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성주의 ‘박정희·김대중’-⑱] 베트남파병
[강성주의 ‘박정희·김대중’-⑱] 베트남파병
  • 강성주 전 MBC 보도국장
  • 승인 2024.01.06 06: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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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와 김대중은 한국 현대사에 큰 족적을 남긴 인물이다. 과연 후세는 이들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강성주 전 MBC 보도국장이 박정희과 김대중을 재조명하는 작업에 들어갔다. 그가 심혈을 기울인 부분들을 연재로 소개한다.<편집자주>

다행히 한국군의 베트남(월남,越南) 파병에 대한 국내의 반대는 한-일국교정상화 때보다는 덜했다. 케네디를 승계한 존슨 대통령(재임:1963~1969)은 베트남전에 적극 개입을 결정하고 동맹국들에게 지원을 요청했다.

한국은 1964년 9월 130명의 의무(醫務)중대와 태권도 교관의 파견에 이어, 이듬해 공병과 수송 등 비전투 부대 2,000명을(65.3) 파견하고 이어 해병 청룡부대와 맹호사단 등 전투부대(65.10~11)를 보내는 등 모두 6차례에 걸쳐 파병했다. 이후 1973년 3월 한국군이 철수할 때까지 한국은 베트남 주둔 한국군사령부를 사이공에 설치하고 5만명 규모의 부대를 운영했다.

사실 한국 정부는 우리 국군의 베트남파병 등을 미국 측에 먼저 제안하기도 했다. 돈이 없던 그 시절, 미국은 주한미군은 물론 한국군도 감축하려는 의도를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때는 미국이 베트남전에 본격적인 개입을 결정하기 전이라, 그냥 넘어갔다.

한국 정부는 미국이 6.25 당시 엄청난 희생을 무릅쓰고 우리를 방위해 준 역사적 사실과 한미상호방위조약의 차원에서의 미국의 요청을 가볍게 넘길 수 없었다. 그리고 구체적으로는 미국이 온 힘을 다해 베트남전을 치르고 있어, 주한미군이 한국을 떠나 베트남으로 투입될 가능성을 우려했다. 또 북한과 대치하고 있는 입장에서 우리 군인들이 실제 전쟁을 경험하는 기회를 갖고 전투역량을 높이면서 높은 사기(士氣)를 유지하게 한다는 군사적인 계산도 있었다. 경제적인 측면의 장점도 있었다. 미국은 한국군 파병에 따른 모든 비용, 병기와 탄약은 물론 장병들의 월급까지 모든 비용을 미국이 부담했다. 또 미국은 베트남에서 시행한 많은 건설공사에 한국 회사와 인력과 자재의 사용을 약속했다.

그에 따라 한국은 1965~1973년 베트남과의 무역에서 약 2억8,300만 달러를 벌어들였다. 베트남에 파견된 군인. 노무자의 봉급과 기업이 올린 수익은 그보다 훨씬 많은 7억5,000만 달러나 되었다. (이영훈, 『대한민국역사, 나라 만들기 발자취 1845~1987』, 기파랑, 2013)

1966년 3월 7일 주한미국대사 W.G. 브라운과 이동원 외무부 장관 간에 각서가 체결된다. <한국군 증파에 따른 미국의 대(對)한국 협조에 관한 주한 미 대사의 공한>, 일명 <브라운 각서>로, 베트남에 대한 한국의 추가 파병을 조건으로 군사문제에 관한 협조 10개 항과 경제원조에 관한 6개 항 등 16개 항이 정리돼 있다. 1965년 말 당시 미군은 184,000명이 베트남에 파병됐으나, 미국 내에서 반전여론이 거세 추가 파병이 한계에 봉착하자, 미국이 한국에 증파를 요청하는 과정에서 이 각서가 태어났다. 이 각서는 한국군의 현대화를 미국이 지원한다, 북한이 한국을 침공하면 미국이 즉각 출병하도록 한미방위조약을 개정하고, 베트남에서 사용할 군수품 공급 등 한국의 남베트남 시장 진출을 미국이 보장한다는 등의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 이후 맹호부대와 청룡부대가 베트남으로 파병된다.(1965.10~11)

하지만 우리 정부는 그리 정의롭지 않은 전쟁에 젊은이들을 보냈다고 야당과 학생들로부터 공격을 받았다. 외국으로부터는 ‘미국의 용병(傭兵)’이라고 손가락질을 받는 경우가 많았다. 당시 북한과 UN에서의 표 대결을 벌이고 있던 때라, 우리 외교에는 부담이 됐다.

