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영훈의 문화人] ‘52살 난 아침이슬’… 김민기와 가왕 조용필이 만나 사연
[최영훈의 문화人] ‘52살 난 아침이슬’… 김민기와 가왕 조용필이 만나 사연
  • 최영훈 전 동아일보 편집국장
  • 승인 2023.10.25 10:56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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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가수 김민기와 가왕 조용필이 만나 사연

언론인으로 폭넓은 행보를 보여온 최영훈 전 동아일보 편집국장은 공연 등 문화활동에 대해서도 깊은 관심과 독특한 견해를 자랑한다. 동아일보 퇴임 후에는 SNS를 통해 예리한 통찰을 담은 글들을 쏟아내고 있다. 우리 문화인사에 대한 그의 논평을 연재한다.<편집자주>

김민기의 ‘아침이슬’은 1971년 6월 30일 세상에 나온다. ‘아침이슬’은 가요라고 하기에는 너무 맑고, 애절하고, 문득 최루탄 냄새까지 코에 스민다.

노래가 나온 지, 50년을 맞은 2021년에 노래를 기념하자며 행사까지 준비했을 정도였다. 이 노래는 어둡고 엄혹한 독재 시절, 힘든 젊은 가슴들을 후벼 팠다.

‘아침이슬’은 극단 학전의 대표 김민기가 작사 작곡한 노래다. 경기여고와 서강대를 나온 재원 양희은의 데뷔곡이기도 하다. 얼굴 없는 가수였던 작사 작곡자나, 부른 이도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구전가요로 일찍이 대학가에 퍼져나갔다.

청아한 양희은의 목소리에 실린 가사가 압권이다. 초반 암울한 시대를 소묘하다, 차츰 독재의 폭압을 은유하고 마침내 투쟁의 깃발을 높이 드는 듯했다.

작사 작곡을 한 김민기는 대단한 음유시인이다. 그 탓에 1975년 금지곡이 된 뒤 5공 때 금지곡으로 묶였다. ‘아침이슬’은 1987년 민주화 항쟁 뒤 비로소 해금돼 방송을 탈 수 있었다. 이후 민중가요의 대표곡으로 이어져 왔다. 보수파 당대표나 대통령들이 이 노래를 부르느냐, 행사 때 합창하느냐도 늘 논란이었다.

1971년에 발표된 김민기의 1집 음반(왼쪽)과 양희은의 1집 음반 표지. '아침이슬'이 자신들만의 버전으로 두 음반에 실려 있다.
1971년에 발표된 김민기의 1집 음반(왼쪽)과 양희은의 1집 음반 표지. '아침이슬'이 자신들만의 버전으로 두 음반에 실려 있다.

대중가요 평론가 강헌의 얘기를 들어보자. 그는 한 신문 인터뷰에서 ‘아침이슬 50주년’ 이야기를 하다가 재미있는 얘기를 꺼냈다. “내 인생 가장 감동적이고 아름다웠던 순간이었다”면서, 김민기와 조용필의 연을 화제에 올린 것이다.

묘하게도 조용필과 김민기, 양희은은 한 살 터울이다. 조용필은 1950년, 김민기는 1951년, 양희은은 1952년생이다. 비슷한 나이로 세 사람은 동시대를 살았던 거다.

결은 달랐지만 이들을 연결해준 건 ‘아침이슬’이다. 언제인가 조용필이 방송에 나와 아침이슬을 부르는 걸 봤다. 가왕답게 잘 불렀던 것 같다. 그러나 아침이슬을 제일 잘 부르는 건, 역시 청량한 고음의 양희은이라는 생각이다. 그다음은 작사 작곡가인 김민기의 낮게 읊조리는 듯한 창법 노래다. 다음은 강헌의 회고다.

“1997년 엄청 추운 겨울날이었죠. 용필이 형과 술 한잔할 때였습니다. 문득 가왕 조용필이 가장 존경하는 가수가 누구인지 궁금해졌어요. 그래서 ‘형이 가장 존경하는 가수는 누군가요?’라고 물어본 거죠. 속으로는 신중현이나 김홍탁을 얘기할 거라 생각했어요. 근데 깜짝 놀랐어요.”

