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승의 붓을 따라] 아련한 분홍빛 첫사랑
[이영승의 붓을 따라] 아련한 분홍빛 첫사랑
  • 이영승 한국 수필문학가협회 이사
  • 승인 2023.11.03 14:5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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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득히 먼 어린 시절의 내 로맨스다. 나만의 비밀로 가슴속에 간직하고 지냈는데 칠순이 넘은 나이에 첫사랑 운운하자니 민망하고 뜬금없다. 하지만 당시의 기억들이 모두 가물가물한데 그 애틋했던 감정은 아직도 가슴에 생생하니 어찌 그냥 묻어둘 수 있겠는가!

솔직히 그때 나는 사랑이 뭔지도 몰랐다. 나 혼자 좋아했던 짝사랑이라서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어쩌다 옆으로 스쳐만 지나가도 가슴이 두근거렸으며, 오랜 세월 그 곱던 모습을 잊지 못해 애를 태웠으니 사랑인 것만은 분명하지 않은가?

나는 중학교 3년을 학교에서 10여 km 떨어진 안동의 누님댁에서 시내버스로 통학했는데 그 동네 중학교 2학년 한 여학생도 같은 노선의 버스로 통학했다. 그 여학생의 아버지는 버스 차주였으며 종점에서 가게도 운영했다. 누구에게나 자상한 그분은 자형과도 아는 사이였는데 언젠가 “학생은 공부를 잘한다고 하던데 비결이 뭔가?”하고 칭찬을 한 적도 있었다. 매일 아침 그 여학생과 마주치다 보니 조금씩 관심이 가기 시작하더니 날이 갈수록 자꾸 예쁘게 느껴졌다.

그러나 나보다 한 학년 위라서 관심을 보이거나 말을 붙일 생각은 엄두도 내지 못했다. 내가 3학년이 되고 그녀가 고등학생이 되자 어느 날부터 점점 더 성숙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나보다 한 학년 위이기는 하나 나는 호적이 늦어 실제 나이는 한두 살 많을 테니 사귀어서 안 될 일은 없다는 생각도 혼자 했다. 그러나 상대가 그 사실을 어찌 알겠는가? 다음 해 나는 고등학교를 대구로 진학하여 안동을 떠났다. 하지만 그 후에도 그녀에 대한 연민은 계속되었다.

세월이 흘러 나는 졸업 후 코오롱에 높은 경쟁을 뚫고 입사했다. 그녀는 안동 농협에 다닌다는 소식을 풍문으로 들어 알고 있었다. 그때까지도 그녀에 대한 애틋한 감정은 조금도 식지 않았다. 연말이 되자 회사에서 상당히 크고 고급스러운 달력을 직원들에게 나눠줬다.

고심 끝에 그 달력을 명함과 함께 그녀의 집으로 우송했다. 보낼 것인가 말 것인가 문제로 여러 날 고민하고 망설였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회신을 기대한 건 아니었으나 달력을 보낸 후 며칠이 지나도 아무 연락이 없자 송달이 되었는지 몹시 궁금했다.

그러나 당시는 핸드폰이 없었으며 집으로 전화할 수도 없었다. 고민을 거듭하다 직장 전화번호를 알아 사무실로 전화했다. 떨리는 가슴으로 달력을 받았는지 물어보니 당황한 듯 머뭇거리다가 고맙다는 한마디만 했다. 남들이 옆에서 들을까 걱정해 빨리 끊으라는 것 같이 느껴졌다. 하기야 나라도 그 상황이면 무슨 말을 더하랴. 잠시 침묵이 흘렀다.

나도 더 할 말을 찾지 못해 망설이는 순간 그녀가 낮은 목소리로 “직장에서 무슨 일을 하세요?”라고 물었다. 처음 들어보는 고운 목소리에 가슴이 두근거려 대답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전화를 끊고 나니 무슨 말을 했는지도 기억나지 않았다. “나는 역시 순진한 바보야”하고 속으로 자책했다.

