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성주의 ‘박정희·김대중’-⑲] 1963년 민정이양 선거
[강성주의 ‘박정희·김대중’-⑲] 1963년 민정이양 선거
  • 강성주 전 MBC 보도국장
  • 승인 2024.01.13 0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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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와 김대중은 한국 현대사에 큰 족적을 남긴 인물이다. 과연 후세는 이들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강성주 전 MBC 보도국장이 박정희과 김대중을 재조명하는 작업에 들어갔다. 그가 심혈을 기울인 부분들을 연재로 소개한다.<편집자주>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은 “혁명과업이 완수되면 2년 뒤 정권을 민간에 이양하겠다”고 약속했다. 이 약속에 따라 군사정부는 62년 새 헌법안(5차 개헌)을 국민투표(國民投票)에 부쳤다(12.17). 의원내각제와 양원제였던 제2공화국 헌법의 골격이 ‘대통령 4년 중임제’와 ‘직선제’, ‘국회 단원제’로 바뀐다.

국민투표 제도는 본래 주권의 제약과 영토의 변경을 가져올 중대한 사항에 대한 찬반을 묻는 목적으로 2차 개헌(1954)에서 도입됐으나, 3차 개헌(1960.6)에서 없어졌다가, 다시 도입됐다. 이후 국민투표 제도는 개헌이나 정권의 신임 여부 등 중요한 사항을 국민들에게 직접 묻는 제도로 존재하게 된다. 구 정치인들의 정치 활동이 재개되고(63.1), 제5대 대통령선거가 실시된다(10.15). 야당은 “군정으로 병든 나라, 민정으로 바로잡자”라고 구호를 정했다.

제5대 대통령선거 포스터. 1963.10.15

군사정부 측이 민정이양에 대비해 창당한 민주공화당(1963~1980)의 박정희 후보는 470만표(46.64%)를 얻었고, 야당 민정당의 윤보선 후보는 454만표(45.09%)를 얻는 박빙의 선거결과였다. 박정희 후보가 1.55%인 15만6,028표 차이로 간신히 승리했다. ‘정지활동정화법’으로 야당의 손발을 묶어놓았고 선거자금도 엄청나게 썼지만, 결과를 보면 국민들은 5.16 군사혁명 정부가 선전하는 성과들에 대해서 그리 높게 평가하지 않고 있었다. 선거 결과가 그걸 말해준다.

기성 정치권을 대표하는 윤 후보는 “여순사건(麗順事件)의 관련자가 정부 안에 있다. 박정희 의장의 민족주의 사상을 의심한다”라고 사상논쟁(思想論爭)을 제기한 것이 큰 이슈가 된 선거였다. 박정희로서는 한번은 겪어야 할 과정이었다. 본래 기성 정치와 정치인에 대한 불신이 강했던 박정희는 속이 편치 않았다.

조국을 이 지경으로 만든 구 정객에 대한 청소없는 혁명은 무의미한 것이다. 우리만 그런 것이 아니고 이제껏 모든 혁명의 상식이다. 4.19혁명이 결실을 보지 못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청소를 직접하지 않고 남에게, 그것도 청소의 대상들에게 위임했으니 그 혁명은 ‘의거(義擧)’로 변색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박정희, 『국가와 혁명과 나』, 기파랑, 2017)

젊은 정치인 김대중은 윤 후보의 사상논쟁이 패착이 됐다고 말한다.

선거는 접전이었다. 전반에는 명분에서 앞선 윤 후보가 우세했다. 하지만 윤 후보는 결정적인 실수를 범했다. 박 후보를 공산당이라고 몰아붙인 것이었다. 이는 현명하지 못한 전략이었다… 미국의 군정과 이승만 정권 때는 반대세력을 제거할라치면 곧잘 공산당이란 올가미를 씌웠다. 윤 후보의 발언은 유권자들에게 그런 공포정치를 연상하게 했다. 미세한 국면에서 윤 후보의 이 같은 실언은 치명적이었다.(김대중, 『김대중자서전』, 삼인, 2015)

5.16쿠데타에 반대하거나 이 군사정변을 좋지 않게 바라보는 측으로서는 참으로 안타까운 선거결과였다. 민정이양 대선에 출마했던 반(反) 군사정부 계열의 후보만 단일화됐어도, 선거결과는 바뀔 수 있었다. 오재영(추풍회, 40만표), 변영태(정민회, 22만표), 장이석(신흥당, 19만표) 등 80만표가 넘었기 때문이다.