그때 조용필이 입 밖에 꺼낸 사람이 바로 김민기였다. 전혀 예상 밖이라 강헌은 돌멩이로 뒤통수라도 맞은 듯했다. “그래서 ‘잘 아세요?’ 물었더니 ‘본 적도 없다’고 하더라고요.” 당연히 “왜, 존경하는지?” 물었다. 그러자 조용필은 ‘신념을 가진 예술가들은 존중해야 한다’는 취지로 말했다는 것이다. 그때 강헌은 “감동이었다”며 무릎을 쳤다.

동아일보 선배인 이도성 형 덕분에 김민기를 몇 차례 만났다. 뒤에서 얘기하겠지만 두 사람은 오랜 지기다. 그러나 필자는 김민기의 육성 노래는 단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다. 이도성 형의 환갑잔치 때 김민기를 본 게 마지막이다. 당연히 그때도 노래는 하지 않았을 것이다.

김민기는 묵묵히, 물어보지 않으면 말도 없이 그저 술잔만 기울인다. 나는 그 자리에 몇 시간 있다가 먼저 일어났다. 그전에도 후배의 한옥 집 등에서 이도성 형을 부추기면 김민기는 술자리를 파하고 왔다. 그럴 때, 장난기가 발동해 “노래하나 해달라”고 한다. 하지만 그는 씩 웃는다. 한다 안 한다 말도 없이 그저 술잔만 기울였다.

김민기의 육성 노래가 어떤지 나는 모른다. 강헌이 용케도 아침이슬의 민기와 가왕 용필을 만나게 한다. ‘김민기를 만난 적 없는 조용필’과 ‘조용필을 만난 적 없는 김민기’를 만나게 한다.

강헌은 (둘을 위해) 만남 자리를 주선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번쩍 들었다. 하지만, 두 사람의 의향을 가늠할 수가 없었다. 일단 가왕 조용필은 김민기를 존경한다 했으니 ‘OK’ 한 셈이라 김민기의 의중이 중요했다.

얼마 뒤 강헌은 서울 대학로 극단 학전 근처 술자리에서 김민기를 만나 물었다. “민기 형, 조용필 어떻게 생각해요?” 김민기는 즉답을 했다. 강헌은 ”또 한 번 놀랐죠. 민기 형이 이렇게 말하는 거예요. ‘내가 싫어한다고 말할 줄 알았지? 실은 나 조용필 좋아한다’”고 당시 대화를 밝혔다. 농을 즐기지 않는 민기가 너스레까지 떨었던 것이다.

당연히 “왜 좋아하는지?” 이유를 물었다. 그랬더니 “시인 김지하가 서대문 교도소에서 갇혔을 때 ‘조용필 노래를 듣고 큰 위안을 받았다’고 내게 고백한 적이 있다”고 털어놨다고 한다. 그때 김민기는 “조용필 노래의 힘을 느꼈다”고 했다.

김민기(왼쪽)와 조용필[사진=위키백과]
김민기(왼쪽)와 조용필[사진=위키백과]

나는 고 김지하(노겸 김영일) 선생과 조용필과의 인연에 대해 글로 쓴 적이 있다. ‘생명’이라는 노래가 탄생한 배경이기도 해서였다. 조용필은 ‘돌아와요 부산항에’가 공전의 히트를 쳤으나, 대마초 파동으로 밤무대만 전전하던 시절이었다.

그때 조용필이 재야의 메카인 원주에 갔다. 그는 원주관광나이트클럽 무대에 섰다. 그날 원주의 명사들이 총집결했다. 재야인사인 지학순 주교와 무위당 장일순, 김지하 등이 상석에 앉았다. 그 양옆으로 군 간부들과 주먹들까지 좋은 자리를 차지하고 용필의 노래를 감상했다. 조용필은 이날 ‘돌아와요 부산항에’와 ‘창밖의 여자’ 등 몇 곡을 불렀다.

김지하가 웨이터를 시켜 조용필을 만나자고 했다. 권커니 잣거니 하다, 둘의 마음이 통했다. 한 군데를 더 들러, 3차로 김지하 집으로 갔다. 김지하는 천재다. 백설희의 ‘봄날은 간다’를 3절까지 가사를 잊지 않고 부른다. 두 사람 간 노래 시합이 벌어졌다.

