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성주의 ‘박정희·김대중’④] 정치지망생 김대중 
[강성주의 ‘박정희·김대중’④] 정치지망생 김대중 
  • 강성주 전 MBC 보도국장
  • 승인 2023.09.22 1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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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와 김대중은 한국 현대사에 큰 족적을 남긴 인물이다. 과연 후세는 이들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강성주 전 MBC 보도국장이 박정희과 김대중을 재조명하는 작업에 들어갔다. 그가 심혈을 기울인 부분들을 연재로 소개한다.<편집자주>

김대중은 명문 목상(木商)고등학교를 졸업하고(1944) 전남기선주식회사에 취직해 근무했고, 해방 후에는 건국준비위원회(건준) 목포 지부에 이어 좌우합작을 주장하는 조선신민당에서도 활동했다. 

조선신민당은 조선독립동맹(1942 결성, 화북조선독립동맹)의 김두봉 위원장 등이 1946년 2월 16일 연안파 공산주의자와 함께 평양에서 창당한 공산주의 계열의 정당이다. 조선신민당은 창당 6개월 뒤인 1946년 8월 29일 북조선공산당과 합당하면서 소멸됐다. 조선독립동맹은 중국의 옌안(延安)에서 활동하던 공산주의자들의 정치집단으로, 당초 이 집단은 중국에서의 항일투쟁경력을 내세워 남북한을 통괄하는 정당을 독자적으로 결성하려고 했다. 이에 따라 독립동맹은 중앙본부를 평양에 두고, 간부 여러 명을 서울에 보내 경성특별위원회를 만드는 등 정치 활동을 본격화했다. 

이후 독립동맹은 경성특별위원회를 남조선신민당중앙위원회로 개칭하고 북한 지역 신민당은 주석 김두봉, 남한지역 신민당은 위원장 백남운 등으로 이원화된 조직으로 변하였다. 정강정책은 친일파와 반민주주의자를 제외하고 민족통일전선을 구축해 조선민주공화국을 수립하여 일제와 친일파로부터 몰수한 대기업을 국영화하고 소작제를 폐지하는 등 민족경제를 재편성하려고 했다. 그러나 제대로 활동을 하기도 전에 공산당, 인민당, 신민당과의 합당사업이 본격화되면서 남조선노동당으로 바뀌었다.

김대중은 또 이 무렵(1946) 목포해운공사라는 회사를 설립해 금융조합연합회(지금의 농협)와 계약을 맺어 연안 항로에서 양곡 수송 사업을 활발하게 꾸려갔다. 그는 6.25 전쟁 중에는 목포 지역 공산당 패거리로부터 총살을 당할뻔하기도 했고, 지역 언론사(목포일보)도 인수해 운영했다. 김대중은 당시 사업이 번창해 목포에서 ‘찝차’를 타고 다니는 몇 명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1.4 후퇴로 정부가 부산에 꾸려지자, 김대중도 사업 무대를 부산으로 옮긴다. 나라는 전쟁 중이었지만, 김대중 개인으로서는 나름 성공적인 사업가로 자리를 잡았고, 정치를 통해 세상을 바꾸겠다는 열망이 강했다.

1952년 5월 피난 수도 부산에서 ‘정치파동’이 일어난다. 당시 대통령은 국회에서 간접선거로 뽑았고(1948), 이승만 대통령의 임기는 1952년 7월까지였다. 그런데 1950년 5월 30일에 실시된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이승만과 정치적 견해가 다른 야당 의원들이 60%나 당선됐다. 이 대통령은 국회에서 간접선거 방식으로는 재선(再選)이 어려운 상황이 됐다. 그래서 대통령은 국회가 아니라 국민이 직접 뽑는 직선제(直選制)로의 개헌을 원하고, 대통령과 뜻이 다른 국회에서는 다수가 의원내각제(議員內閣制)로의 개헌을 원하고 있었다. 

