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성주의 ‘박정희·김대중’-㉒] 미국, “보복은 안된다”
[강성주의 ‘박정희·김대중’-㉒] 미국, “보복은 안된다”
  • 강성주 전 MBC 보도국장
  • 승인 2024.02.09 06: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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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와 김대중은 한국 현대사에 큰 족적을 남긴 인물이다. 과연 후세는 이들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강성주 전 MBC 보도국장이 박정희와 김대중을 재조명하는 작업에 들어갔다. 그가 심혈을 기울인 부분들을 연재로 소개한다.<편집자주>

미국 대통령의 특사는 보통 상당한 수준의 의전을 받아온 데 비해, 밴스 특사는 냉대에 가까운 대접을 받았다. 한-미 관계가 날씨처럼 싸늘했다. 김포공항에 도착한 밴스 특사는 바로 청와대를 방문하고 싶다고 했지만, 외무부에서는 “일요일에는 대통령 면담이 어렵다”면서 막아 버렸다. 박 대통령은 그 시간 청와대 경내 경호실 지하사격장에서 사격연습을 하고 있었다.

박정희 대통령이 정부부처사격대회에서 시범을 보이고 있다. 1974.

뉴욕타임스(NYT)는 2월 13일, 밴스 특사의 한국 내에서의 활동 외에도 대통령 박정희에 대한 박스 기사를 하나 실었다. 대통령과 관련해 아무 특별한 일이 없는데, 좀 의외였다. <뉴스의 인물>(Man in the News) 코너에 실린 ‘한국의 지도자, 박정희’(South Korea’s Leader, Chung Hee Park). 이 기사는 67년 5월 한국에서 대선이 끝나고 <뉴스의 인물>에 보도됐던 ‘과묵한 한국인, 박정희’(Taciturn Korean, Chung Hee Park)와겹치는 내용이 많다.

한국의 지도자, 박정희

지난 일요일 오후 한국 박정희 대통령은 청와대 경내 관저에 이웃한 경호실 지하 사격장에서 권총과 소총 사격연습으로 한 시간 이상을 보냈다. 그리고 대통령은 자신의 사격 연습을 옆에서 지켜본 곱상한 세 번째 부인(delicately pretty third wife)에게 “이제는 어떤 비상상황에도 대처할 수 있겠다”고 말했다.

박 대통령이 자신의 사격연습 사실을 국민들에게 공개한 것은 평소의 근엄한 모습 을 감안한다면 큰 변화다. 박 대통령은 말도 없고 표정의 변화도 거의 없이, 주변 에 경호원을 거느리고 굳게 다문 입술과 검은 선글라스를 낀 모습으로 국민들에게 비치는 모습은 군 출신 대통령이다.

그러나 박 대통령은 미국 존슨 대통령이 파견한 사이러스 밴스(Cyrus R. Vance) 특사와의 면담을 앞두고 강인한 모습을 미리 보여줄 필요를 느낀듯하다. 밴스 특사는 박 대통령과의 협상이 쉽지 않았을 것이다. 대부분의 관측통들이 동의하듯이, 박 대통령이 1961년 5월 쿠데타(coup d’état)로 권력을 잡은 이후 정치적 힘을 강화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대통령 자신의 깐깐하고 강한 성격과 집념에서 비롯된 것이다. 쿠데타 당시 육군 소장이었던 박 대통령은 국가재건최고회의(Supreme Council for National Reconstruction) 부의장으로 두 달 동안 막후에 머물며 전면에 나서지 않았다. 두 달 뒤인 7월 그는 육군참모총장 장도영 중장을 최고회의 의장에서 물러나게 하고 반혁명 혐의로 재판에 넘겼다.

2년 뒤 박 최고회의 의장은 (15만 6천표 차이로) 대통령에 당선됐고, 한국을 극동의 덴마크로 바꾸기 위한 경제개발 계획에 착수했다. 박 대통령 정부는 공업 진흥 등 경제개발 계획을 추진해 꾸준한 성장을 달성했다. 1967년 그는 백만 표 이상의 표 차로 대통령에 재선됐다. 박 대통령은 3,000만 한국인들에게는 ‘박정희’(발음은 ‘복정희’에 가깝다)로 불리지만, 다른 저명한 한국인들처럼 외국인들을 만날 때는 서양식으로 성(姓)을 맨 뒤로 표기하는 ‘정희 박’으로 표기함으로써 ‘정희’라는 이름으로 불리지 않게 한다. 아주 과묵하고 무뚝뚝한 박 대통령은 한번은 기분이 대단히 좋아서 파안대소를 하면서 검은 선글라스를 벗으며 “이제 제 실물을 보셨지요”라고 썰렁한 농담을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박 대통령의 가정 생활은 일반에게 감춰져 있다. 그러나 영부인은 박 대통령이 열 살 난 아들과 10대인 두 딸 등 가족과 함께 집에 있을 때는 “마음씨 좋은 보통 사람과 같다”고 말한다.

