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성주의 ‘박정희·김대중’-㉕] “우리도 핵 좀 가져보자”
[강성주의 ‘박정희·김대중’-㉕] “우리도 핵 좀 가져보자”
  • 강성주 전 MBC 보도국장
  • 승인 2024.03.02 0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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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와 김대중은 한국 현대사에 큰 족적을 남긴 인물이다. 과연 후세는 이들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강성주 전 MBC 보도국장이 박정희와 김대중을 재조명하는 작업에 들어갔다. 그가 심혈을 기울인 부분들을 연재로 소개한다.<편집자주>

북한의 조선노동당(朝鮮勞動黨)은 규약(規約)에서 한반도 적화통일을 당의 최종 목적으로 명시하고 있다. 중국과 같이 당 우위 체제인 북한에서 조선노동당은 집권당으로 국가보다 상위에 있으며, 북한 사회 전체를 이끌어 나가는 존재다. 이런 국가에서는 헌법보다 당 규약이 우선한다.

북한 헌법 제11조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조선노동당의 영도 밑에 모든 활동을 진행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즉 당이 결정하면 공화국의 모든 기구는 이를 집행하는 시스템이다. “당(黨)이 결정하면, 우리는 합니다!”라는 구호가 나오는 동네다.

이 조선노동당이 당 규약 서문(序文)에서 적화통일(赤化統一)을 규정하고 있다. 지난 2021년 1월 열린 노동당 제8차 대회에서 북한은 “조선노동당의 당면 목적은 공화국 북반부에서 부강하고 문명한 사회주의 사회를 건설하며 전국적 범위에서 사회의 자주적이며 민주주의적인 발전을 실현하는 데 있으며 최종목적은 인민의 이상이 완전히 실현된 공산주의 사회를 건설하는 데 있다”고 했다.

2021년 1월 열린 노동당 제8차 대회
2021년 1월 열린 노동당 제8차 대회

북한에서 노동당은 국가에 우선하므로, 노동당 규약이 헌법보다 상위의 규정이라고 할 수 있다. 노동당의 성격이나 당 조직, 당원들이 지켜야 할 규범과 활동원칙 등을 규정하고 있는 노동당 규약은 1946년 8월 28일 최초로 채택된 이래 여러 차례 수정·보완됐다. 가장 최근의 8차 당대회(2021.1.9.)에서 북한은 ‘통일전선’ 항목에서 “조선노동당은 남조선에서 미제의 침략무력을 철거시키고 남조선에 대한 미국의 정치·군사적 지배를 종국적으로 청산하며 온갖 외세의 간섭을 철저히 배격하고 강력한 국방력으로 근원적인 군사적 위협들을 제압하여 조선반도의 안정과 평화적 환경을 수호하며 민족자주의 기치, 민족대단결의 기치를 높이 들고 조국의 평화통일을 앞당기고 민족의 공동번영을 이룩하기 위하여 투쟁한다”로 바꾸었다.

이전의 노동당 규약(2016.5.9. 제7차 당대회)은 “조선노동당은 남조선에서 미제의 침략무력을 몰아내고 온갖 외세의 지배와 간섭을 끝장내며 일본 군국주의와 재침책동을 짓부수며 사회의 민주화와 생존의 권리를 위한 남조선 인민들의 투쟁을 적극 지지 성원하며 우리 민족끼리 힘을 합쳐 자주, 평화, 통일, 민족대단결의 원칙에서 조국을 통일하고 나라와 민족의 통일적 발전을 이룩하기 위하여 투쟁한다”였다.(연합뉴스, “북한노동당 규약 주요 개정 내용”, 2021.6.1.)

일반적으로 북한에서 군(軍)의 위상은 우리와 다르다. 군의 정치 참여와 개입을 엄격하게 제한하는 민주주의 국가와는 달리, 북한에서의 군은 ‘당의 군대, 혁명의 군대, 수령의 군대’(조선노동당 규약)로서 체제와 통치자를 수호하는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그래서 북한군은 영토 보전과 주민들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한다는 기본적인 임무 말고 정치적 영향력도 크고 경제적 사회적 역할도 크다. 그래서 김정일 시대에는 최고 통치기구인 군사위원회가 신설되기도 했고, 각종 큰 건설공사 등에도 군이 동원돼서 공사에 매진하기도 한다. 이런 중요한 역할 때문에 북한의 주류계층인 노동당 당원이 되기 위해서는 군 복무는 필수적인 경력이 되고 있다.(통일부 북한정보포털, 북한군의 특성)