*** 6.25 전쟁이 발발하자 정부는 수원, 대전, 대구를 거쳐 부산을 임시수도로 했다. 정부는 1950.8.18~10.27 그리고 1951. 1. 4.~1953. 8. 14까지 부산에 머물렀다. 부산 피난국회의 모습.(사진)
6.25 전쟁이 발발하자 정부는 수원, 대전, 대구를 거쳐 부산을 임시수도로 했다. 정부는 1950.8.18~10.27 그리고 1951. 1. 4.~1953. 8. 14까지 부산에 머물렀다. 부산 피난국회의 모습.

여기서 나온 타협안이 ‘대통령은 직선제, 의회는 양원제’였다. 이러한 개헌안을 통과시키기 위해 대통령은 공비(共匪) 소탕 명목으로 계엄령을 선포하고(5.25), 공산주의자 혐의가 있다면서 국회의원 12명을 구속하는 등 험악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이런 일련의 정치파행을 ‘부산 정치파동’이라고 부른다. 이런 억지 개헌 과정을 통해 이승만은 재선에 성공한다.

공산주의자로부터 침략을 당해 부산까지 피난 내려온 정부가 정신을 못 차리고 집권 연장을 위해 이런 난리를 피우는 모습을 지켜본 김대중은 ‘정치가 제자리를 찾으면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게 될 것’이라는 믿음을 굳게 갖게 된다. 정치에 뜻을 세운 김대중은 6.25 전쟁이 끝난 직후 실시된 1954년 제3대 국회의원(민의원) 선거에 입후보한다. 

당시 헌법에는 민의원과 참의원 등 양원(兩院)을 구성하도록 했으나, 이승만 대통령은 여러 이유로 양원 구성을 미루고 있었다. 그래서 국회는 상원 격인 참의원(參議院) 없이, 하원 격인 민의원(民議院)만 구성돼 있었고, 국회의원 선거도 ‘민의원 선거’로 불렀다. 김대중이 출마한 지역은 전남 목포였다. 정당은 무소속으로 출마했다. 그는 10명 중에서 5등으로 낙선했다. 김대중의 나이 30살 때였다.

오래전부터 나는 정치에 비상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나름대로 정치적인 소질을 지녔다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내가 정치를 해야겠다고 결심을 하게 된 것은 하나의 사변과 또 하나의 사건을 겪으면서다. 바로 한국전쟁과 부산 정치파동이었다. 나는 한국전쟁을 겪으며 지도자가 거짓말하는 것을 보았다.(김대중, 『김대중자서전』, 2015)

제3대 국회의원선거(1954) 종로구 갑 선거구 벽보.(사진) 청년정치인 김대중

낙선 후 오기가 생긴 김대중은 더 큰 정치를 하겠다며 아예 목포를 떠나 서울로 이사한다(1955). 그리고 김대중은 민주당(民主黨) 신파에 입당해(1956) 장면(張勉)과 인연을 맺고, 가톨릭 세례까지 받는다. 김대중은 1957년 7월 13일 천주교 서울대교구청 노기남 주교의 집무실에서 윤형중 신부의 주례로 세례성사를 받았다. 대부(代父)는 뒤에 총리를 지낸 장면 박사였다. 

당시 민주당 신파는 신익희, 장면, 박순천, 김대중이 카톨릭이고 동교동 가신들도 개신교인 한광옥 등 몇몇을 제외한 핵심들은 김대중을 따라 카톨릭 세례를 받았다. 신파와 대치한 구파는 조병옥, 윤보선, 김영삼 등은 개신교였고, 상도동 가신들도 대부분 개신교였다. 

김대중의 가톨릭 세례명은 토마스 모어(Thomas Moore)로 <유토피아>를 쓴 영국의 정치가이자 인문주의자로, 헨리 8세에게 반역자로 몰려 사형당했다가 뒷날 성인으로 추대된 인물이다. 김대중은 “왜 하필 목 잘린 사람의 이름을 내 세례명으로 지어 주는가 하고 심장이 내려앉았다”고 자서전에서 기록하고 있다.