박 대통령은 1917년 9월 30일 한국 동남쪽에 위치한 90가구 정도가 모여 사는 상 모리라는 마을에서 태어났는데, 그의 이름은 ‘빛나고 올곧다’는 뜻을 갖고 있다. 박 대통령은 먹고 살만한 농부 집안의 7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 그는 말수가 적고 부지런해 공부도 잘했다. 그는 1937년 대구사범학교를 졸업하고 소학교에서 3년 동안 교사로 근무했다. 그 후 그는 군관학교로 진학하기 위해 만주로 건너갔다. 당시 한국을 식민 지배하고 있던 일본은 영민한 그를 제국사관학교로 진학하도록 했다. 그는 2년간 더 수학한 뒤 소위로 임관된다.

1945년 해방이 되자 그는 한국군 대위로 임관된다. 그 뒤 8년간 그의 군 기록은 구체적으로 알려지지 않았다. 그는 1953년 한국전쟁에서의 공로를 인정받아 육군 준장으로 진급한다.

1948년 그는 공산주의자의 반란을 도와준 혐의로 군법회의에 회부됐으나, 동료 장 교들의 탄원 덕분에 사형을 면했다는 상당히 근거 있는 이야기도 있다. 이에 대해 박 대통령은 좌익 활동을 한 형님 친구들이 도망쳐 와, 이들을 잠시 숨겨준 일이 있었을 뿐이라고 해명한 것으로 전해진다.

한국전쟁 당시 사단 작전 참모로 복무했던 그는 일반인들에게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지만, 자기관리가 엄격하고 군인의 본분에 충실한 장교로서 군 동료들은 기억하고 있다. 전쟁 중 그는 10명 내외의 병사들을 거느리고 ‘찝차’를 타고 끊임없이 진지를 돌아다녔고, 사복은 거의 입지 않았으며, 군 작업모를 선글라스를 가릴 정도로 깊숙이 눌러쓴 모습으로 동료들은 기억했다.

1953년 휴전협정이 체결된 뒤, 박 장군은 오클라호마주 포트 실(Fort Sill)의 미군 포병학교에서 6개월간 연수를 받았다. 이때도 그는 별로 사람들과 교류하지 않았고 포병학교 내의 여러 모임이나 행사에도 거의 나타나지 않았다.

대통령에 당선된 뒤 그는 확실한 친미주의자의 모습을 유지했다. 박 대통령은 워싱턴을 방문해, 케네디와 존슨 등 두 명의 미국 대통령과 회담했다.

 

밴스 특사는 12일 박정희를 면담한다. 두 사람은 5시간 30분이나 대화를 계속했지만, 합의에 이르지 못했다.

청와대에서 밴스 특사를 접견하는 박정희 대통령, 1968.2.12.

그 뒷날부터 밴스 특사는 한국 측의 주요 인사들을 연달아 만났다. 여론을 돌리고 성난 민심을 달래는 일이 급했다. 그를 만난 이효상(李孝祥) 국회의장은 “쿠바(Cuba)의 무장공비들이 백악관을 습격했다면 미국 국민들은 얼마나 격분했겠느냐. 북한 무장공비의 청와대 습격이 우리 국민들을 분격하게 한 심정을 왜 모르느냐”고 따졌다. 박준규(朴浚圭) 국회 외무위원장은 “푸에블로호 사건 때 미 8군에 비상경계를 내렸는데, 1.21 무장공비사건 때는 왜 안 내렸는가”라고 항의했다.

한국 측과 미국 측은 고위급 대화에서 15일까지도 이견을 좁히지 못했다. 이렇게 되자, 박정희는 공동성명 발표도 거부한다. 1.21 사태 때는 보복 공격의 때를 놓쳤지만, 앞으로의 북한 도발에 대한 즉각적인 보복을 고집하는 한국 측과 북한에 대한 보복 공격을 하지 않겠다는 다짐을 받으려 하는 미국 측과는 애초부터 접점이 거의 없었다. 박 대통령의 분노와 결기가 그만큼 강했다.

하지만 밴스 특사는 방한 목적을 달성한 듯하다. 당시만 해도 미국의 위치가 월등했다. 자존심이 크게 상하는 일이었다. 16일 자 NYT 기사다.