또 당 규약 통일전선(統一戰線) 관련 부분을 보면, “조선노동당은 남조선에서 미제의 침략 무력을 철거시키고 남조선에 대한 미국의 정치·군사적 지배를 궁극적으로 청산하여 온갖 외세의 간섭을 철저히 배격하고 강력한 국방력으로 근원적인 군사적 위협들을 제압하여 조선반도의 안정과 평화적인 환경을 수호하여 민족 자주의 기치, 민족 대단결의 기치를 높이 들고 조국의 평화통일을 앞당기고 민족의 공동번영을 이룩하기 위하여 투쟁한다”고 했다.

한때 이 규약 개정에 대해 국내 일부에서는 북한이 남조선 혁명을 통한 적화통일을 포기했다고 주장하기도 했지만, ‘강력한 국방력으로 조국의 평화통일을 앞당긴다’고 말하는 북한의 의도를 알만한데도 억지를 피운다는 여론에 밀려 조용해졌다.

이것은 최근의 일이고 박정희 대통령은 눈앞에서 북한의 무력 도발에 대처하면서 우리의 한계를 절감하고, 그 뿌리를 탐색했다. 박 대통령은 1.21사태가 발생하자, 북한에 대해 즉각적인 군사보복을 먼저 구상했다. 자신이 군 출신이면서 주변의 주요 직책에 있는 군 출신 인사들의 조건반사적인 생각이었다. 그러나 작전권을 가진 주한미군은 한국군 단독 작전도 못 하게 막았고, 한-미 양국군의 합동 보복작전은 어림도 없었다.

그 뒤 박정희는 북한의 도발에 대해 “미친개에게는 몽둥이가 약”이라는 악에 받친 언사를 사용하기도 했지만, 북한의 잦은 도발에 대해 적절한 반격이나 보복이 미국에 의해 저지나 방해를 받는 구조적인 상황을 분(憤)하고 안타깝게 여겼다.

지난 1976년 8월 18일 북한군에 의한 도끼만행사건 발생 당시 현장 모습.(자료 사진=유엔군사령부 제공)
지난 1976년 8월 18일 북한군에 의한 도끼만행사건 발생 당시 현장 모습.(자료 사진=유엔군사령부 제공)

1976년 8월 18일 판문점 공동경비구역 안에서 초소를 가리는 미루나무를 제거하던 한국군과 미군에 대해 북한 군인 30여 명이 도끼로 공격해 미군 장교 2명이 사망하고 한국군 5명이 부상한 사건이 발생했다. 박 대통령은 이 사건 보고를 받고는 “미친개에는 몽둥이가 약이다. 내 철모와 군화를 즉시 갖고 오라”고 지시하면서 불같은 분노를 표출했다고 한다.

그 이틀 뒤 박 대통령은 제3사관학교 13기 졸업식에서 서종철 국방부 장관을 통해 “우리가 참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 미친개에는 몽둥이가 필요하다. 우리가 그들로부터 언제나 일방적으로 도발을 당하고 있어야할 아무런 이유도 없다”고 말했다. 보복공격을 통해 도발을 응징하지 않을 경우, 이러한 북한의 도발이 일상화되는 것을 안타깝고 분하게 여긴 박 대통령은 1.21사태 직후부터 전작권 환수를 군부에 지시하고 자주국방의 길로 매진한다.

박 대통령은 1.21사태를 계기로 6.25전쟁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미군에게 넘긴(1950.7.14) 군의 작전권(作戰權)을 되찾아야겠다는 결심을 하고 이후 자주국방의 길을 강하게 추구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1968년 1.21사태, 1.23 푸에블로호 나포, 10~12월 울진삼척무장공비 침투사건 등을 겪으면서 이후 국방비를 대폭 증액하고 1972년부터 자주국방(自主國防)이라는 구호를 내걸고 국방주권의 확립에 나선다. 정부의 중화학공업육성 정책도 이와 밀접한 관련성을 갖고 있다. 박정희 대통령은 한국군 독자적인 핵무기 개발에 대한 의지를 표할 만큼 자주국방, 작전권 환수에 강한 의지를 가졌다. 이후 민주화 이후 실시된 1987년 대선에서 노태우 후보가 선거공약으로 작전통제권 환수를 내걸었다.