김대중은 서울 남영동에 집을 마련하고, 부인 차용애(車蓉愛)는 미장원을 차렸다. 선거를 치른다고 재산도 제법 까먹었을 때였다. 

김대중의 민주당 입당성명서(1956.9.25). 언론사 정치부에 보내는 보도자료 형식이다. “숙계(肅啓:삼가 아룁니다) 시하(時下:요즈음) 국향지절(菊香之節:국화꽃이 피어 향기 가득한 시절)에”로 시작하는 입당성명서는 당시 널리 사용하던 한문이 많이 섞인 근엄체(謹嚴體) 문장으로 지금으로서는 이해하기가 어려울 정도다. 자료=연세대학교 김대중도서관(사진)

4년 뒤(1958) 제4대 총선거에서 김대중은 강원도 인제군(麟蹄郡)에서 출마했다. 인제는 38선 이북으로 6.25 전쟁 전에는 북한 땅이었다가 6.25 전쟁 때 수복돼 우리 땅이 된 지역이었다. 고향 목포에는 이미 다른 후보가 자리를 잡고 있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당시에는 부재자투표제도가 없어 김대중은 인제에 주둔한 젊은 군인들과 그 가족들이 부패한 현실에 실망해, 야당을 지지할 것으로 판단하고 연고도 없는 인제를 선택했다. 소위 ‘지역감정’이란 것이 생기기 전의 일이었다. 그는 여당 측의 방해를 뚫고 천신만고 끝에 등록하긴 했으나 등록 무효 처리가 돼, 선거에는 참여할 수가 없었다. 김대중은 34살 젊은 나이였고,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하기 위해 읍내 군청 인근의 군 사단장(師團長) 숙소를 찾아갔다. 

등록은 무효로 처리되었고, 내 꿈도 산산조각이 나버렸다. 서럽고 분통이 터졌지만, 어쩔 수 없었다. 서울에서 멀리 떨어진 인제군에서 일어났지만, 그날 일은 ‘후보 등록 방해사건’으로 언론에도 크게 보도되었다. 나는 군청 근처에 있는 육군 사단장 관사를 찾아갔다. 군은 이 억울함을 알아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였다. 사단장은 자리에 없다고 했다. 정확히 기억은 나지 않지만 아마도 나를 피했던 것 같다. 당시 사단장은 박정희였다. 우리의 첫 대면은 이렇게 빗나갔다.(김대중, 『김대중자서전』, 2015)

김대중은 그 뒤 한 번 더 사단장 관사를 찾았으나, 부재중이어서 만나지 못했다. 당시 국회의원 후보 등록을 위해서, 후보자는 해당 지역구 유권자 100명의 추천이 필요했는데, 추천자의 이름 호적 주소 생년월일 등 어느 한 글자만 틀려도 해당 추천자는 실격이 되고 또 자유로이 추천 취소를 할 수 있도록 하고 있었다. 그리고 다른 후보와의 이중 추천을 금하고 있었다. 

당시 지역에서는 등록서류를 경찰이 정체불명의 괴한에게 빼앗기는 일도 드문 일이 아니었다. 전방지역이고 수복지역인 인제에서는 경찰과 동장이 지역 주민들의 도장을 비료배급 등에 필요하다는 이유로 한꺼번에 거두어 갖고 있어서, 김대중 후보 측은 호박 꼭지에 도장을 파거나 등사원지에 인주를 묻혀 찍는 등의 방법으로 등록을 시도했으나, 끝내 등록 무효가 됐다. 김대중은 “이게 말이 되는 일이냐?”는 답답함을 호소하기 위해 인근 군 사단장의 숙소를 찾았던 것이다. 당시 지역에서 경찰서장이나 사단장은 아주 영향력 있는 존재였다.

