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첩] 삼성 후광 빌려 문화재청 옹호(?)… 경복궁 월대를 보는 두 시각
[수첩] 삼성 후광 빌려 문화재청 옹호(?)… 경복궁 월대를 보는 두 시각
  • 이종환 기자
  • 승인 2023.11.06 11:3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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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대 복원 기념식. 광화문 앞에 두 줄로 늘어서있는 게 월대다.[사진=문화재청]
월대 복원 기념식. 광화문 앞에 두 줄로 늘어서있는 게 월대다.[사진=문화재청]

북경에서 주재원으로 지낸 사람들의 작은 모임이 있다. 일년에 서너번 만나는 모임이다. 이 모임 단체SNS방에서 경복궁 월대 칼럼이 화제가 된 적이 있다. 동아일보에 월대 관련 칼럼이 올랐을 때였다.

“중국 자금성의 출입문인 천안문에는 월대가 없다. 천안문을 지나면 나오는 단문과 오문에도 없다. 영화 ‘마지막 황제’에서 푸이가 즉위식을 하는 태화전 입구, 즉 태화문에서야 월대가 나타난다. 필요하면 태화전 입구까지 당시로서는 가장 빠른 이동 수단인 말을 타고 달릴 수 있었다.”

이렇게 시작하는 칼럼은 “경복궁의 출입문인 광화문 앞에도 본래 월대가 없었다”면서 이렇게 이어갔다.

“태화전에 해당하는 근정전의 입구, 즉 근정문에는 월대가 있었다. 세종 때 예조판서가 광화문 앞에도 월대를 만들어야 한다는 주청을 올렸다. 두 가지 이유였는데 하나는 신하들이 무엄하게 광화문 코앞까지 말을 타고 온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중국 사신이 들어오는 곳인데도 문 앞에 월대가 없어 누추하다는 것이다. 세종은 윤허하지 않았다. 농사철이라 백성이 바쁘다는 이유였다.”

이 칼럼은 “그 후 월대를 만들었는지는 기록이 없다. 만들었다면 월대 복원에 앞선 발굴 공사에서 무슨 흔적이라도 나왔을 것이다. 나오지 않았다”며, 이렇게 소개했다.

“광화문 월대는 흥선대원군이 버려진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1866년(고종 3년) 만들었다. 돈화문에도 월대가 있으니 광화문에도 월대를 만들었을 것이다. 역사가 깊다고도 할 수 없고, 특별한 문화재적 가치가 있다고도 할 수 없는 데다 사대(事大)의 상징과도 같은 월대를 광화문 앞 사직로를 직선에서 곡선으로 만들어 시민들의 안전과 편의를 위협하면서까지 복원하려 한다. 복원되는 월대는 고종 때와 달리 도로로 둘러싸여 월대 좌우로 부채꼴 모양의 거대한 빈 공간이 생기기 때문에 주변 면적까지 합치면 고종 때의 약 3배다. 대한민국은 21세기 개명 천지에 조선에도 없었던 어마어마한 규모의 월대를 갖게 된다.”

동아일보 기자가 쓴 칼럼은 광화문에 월대가 복원되기 전이었다. 이어 이 기자는 월대가 복원된 후에 다시 글을 올렸다.

“광화문 월대가 복원됐다. 월대 복원 권고는 유홍준 명지대 석좌교수가 문화재청장이던 2006년 문화재위원회에서 처음 나왔다. 광화문의 위용을 강조하며 복원을 권고했다. 그로부터 4년 뒤인 2010년 광화문은 새로 복원되면서 충분히 위용을 갖췄다… 그러나 광화문 앞 도로를 모조리 없애 전근대로 돌아가지 않는 한 광화문과 도로 사이에 월대를 끼워 넣는 건 공간적 모순만 증폭시킬 뿐이다. 월대로 차선이 휘면서 차량 정체가 심해지고 교통사고가 빈발하고 있다. 횡단보도도 시야가 제한되는 위험한 곳에 설치돼 밤에는 아찔하다.”

이 칼럼은 “문화재청이 그리 똑똑하지 않다”며, “문화재청은 유홍준 청장 시절부터 박 전 대통령 글씨를 떼고 다른 글씨로 대체하는 데만 골몰해 정작 현판의 고증은 뒷전이었다”고 핀잔을 줬다. 원래 현판은 검은 바탕에 흰색 글씨였는데, 새로 복원해 내건 현판은 ‘흰색 바탕에 검은 글씨’로 바탕과 글자색이 뒤바뀌었다는 것이다.