제6대 총선 투표와 개표. 1963.11.26. 중앙선거관리위원회.

대선에 이어 한달 뒤 제6대 국회의원 선거가 실시됐다(11.26). 전체 175석 가운데 민주공화당이 110석으로 제1당, 민정당(1963.6~1965.5)이 40석으로 제2당, 민주당이 14석으로 제3당이 됐다. 공화당은 야당의 분열로 32.4%를 득표하고도 과반이 넘는 의석을 차지했다. 이제 군정(軍政)이 끝났다.

63년의 대선(제5대)은 61년의 5.16쿠데타에 대한 심판이나 평가의 성격이 강했다. 표의 분포도 지역감정으로 인한 왜곡되는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표는 ‘남여북야’(南與北野)를 나타냈다.

추풍령(秋風嶺)을 기준으로 남쪽인 영호남에서는 여당인 박정희 후보를, 서울과 경기, 강원 등 북쪽은 야당 윤보선 후보 지지세가 강하게 나타났다. 충청과 부산은 두 후보에 대한 지지세가 비슷했다. 전문가들은 야당 측에서 제기한 사상논쟁의 영향으로 남북 분단의 현장인 휴전선에서 가까운 지역, 군인과 그 가족들이 많이 거주하는 지역에서, 박 후보에 대한 지지세가 약했다고 분석했다.

4년 뒤 제6대 대통령 선거가 실시됐다(67.5.3). 여당은 그대로지만, 야당은 선거가 다가오면서 분열했던 민중당과 신한당이 통합해 신민당(新民黨)이 된다(2.7). 본 선거에 앞서 야당 신민당은 윤보선, 유진오를 두고 후보 선정에 힘을 많이 쏟았다. 62년부터 실시된 경제개발 계획이 탄력을 받으면서 박정희는 윤보선과의 재대결에서 큰 표 차이로 재선에 성공한다. 박 후보는 568만표(51.44%), 윤 후보는 452만표(40.93%)를 득표했다.

4년 전 15만표 차이가 116만2,125표(10.51%) 차이로 벌어졌다. 집권 1기(63~67) 동안 박정희는 한-일협정과 베트남(월남)파병 문제를 매듭짓고, 광부와 간호사를 독일로, 농업 이민자들을 남미로 보내는 등 분주하게 움직였다. 정부는 또 1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을 큰 차질없이 추진했다. 투표 며칠 전 광주(光州) 유세에서 박정희 후보는 이런 말로 야당의 비난에 응수한다.

“야당은 우리 정부가 독재정권이기 때문에 민주주의를 살리기 위해서도 자기들이 집권해야 한다”고 말합니다만, “우리는 다 죽어가는 민주주의에 숨을 돌리게 하여살려놓았습니다. 말로만 민주주의, 민주주의 하는데, 민주주의만 먹고 삽니까? 배불러야 사는 것입니다.(남시욱, “서(徐)후보 사퇴에 여야 희비” 1967.4.28., 동아일보)

야당으로부터 ‘독재자’라고 비난을 듣던 박정희 후보의 이 말에는 실적에 대한 집권당의 자신감이 배어있었다. 제6대 대선은 박정희로서는 방어전이고 윤보선은 설욕전에 해당했다. 김대중의 관찰이다.

야당에서는 6대 대통령 후보로 윤보선 씨를 재지명했다. 그러나 4년 전과는 상황이 많이 달랐다. 한일협정 체결을 고비로 야당은 세력이 크게 약화된 반면 박 정권은 미국과 일본의 전폭적인 지원으로 자신감이 넘치고 있었다. 선거전에 돌입하자 윤보선 후보에 대한 국민의 반응은 예상대로 뜨겁지 않았다. 야권의 대대적인 지원을 받았지만, 개인적인 선호도에서 떨어졌다. 특히 한일회담이나 베트남 파병의 초강경 투쟁이 유권자들에게 좋은 인상을 주지 못했다.(김대중, 『김대중자서전』, 175페이지, 삼인, 2015)

필자소개
MBC 보도국장, 포항 MBC 사장, 미국의 소리(Voice of America) 서울지국장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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