박정희는 1957년 7월 인제 지역의 육군 제7사단장을 맡았고, 1959년 3월 육군 소장으로 진급하고 몇 달 뒤, 제6 군관구사령관(서울)으로 부임하기 위해 인제를 떠난다. 

*** 1960년대 인제읍 전경. 주민들은 “60년대 인제읍 강변에는 작은 활주로와 군부대가 주둔했고, 군인극장까지 있어, 인제읍 4거리 주변은 항상 군 장병들로 가득했다”고 회상한다.(사진)
1960년대 인제읍 전경. 주민들은 “60년대 인제읍 강변에는 작은 활주로와 군부대가 주둔했고, 군인극장까지 있어, 인제읍 4거리 주변은 항상 군 장병들로 가득했다”고 회상한다.(사진)

김대중은 ‘등록무효’가 너무 억울했다. 그는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 선거 무효소송을 냈고, 대법원은 선거무효를 선고했다(1959.3). 그리고 보궐선거가 실시됐으나, 그는 다시 떨어졌다. “김대중이 빨갱이 활동을 했다”는 흑색선전에 그는 무너졌다. 김대중의 생애 상당 기간 따라다닌 ‘빨갱이’라는 낙인찍기는 이때부터 시작된다.

1959년 6월, 강원 인제 보궐선거의 주인공은 국회의원 후보가 아니라 찬조연설자였다. “김대중과 나는 같은 세포 조직에 있었습니다. 그는 틀림없는 공산당원입니다. 김대중과 죽마고우인 내가 말하는 것이니 믿으십시오.” 주민들은 그 말을 믿었다. 다른 쟁점은 파묻혔다. 민주당 국회의원 후보 김대중은 낙선했다.(안수찬 기자, “청년기부터 평생을 따라다닌 낙인 ‘빨갱이’”, 한겨레 21, 2009.8.27.)

김대중은 자서전에서 이 두 사람 이름을 적었다. 50년이 지나 기억이 희미할 텐데도, 그 두 사람이 ‘홍익선’과 광양 출신 ‘이도선’이라고 했다. 홍익선은 구면이지만, 이도선은 얼굴 한번 맞대본 적이 없는 사이인데도 이렇게 말했다고 했다.

“김대중과 나는 함께 자랐습니다. 서로 고추까지 만지면서 컸는데 왜 모르겠습니까? 그는 틀림없는 공산당원입니다. 내가 오죽하면 여기까지 와서 호소하겠습니까. 공산당에 속지 마십시오.” 이도선은 눈물까지 흘리며 그럴듯하게 호소했다. 6.25 수복지역으로 최전방 인제는 민간인들도 거의 북쪽 출신이라서 ‘반공’으로 뭉쳐있었다. 총을 들고 맞서있는 현역 군인들은 말할 필요도 없었다.(김대중, 『김대중자서전』, 2015)

이 보궐선거 기간 중 이런 일도 있었다고 김대중은 기록을 남겼다.

군대에 납품하는 마산 출신 정영극이라는 사업가가 있었다. 야당을 지지했고 나를 좋아했다. 그가 지역사회에서는 거의 요정이라 할 만한 음식점에서 한턱을 냈다… 흥이 무르익을 무렵 나는 내일이 걱정되어 자리를 빠져나왔다. 숙소에 돌아와 막 자리에 누웠는데 누군가 방문을 열었다. 우리 지구당 부위원장이었다. “위원장님, 여기 미인을 모셔 왔습니다. 오늘 저녁 함께 지내십시오” 그는 웬 젊은 여자를 방으로 밀어 넣더니 도망치듯 사라져버렸다… 할 수 없이 방에 들어온 여자에게 내 처지를 얘기하고 돌려보냈다. 그러고 나서 다시 30분이나 흘렀을까 다시 방문이 벌컥 열렸다. 정복을 입은 경찰이 불쑥 나타나 방안을 살피더니 황급히 거수경례를 올려붙였다. “아이구, 실례했습니다. 저는 순찰 나온 경관입니다.” 일어나 곰곰 생각해 보니 뭔가 짚이는 게 있었다. 그 경찰관은 여자와 함께 있는 현장을 덮치러 온 게 분명했다.(김대중, 『김대중자서전』, 2015)