조용필이 몇 곡 주고받다 무릎을 꿇었다. 1절 가사야 조용필도 기억하지만, 김지하가 2, 3절까지 줄줄 부르는데 도저히 당할 수가 없었다. 조용필은 “형님으로 모시겠다”며 했다. 그러고는 김지하에게 “노래를 하나 주십시오”라고 청했다. 그때 김지하가 즉석에서 써준 게 바로 대중가요 ‘생명’의 가사다.

이 노래를 나는 조용필 앞에서 부른 적이 있다. 성낙인 전 서울대 총장께서 총장 선거에 도전했을 때, 조용필의 집 부근 카페에서 불렀다. 내가 마이크를 잡자 조용필은 의외라는 표정이었다. 그 노래를 아는 사람이 극히 드물었던 까닭이다.

당시 김지하 작사라고 했다간, 노래가 빛을 보지 못할 것 같아 수를 썼다고 한다. 지금도 그 노래의 작사자는 고 전옥숙 여사로 돼 있다. 방송 일을 하며 일본 체류 때 김지하 구명운동도 한 전옥숙 여사는 홍상수 감독의 모친이다. 서울대 총장을 지낸 오세정의 장모이기도 하다. 노겸 김영일(김지하) 작사의 ‘생명’을 세상에 알리려고 꾀를 내, 작사자를 전옥숙으로 만들었던 것이다.

본론으로 다시 돌아가자. 강헌이 때로 까칠하고 엄격한 김민기에게 제안했다. “(조용필 형을)그럼 만나보시겠습니까?” 김민기가 즉답으로 “좋지!”라고 했다. 얼마 뒤 강헌이 만남을 주선했다.

조용필이 한 살 위, 10살 내 객지에서 만나면 벗이다. 그러나 한 살 위는 사실 좀 조심해야 한다. 군기 잡지 않으면 머리에 오른다는 강박도 있다. 강헌은 만남의 장소롤 가왕 조용필의 ‘나와바리’(권역)으로 정했다. 가왕이 사는 방배동의 한 일식집에서 둘이 만났다.

1997년 세모로 달력 페이지가 넘어간 어느 날, 강헌은 김민기를 모시고 학전 앞에서 택시에 올랐다. 그는 “방배동으로 갑시다”라고 기사에게 말했다. 강헌은 소심한 성격은 아니지만, 내심 걱정을 했다. 주선자로서 의전과 디테일을 챙겨야 했다. 예를 들면, ‘술값은 누가?’ ‘먼저 누가 나와 맞느냐’ 등이다.

강헌은 역사적 만남에 들떠 이것을 미리 챙기지 못했다. 그는 “두 사람이 나이도 비슷하고 ‘가왕’과 ‘거인’이다 보니 미처 그러지 못했다”고 했다. 그런데 택시 안에서 먼저 김민기가 입을 열었다고 한다.

“서로 말없이 택시 안에 있었는데, 반포대교 중간쯤에서 민기 형이 ‘오늘 술값은 내가 낸다’고 하는 거예요. 너무 뜬금없어 ‘형, 오바하지 마!’라고 하면서도 가슴을 쓸어내렸어요.”

사실은 엄격하고 까다로운 김민기가 “그만 돌아가자”고 할까 봐 내심 걱정할 때였다. 그만큼 부담스러운 자리였다. 강헌은 약속 자리에서 다시 한번 놀랐다.

“용필이 형과 민기 형이 나이도 비슷해 (누가 먼저가 아니라) 정각에 보기로 했죠. 근데 식당에 도착해 또 한 번 놀랐어요. 용필 형이 먼저 방에서 기다리고 있었죠.”

두 천재가 만나 나눈 화제는 무엇이었을까? “대화 내용은 잘 기억나지 않지만, 그 자리 공기는 지금도 기억나죠. 두 사람이 악수하고 자리에 앉은 뒤 어색한 침묵 속에 시간만 ‘똑딱똑딱’ 흘렀죠. 앉자마자 소주 10병이 순식간에 사라져버렸어요.”

한 시간쯤 시간이 흘렀다. 모두 취기가 오르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두 양반이 술 힘을 빌려 조금씩 말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대개 선문답 같은 얘기만 오갔던 것 같아요. 소주 22병을 마신 뒤 음식점 문도 닫아야 해서 나왔죠.”