칼럼은 또 “문화재청은 숭례문에 주변 도로를 없애 가면서 무리하게 성벽을 단 뒤 관리 능력도 부족한 상황에서 공원화까지 했다가 문을 태워 먹은 일도 있다”며, “그것도 2008년 유 청장 때 일”이라고 비판했다.

이러한 동아일보의 칼럼에 대해 최근 조선일보가 전혀 다른 시각의 칼럼을 올렸다. ‘이건희 유족이 월대 복원에 서수상(瑞獸像)을 기증한 까닭’이라는 제목의 칼럼이었다. 이 칼럼은 다음과 같이 개인의 느낌을 담아 시작했다.

“내 기억 속의 광화문은 초라하고 옹색했다. 1990년대 초까지만 해도 그것은 망한 왕조의 흔적일 뿐이었다. 당시 광화문 앞엔 폭 5~6m 좁은 인도만 있었다. 사람은 접근하기 어렵고 차만 씽씽 달렸다. 너른 광장이었던 광화문 앞을 그런 모습으로 바꾼 것이 일제의 총독부였다. 경성(京城) 근대화란 명분을 내걸고 서울 도심에 바둑판 형태의 현대식 도로 29개를 놓겠다며 1912년 경성시구개수안(案)을 발표했다. 덕분에 시원한 길이 뚫린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동시에 궁궐이 망가지기 시작했다. 전찻길을 낸다며 경복궁 담장을 허물고 서십자각을 없앴다. 만국박람회 개최를 구실 삼아 광화문에서 근정전으로 가는 사이에 있던 흥례문도 헐었다. 전각 500여 개 가운데 일제 패망 때까지 살아남은 것은 36동에 불과했다. 세자 부부의 침소였던 자선당은 통째로 뜯겨 일본으로 건너갔고 그곳에서 불타 없어졌다. 경복궁만이 아니었다. 원래 하나로 이어졌던 창경궁과 종묘도 그 사이에 종묘 관통 도로가 나며 두 조각 났다.”

칼럼은 “월대도 그 와중에 훼철됐다”면서, “그런 월대의 복원에 비판적인 견해가 있다. 망한 나라 군주의 못난 유적을 왜 차량 흐름까지 왜곡해 가며 복원하느냐고 한다”고 지적했다.

이 칼럼은 “복원된 월대의 주인은 망국의 왕이 아니라 공화국 대한민국의 국민이다. 왕이 특권을 누리던 공간에서 시민적 자유를 구가하는 곳으로 바뀌었다”면서 “월대는 청국 사신들이 드나들며 으스댔던 사대의 상징이었다는 지적도 있다. 과거에는 그랬겠지만 더는 아니다. 세계인이 찾아와 ‘엄지 척’ 포즈로 사진을 찍는 한류의 공간으로 탈바꿈했다. 이것은 우리가 만들어낸 월대의 미래다”라고 덧붙였다.

이 칼럼은 서두에 “광화문 월대가 복원되고 나서 그곳에 가봤다”면서, “일제 총독부가 한 세기 전 월대를 철거할 때 흩어지고 깨져서 복원에 쓰인 돌 대부분이 새것이었다. 난간석 중 일부와 월대 중앙의 어도(御道·왕이 다니는 길) 맨 앞을 장식한 서수상(瑞獸像) 한 쌍만 옛것 그대로였다”고 썼다 그러면서 “특히 서수상은 이건희 전 삼성 회장이 생전에 수집해 간직했던 것을 유족이 ‘의미 있게 활용되길 바란다’며 기증한 것이다. 서수상 앞에 서서 ‘의미 있는 활용’의 뜻이 뭘까 곱씹어 봤다. 최첨단 반도체를 생산하는 세계 굴지의 기업을 일군 이가 옛 문화재 보존에 힘쓴 이유도 생각했다. 단순한 과거 복원은 아니었을 것이다. 실제로 생전에 이 전 회장은 ‘문화유산의 보존은 미래를 위한 시대적 의무’라고 말했다“고 설명했다.

고 이건희 회장 유족이라면 삼성 일가일 것이다. 과연 삼성 일가에서 서수상을 기증한 것이 “월대 복원이 시대적 의무”라는 생각에 공감했기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이 칼럼이 삼성 유족 기증이라는 허울을 빌려 문화재청을 감싸려 한 것이었을까?

이종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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