대통령 임기를 마친 이듬해에 집필한 자서전에서 이런 자세한 기록을 남긴 이유가 따로 있을까? 35살 한창나이에 많이 놀라고 한(恨)이 맺혔던 듯하다. 김대중은 대북 확성기 방송을 하듯이 군부대 쪽으로 스피커 방향을 맞추고 연설도 하는 등 분투했으나, 보궐선거에서도 낙선한다. 김대중은 1954년 목포, 1958년 인제(麟蹄), 1959년 인제 보궐선거에서 계속 떨어졌다. 

이때 선거운동을 도왔던 정치인 김상현은 김대중이 큰 정치인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인제 선거’ 때문이라면서 이렇게 평했다. “사람들은 이기는 것만 하는데 김대중은 지는 싸움을 스스로 선택했거든, 두 번 세 번 계속 떨어졌지만 국민들은 김대중을 알게 되었어. 전투는 백번 지더라도 전쟁에서 이겨야 하지. 이것이 전략가야. 그런 면에서 뛰어난 전략가였어.”(김대중, 『김대중자서전』, 2015)

그는 앞으로도 더 떨어질 것이다. 지금도 그렇겠지만, 당시 선거에서는 돈이 많이 들었다. “한 번만 출마해도 기둥뿌리가 뽑힌다”는 말이 돌 때였다. 연거푸 낙선해 빈털터리가 된 김대중은 부인마저 잃게 된다(1959.8.28). 옛말, 복무쌍지 화불단행(福無雙至 禍不單行), “복은 짝지어 오지 않고, 화는 홀로 다니지 않는다”가 맞는 말이었다.

아내 차용애가 세상을 떴다. 세상이 온통 푸르른 여름의 끄트머리였다. 돌아보면 아내에게 너무 많은 것을 받았는데, 그것을 한 번도 갚지 못했는데 내 곁을 떠났다. 아내는 자주 가슴앓이를 했다. 그날도 가슴앓이가 심해 약을 먹었는데 그것이 어찌 잘못되었는지 혼수상태에 빠졌다. 마침 집에 있던 나는 의사를 부르러 뛰어나갔다. 의사와 함께 집에 오자 아내는 숨져 있었다. 부러울 것 없는 부잣집 딸을 데려와 고생만 시켰다. 병이 났어도 제대로 치료 한 번 받지 못하고 저세상으로 갔다. 나는 통곡했다.(김대중, 『김대중자서전』, 2015)

첫 부인 차용애(1927~1959)와 두 아들 홍일(1948~2019), 김홍업(1950년생:왼쪽)(사진)

자서전에서 김대중은 ‘목상’(木商) 동기 차원식의 여동생 차용애(1927~1959)를 처음 봤을 때의 황홀했던 기억도 적어 놓았다.

1944년 여름이었다. 회사 사무실 밖에 나와 서 있는데 어떤 젊은 여자가 양산을 쓰고 지나갔다. 하얀 피부에 머리는 단정히 빗어 넘겼으며 하얀 원피스 차림이었다. 여름 햇살에 눈이 부셨지만, 그녀는 더 눈부셨다. 얼마나 예쁜지 눈이 번쩍 띄었다. 첫눈에 반해 버린 것이다. 목포에서 그렇듯 아름다운 여인은 본 적이 없었다.(김대중, 『김대중자서전』, 2015)

그러나 어쩔 것인가? 하늘이 맺어주고, 이 땅에서의 인연이 다 돼, 하늘이 데려갔으니 어쩔 것인가? 

필자소개
MBC 보도국장, 포항 MBC 사장, 미국의 소리(Voice of America) 서울지국장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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