당시 노태우는 1968년의 1.21사태, 1983년 10월의 버마(현 미얀마) 랑군 폭파사건 때도 미국의 제지로 한국은 보복공격을 하지 못한 사실을 지적하고, 북한의 도발과 군사적 위협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제때 적절한 응징공격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지만, 미국이 전쟁 발발을 우려해 ‘보복공격 금지’만 외치는 현실을 바꾸고 싶어했다. 하지만 작전권 반환은 그의 임기 중에는 실현되지 못했고, 전시작전권(전작권)이 아닌 평시 작전권(평작권)은 김영삼 대통령 집권 시기인 1994년 12월 1일부로 환수했다.

김영삼 대통령은 이를 두고 “44년 만에 작전권을 환수한 것은 우리 자주국방의 기틀을 확고히 하는 역사적 사실이며 제2의 창군(創軍)이라고 할 수 있다”며 크게 의미를 부여하기도 했다. 미군이 갖고 있는 전시작전권은 이후 북핵 위기가 발생하면서 김대중, 노무현, 이명박, 박근헤, 문재인 윤석열 등 역대 정권에따라 환수 의지와 준비에 차이가 크고, 국민들도 ‘전작권 환수’에 대한 의견이 양분돼 있어, 2024년 현재에도 양국 간에 논의가 계속되고 있다.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수호하는 최종 책임자, 국군통수권자로서 박 대통령은 핵무기 개발에도 관심을 갖고 비밀리에 이를 추진했다. 1969년 닉슨의 괌 독트린(Guam Doctrine)이 발표된 뒤였다. 김종필의 증언이다.

김종필증언록
김종필증언록

그 즈음 박 대통령은 극히 제한된 주변 사람들을 시켜 핵무기 개발 능력을 갖추는 일을 추진하고 있었다. 대통령이 ‘우리도 핵 좀 가져보자’는 생각을 한 건 “아시아 의 방위는 아시아인이 맡으라”는 닉슨 독트린이 발표된 1969년 7월부터다. 1970년 들어 ‘주한미군 감축계획’ ‘5년 후 주한미군 완전 철수’라는 미국의 입장이 잇따라 통보되던 어느 날 박 대통령은 내게 이렇게 말했다. “우리 원자폭탄을 연구해야겠어, 미군이 언제 떠날지 모르는데 우리를 지켜줄 무기가 필요해.” 나도 대통령의 집념에 동의했다.(김종필, 『김종필증언록』, 와이즈베리, 2016)

참고로 닉슨독트린(Nixon Doctrine)은 발표 장소의 이름을 따서 괌 독트린(Guam Doctrine) 이라고도 불린다. 닉슨 미국 대통령이 1969년 7월 25일 발표한 외교정책을 말한다. 닉슨은 이 정책을 이듬해 의회로 보내 공식적인 정책으로 채택한다. 닉슨은 미국이 아시아 지역에서 최근 3차례(태평양 전쟁, 6.25전쟁, 베트남전쟁)나 전쟁을 하는 등 너무 개입해 국가적 자원의 소모가 심했다고 진단했다. 그래서 앞으로 아시아의 방위는 아시아인들의 손에 맡기고 미국은 핵전쟁과 같은 공격에만 개입하려 한다고 밝혔다. 그래서 베트남전에서도 손을 떼고, 한국에서도 주한미군을 철수시키겠다고 했다.

김종필은 제3공화국의 2인자이자 박정희의 혁명동지였다. 이후 청와대는 중화학공업과 방위산업을 전담하는 제2경제수석비서실을 청와대에 설치하고, 상공부 오원철(吳源哲,1928~2019) 차관보를 수석비서관(1971.11~1979.12)으로 임명한다. 그리고 국무총리를 위원장으로 하는 ‘중화학공업추진위원회’를 구성해 중화학공업 육성에 필요한 외자 도입 등 관련 업무를 맡긴다.

대통령의 생각은 명료했다. ‘북한의 무력 도발이 발생할 경우 적절한 보복공격을 가해서 이들의 도발 의지를 꺾을 필요가 있지만, 현실적으로 국군의 작전지휘권이 주한미군사령관에게 있다. 미국은 남북한의 도발과 보복이 자칫 대규모 전쟁으로 번질 위험을 우려해, 한국 측의 반격을 막기만 한다. 이것이 오랫동안 쌓여, 북한의 간덩이가 부었다’고 생각했다.

필자소개
MBC 보도국장, 포항 MBC 사장, 미국의 소리(Voice of America) 서울지국장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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