, 그들로부터 해방되기 위해 시도하는 하나의 묘안일 따름이다.

필자소개
월간 수필문학으로 등단(2014)
한국 수필문학가협회 이사
수필문학 추천작가회 부회장
전 한국전력공사 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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