그토록 고심 끝에 용기를 내어 시도했는데 하고 싶은 말 한마디 미리 준비하지 못한 게 후회되었다. 그러나 사랑은 이루어져야만 아름다운 것은 아니라 했으며, 어쩌면 이루지 못한 사랑이 훨씬 더 많을지도 모른다. 이렇게라도 마음을 정리하게 되었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싶었다. 나의 짝사랑이자 첫사랑은 그렇게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비록 단 한 번이기는 하나 간접적으로라도 내 속마음을 전한 것이 그냥 묻어 둔 것보다는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도 그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그 후 나는 한국전력으로 전직해 안동 영업소로 발령받았으며 1978년 29세에 약혼했다. 하루는 사무실에서 정신없이 일하는데 그녀의 아버지가 불쑥 찾아와서 할 얘기가 있다고 하셨다. 나와 무슨 할 얘기가 있다는 건지 황당하고 의아했다. 순간 그분의 딸과 지난날 있었던 일들이 하나둘 떠올랐다. 얼른 일어나 그분을 길 건너 다방으로 모시고 가서 차를 시켰는데 차가 나오기도 전에 다짜고짜 얘기를 꺼내셨다.

그때 하신 말이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거두절미하고 말하겠는데 내 딸을 어떻게 생각하는가?”라고 말을 했던 것 같다. 잠시 시간이 흐른 후 “어르신, 저는 얼마 전에 약혼했습니다”라고 했다. 예기치 못한 내 대답에 미안하고 실망스러워하는 얼굴빛이 역력했다. “그럼 알았으니 이만 가겠네”하고 바로 일어서서 나가셨는데 얼마나 겸연쩍었으면 차도 마시지 않고 그냥 가셨으랴!

혼자 차를 마시며 순진무구했던 내 첫사랑에 잠시 빠져들었다. 그분은 중학교 3년 동안 나와 같은 마을에서 살았다. 오래전 내가 딸에게 달력을 보낸 사실도 알고 있을지 모른다. 그 후 한전에 입사해 안동에서 근무한다는 사실도 자형을 통해 알았을 것이다. 딸이 그때 28세쯤 되었을 테니 당시로는 혼기가 늦은 나이다.

딸과 상의 후 나를 찾아왔는지는 알 수 없으나 부모로서 얼마나 속이 탔으면 그런 용기를 내었으랴. 당시 우리 부모님도 나보고 서른 살 넘으면 장가가기 어렵다며 빨리 결혼하라고 몹시도 채근하셨으니 말이다. 곰곰이 생각하니 어이없는 그 날 사건의 원죄는 내게 있음이 분명했다. 그때 달력만 보내지 않았어도 나를 찾아와 그런 무안을 당하지는 않았을 테니 말이다.

하지만 기왕 오셨으면 차라도 마시고 나서 찾아온 동기를 차분히 말씀 후 나에게 “우리는 인연이 아닌가 보네”하고 웃으며 가셨더라면 내 마음이 얼마나 편했겠는가. 알고 보면 그분이 미안할 일은 전혀 아니며, 지금 생각하니 그때 나를 찾아오지 않았다면 티 없이 맑고 숭고한 내 첫사랑은 오늘의 글감도 되지 못했을 테니 내가 도리어 고마워해야 할 일이다.

아내는 결혼 전 농협에 근무했다. 결혼 후 언젠가 문뜩 아내도 그녀를 알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루는 그녀의 이름을 대며 “내가 어릴 적 짝사랑했던 사람인데 아느냐?”고 물었다. 아내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고등학교 4년 선배이며 예쁘고 착한 언니인데 잘 해보지 그랬어?”하고 빙긋 웃었다. 세상은 정말 좁다는 말이 실감났다. 그녀의 아버지가 나를 찾아온 지 45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런데 나는 아직도 아련한 첫사랑이 생각날 때면 가슴이 온통 분홍빛으로 물든다.

필자소개
월간 수필문학으로 등단(2014)
한국 수필문학가협회 이사
수필문학 추천작가회 부회장
전 한국전력공사 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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