한-일협정이 국회에서 비준된 8월에 베트남 파병안이 국회에서 하루 먼저 비준되었다. 한-일협정을 종용했던 미국의 강력한 파병 요청을 정부가 수락한 것이다. 정부는 파병의 대가로 이른바 ‘브라운 각서’를 통하여 국군의 전력증강과 경제개발을 위한 차관 제공을 약속받았다. 그리하여 1965년에서 1970년대 초까지 55,000여 명의 전투병이 베트남 내전에 참여하였다. 베트남파병은 ‘젊은이의 피를 파는 행위’라는 야당의 비판도 있었고, 실제로 많은 장병이 그곳에서 희생 됐으며, 지금도 고엽제로 인한 각종 후유증에 시달리는 환자가 있지만, 경제발전에는 적지 않은 도움을 주었다.

베트남에는 건설업체도 진출하여 인력수출의 길이 트였으며, 전쟁이 끝난 뒤에는 그 인력과 장비가 중동으로 진출하게 되었다. 베트남 특수에 힘입어 60년대 중반 이후 경제발전이 가시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했다.(한영우, 『다시 찾는 우리역사』, 경세원, 1997)

1966.10.21. 박정희 대통령은 베트남을 방문해 ‘맹호부대 용사들’을 만나 격려한다.

위에서 언급된 브라운각서는 (Brown Memorandum)는 한국군의 베트남 파병과 파병의 댓가로 미국의 한국 지원 내용을 담은 한미 간의 각서를 말했다. 1966년 3월 7일 맺어진 이 각서가 당시 주한 미국대사 브라운(W.G.Brown)과 한국의 이동원 외무장관 사이에서 이루어지면서 이런 명칭이 생겼다.

브라운 각서의 주요 내용은 “추가 파병에 따른 비용은 미국이 부담한다. 한국 육군 17개 사단과 해병대 1개 사단의 장비를 현대화한다. 베트남 주둔 한국군을 위한 물자와 용역은 가급적 한국에서 조달한다. 베트남에서 실시되는 각종 구호와 건설 등 제반 사업에 한국인 업자를 참여시킨다. 미국은 한국에 추가로 AID 차관과 군사원조를 제공하고, 베트남과 동남아시아로 수출증대를 가능하게 할 차관을 추가로 대여한다. 한국이 탄약 생산을 늘리는데 필요한 자재를 공급한다” 등이었다. 이로 인해 한국에서는 ‘월남 특수’라고 불리는 고용증대와 경제성장이 이루어졌다.

“세계 10위권 경제’라고 하는 지금 시점에서 보면, “우리가 이렇게 어려운 시절이 있었나?”고 할 정도의 50년대 60년대였다. 그러나 1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1962~1966)이 추진되면서 상황이 달라진다. 가난한 사람은 여전히 힘들었지만, 많은 국민들의 얼굴에 약하지만, 화색이 돌기 시작했다. 경제개발의 효과가 서서히 나타난다.

60년대와 70년대에는 경제제일주의가 표방된 가운데 강력한 국가 주도의 성장정책 을 밀고 나갔다. 모든 정치적 폭압과 부정은 경제성장이라는 구호 아래 정당화되었다. 경제정책의 기본방향은 외국자본과 기술을 도입해 공업을 육성하고, 양질의 값싼 노동력을 이용하여 생산된 제품을 수출하고 자본을 축적해 간다는 전략이었다. 말하자면 수출주도형 경제발전 전략이다… 1960년 3,300만 달러에 불과하던 수출이 1966년에는 2억5,000만 달러로 증가하여 연 44%의 고속성장률을 기록하였으며, 경제성장률은 연평균 8.5%에 이르렀다. 1967년부터는 다시 제2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에 착수해 이 기간에 수출은 연평균 33.7%, 경제성장률도 연평균 10.7%(1971년 수출 10억6,000만 달러)를 기록해 경제발전에 탄력이 붙게 되었다.(한영우, 『다시 찾는 우리역사』, 경세원, 1997)

필자소개
MBC 보도국장, 포항 MBC 사장, 미국의 소리(Voice of America) 서울지국장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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