한국, 푸에블로호 협상 용인

(서울, 한국, 2.15) 한국은 나포된 푸에블로(Pueblo)호의 반환과 생존 승조원 82명의 석방을 위해 미국이 판문점에서 북한과 가진 비밀회담에 대한 반대를 철회했다. 한국의 한 라디오방송은 유엔군사정전위원회의 미국 측 수석대표인 존 스미스(John V. Smith) 해군 소장과 북한 측 수석대표인 박정국 소장이 오늘 6차 회담을 가졌다고 보도했다. 미국 측은 지난달부터 서울 북방 50km 비무장지대에 위치한 판문점에서 계속되고 있는 이 민감한 협상에 대해 관례에 따라 언급하기를 거부했다.

한국 최규하 외무장관은 그동안 한국 측이 강력하게 반대해 왔지만, 오늘 한-미 간에 새로운 군사부문에 관한 합의가 이루어지면서 미국과 북한 사이의 접촉을 용인한다는 입장을 발표했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두 나라 간의 현안 해결을 위해 파견된 사이러스 밴스 특사가 한국 측과 오래 협의한 뒤 오늘 발표한 공동성명의 내용이 기대에 미달해 한국에서 강한 역풍이 예상된다. 이 성명에 비판적인 사람들은 오늘 발표된 성명이 1.21 사태와 1.23 푸에블로호 나포 사태에 대한 군사적 보복에는 크게 미흡하다고 느끼고 있다…

한국의 최규하 외무장관과 밴스 특사는 어젯밤 9시부터 오늘 새벽 5시까지 마지막 협의를 계속했다는 사실은 한-미 간에 견해 차이가 있음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서울 타워호텔 16층 스위트룸에서의 긴 토론이 끝나고 밴스 특사가 떠난 뒤에도, 최 외무장관은 윌리엄 포터 주한미국대사와 한 시간 반 동안 추가 협상을 진행했다.

한-미간의 공동성명은 “현재의 심각한 상황은 지난 14개월 동안 북한공산주의자들에 의한 도발이 점차 공격적이고 폭력적인 데서 기인한다”고 선언했다. 이 선언은 이어 “북한 무장공비의 청와대 습격 기도와 다른 “공격적인 행동들은 한반도의 평화를 중대하게 위협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계속된다면 한국에서 새로운 적대적 상황이 발생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또 존슨 대통령이 미 의회에 요청한 한국에 대한 1억 달러의 특별군사원조는 250만 명의 향토예비군을 창설하는데 사용될 수 있음을 암시했다.

밴스 특사는 5일 동안의 힘든 협상을 마치고 오늘 오후 미국으로 떠났다. 한 소식 통은 밴스 특사가 처음에는 이번 협상이 3~4시간이면 끝날 것으로 예상하고 있었 다고 전했다. 밴스 특사는 비행기에 오르기 전, 박 대통령과 다른 관리들과의 협상이 “아주 우호적인 분위기 아래 매우 유익했다”고 말했다. 또 오늘 공동성명에 포함되지 않은 추가 합의 여부를 묻는 질문에 대해서는 “공동성명에 포함되지 않은 합의사항은 없다”고 말했다.

미국 측은 ‘북한의 도발에 대한 즉각적인 보복’을 공동성명에 포함하자는 한국 측의 제안을 끝내 거부했다. 당시의 군사력은 한국이 단독으로 북한을 상대할 정도는 아니었다. 미국은 급한 불을 끄기 위해 더 큰 불씨를 살려 둘 수는 없었다. 밴스 특사는 그 길로 워싱턴DC로 돌아가 존슨 대통령에게 한국 방문 결과를 보고한다. 물론 가장 큰 목적이었던 ‘북한에 대한 박정희의 보복 공격을 막아냈다’는 보고였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밴스 특사도 그냥 있지만은 않았다. 성질이 좀 있어 보인다. 2001년 기밀이 해제된 문서를 보면 밴스 특사는 서울에서 박 대통령, 정일권 국무총리, 이효상 국회의장, 최규하 외무장관 등을 만난 뒤 미국으로 돌아가 작성한 출장 복명서에서 “박정희는 변덕스럽고 동요하고 있으며 술을 많이 마신다”고 적었다. 또 “박정희가 부인과 참모들에게 화가 나서 재떨이를 던진 적이 있다”고 기록한 복명서를 제출했다. 그리고 당시 서울에서 근무한 미국 관리들도 “푸에블로호 피납 후 박 대통령이 술을 많이 마신 상태에서 미국인들에게 화를 냈다”고 기록했다.(박정희 전 대통령 ‘과음·분노의 68년’, 경향신문, 2001.1.29) 대통령이고 특사고 간에 사람은 다 감정을 가진 존재였다.

필자소개
MBC 보도국장, 포항 MBC 사장, 미국의 소리(Voice of America) 서울지국장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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