여기서 당연히 드는 의문이 있다. 두 ‘술고래’가 ‘2차 없이’ 그냥 헤어졌을 리가 만무하니까 말이다.

“2차 장소를 안 정하고 무작정 나와 그냥 헤어질 뻔했는데, 밖에 나와 보니 욕이 나올 만큼 엄청 추웠던 거죠. 마침 그 근처에 1970년대식 카페가 있었어요. 셋이서 들어갔죠.”

그 카페가 바로 필자도 가서 ‘생명’을 열창했던 데다. 내가 곡을 선택할 때 조용필은 의외라는 반응을 보이다, 노래를 마치자 박수치며 ‘이 친구 제법인데…’라는 표정을 지었다.

조용필과 성낙인, 송호근 교수와 함께 자리했다. 송호근 교수는 동아일보 기획 연재물인 ‘내 마음의 스타’에서 ‘조용필 편’을 주옥같은 글솜씨로 집필했다.

허름한 룸이 있던 그 카페에서 술 한 병을 놓고 ‘원샷’ 몇 차례 한 뒤 또 침묵이 흘렀을 때였다.

“그때 용필이 형이 갑자기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구석에 있던 낡은 노래방 기기 앞에 쪼그려 앉더니 번호를 직접 꾹꾹 누르는 거예요.”

그때 가왕이 형이 마이크를 잡고 부른 노래가 바로 ‘아침이슬’이었다. “벙찐 표정으로 민기 형이 깜짝 놀라 용필이 형을 빤히 쳐다보았고요.” 아마 조용필에게 없는 것을 김민기는 갖고 있어서였을 것이다. 딱히 그것을 뭐라고 표현할 길은 없지만 말이다.

한 청춘은 ‘진실된 슬픔’이라는 멋진 말로 이것을 풀었다. 이념을 떠나, 김민기 내면에 흐르는 보살행 같은 정서랄까? 나의 동아일보 선배인 이도성은 김민기와 유치원부터 대학까지 17, 18년을 같이 다녔다. 대학 다닐 때 광명 야학을 둘이서 조직했다. 그 야학이 배출한 인맥은 참 어마무시하다. 양희은도 야학에 몇 번씩 들러 노래를 불러주곤 했다. 나중에 검찰총장 정무수석 삼성사장 국회의원 등 출세한 이들도 많았다.

아무튼 졸업 후, 이도성과 김민기는 농민운동(?)으로 전북 김제로 가 농사를 짓기도 했다. 이도성의 말인즉슨, “민기는 생불”이라 했다.

김민기는 1990년대 초 ‘겨레의 노래’ 총감독을 했다. 당시 공연을 마치고 무위당 장일순 선생과 김지하, 김민기가 편의점 좌판에서 뒤풀이 자리도 만들었다. 양 김은 원주의 재야인사 무위당 선생이 아끼는 수제자급이었다.

김민기는 시대의 고뇌를 앓은 청춘들이 우상으로 여겼다. 김지하는 아스라이 먼 데여서 가까이하기에는 너무 멀었다.

“버틀란드 러셀이 어릴 때 자살 충동이 일 때마다 어려운 수학공부를 하며 이겨냈다. 저는 김민기 노래를 들으며 러셀의 그런 심정을 이해할 수…”

조숙한 청춘들에게 김민기가 끼친 영향은 상당했을 법하다. 강헌은 김민기와 가왕 조용필의 만남 자리를 주선하고 지켜본 증인이다. 필자는 강헌과 잘 알진 못한다. 그는 요즘도 팝송과 시사를 엮은 글을 조선일보에 정기 연재하는 재주꾼이다. 강헌은 그 두 사람이 만났을 때를 ‘생애 최고의 순간'이라 했다.

“용필이 형이 민기 형 앞에서 ‘아침이슬’을 부르던 그 모습은 영원히 잊지 못할 겁니다. 내 인생에서 가장 감동적이고 아름다웠던 순간은 그날 밤 조용필이 김민기 앞에서 ‘아침이슬’을 부른 그때였습니다.”

최영훈 전 동아일보 편집국장
최영훈 전 동아일보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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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난체 2023-11-09 17:58:10
결국 자기 잘난체 무자게 바쁘구나 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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