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역체험수기] 인생에서 되찾은 나의 태극기(최우수상)
[병역체험수기] 인생에서 되찾은 나의 태극기(최우수상)
  • 나성원(2공병여단 도하중대 예비역 병장)
  • 승인 2024.01.04 10:4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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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에서 태어나고 자란 한인 자녀들이 모국에 들어와 자원입대하는 사례가 늘어나고 있다. 병무청(청장 이기식)은 이들의 군 생활 체험을 담은 수기 공모전을 2년마다 진행해 이북(e-book)으로 발간해왔다. 월드코리안신문은 병무청의 승낙을 받아, 최근 발간된 이북 <2023년 대한사람 대한으로>에 실린 우수 체험수기들을 연재로 소개한다.[편집자주]

2020년 8월 5일. “나는 자랑스러운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대한민국의 헌법과 법률을 준수하고 국민의 책임과 의무를 다할 것을 엄숙히 선서합니다.” 힘찬 목소리로 국민 선서를 하고 3년 만에 나는 다시 대한민국 국민이 되었다. 국적회복 증서와 태극기를 양손에 든 채 기념사진을 찍으면서 방금 한 선서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봤다. 물론 알고 있었다. 국민의 책임과 의무 중 병역의 의무도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그럼에도 순간 걱정이 밀려왔다. 과연, 나는 이 선택에 후회 없이 병역의 의무를 다할 수 있을까?

나의 본적, 대한민국

나는 한국에서 태어났고, 미국에서 자랐다. 어머니께서 미국 시민권자셨기에 나도 태어날 때부터 한국과 미국 국적을 동시에 보유한 선천적 복수국적자가 되었다. 기억도 나지 않는 어린 시절을 한국에서 보내고 4살 무렵, 미국 시애틀로 연수를 가게 되신 부모님을 따라 미국으로 건너갔다. 의사이신 부모님은 미국에서 학업에 매진하시다, 어머니는 시애틀에, 아버지는 귀국하셔서 대학병원에 자리를 잡으셨다. 나는 당시 한국으로 돌아오지 않고 어머니와 함께 미국에 남았으며, 유년기부터 지금까지 미국에서 학창시절을 보냈다.

미국에서 나는 어렵지 않게 교우 관계를 형성하며 친구들과 잘 지낼 수 있었다. 유치원 때부터 현지 교육을 받아 영어 수준은 원어민이나 다름없었고, 축구와 야구 등 활동적인 취미를 즐겨서 친구들과도 친하게 지낼 수 있었다. 그렇게 미국인 친구들과는 잘 어울려 지냈지만, 상대적으로 내가 살던 동네에 한국인이 거의 거주하지 않아 또래의 한국인 친구와는 만날 기회가 없었다.

그래도 한국에 계신 아버지 덕에 방학 때마다 꾸준히 한국에서 생활할 수 있었고, 그로 인해 한국어나 문화, 생활 등은 전혀 낯설지 않았다. 매년 봄, 여름, 겨울 방학 때가 되면 할아버지와 할머니, 그리고 아버지와 함께 본가에서 지냈다. 아버지께서는 한국에서 지내는 동안 내가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잃지 않도록 정말 열심히 노력하셨다. 한국어 실력이나 어휘력이 뒤쳐지지 않도록 국어와 논술 학원을 보내셨고, 그 외에 한국사와 한자 과외도 받게 하셨다. 또한, 가족들과 국내 여행을 함께 다니며 우리나라의 지리에도 익숙해지고 지역적 특성도 많이 알게되었다.

선택, 그리고 후회

두 나라, 두 개의 인생을 살아오면서 어느새 고등학생이 되었고, 복수국적에 대해 선택해야만 하는 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선천적 복수국적자들은 두 가지 선택의 기로 위에 서게 된다. 대한민국에서 병역의 의무를 다하고 복수국적을 유지할 것인지, 아니면 병역의 의무를 거부하는 대가로 한국 국적을 포기하고 미국 국적만을 가질 것인지. 일부 복수국적자들은 군입대를 회피하기 위해 한국 국적을 포기하고 미국 국적을 선택한다. 당시 부모님께서도 지금껏 미국인이나 다름없이 살아온 내가 한국 국적을 유지하기 위해 굳이 군대에 갈 필요가 있을까를 고민하셨고, 대학 입시 준비에 바빴던 나도 별다른 생각이나 반대 없이 한국 국적을 포기했다.

그렇게 18살부터 나는 미국 국적만 가진 미국인이 되었다. 외모는 한국인이지만 사실 대한민국 국민이 아닌 외국인, 소위 말하는 검은 머리 외국인이 된 것이다. 국적 포기를 하고 나서도 처음에는 아무렇지 않았다. 대학 입시로 공부에 전념하느라 내 정체성이나 국적에 대해 깊이 생각할 시간이나 여유가 없었고, 큰 고민도 없었다. “어차피 바뀔 건 없어. 국적이 뭐가 중요해?” 계속 자기 합리화를 하면서 공부에만 열중했다.

열심히 공부하고 노력한 끝에 미국 동부 아이비리그 소속의 브라운 대학교에 입학했다. 대학교에는 다양한 국적의 유학생들이 많이 있었고, 처음으로 한국 유학생들을 만나면서 새로운 한국인 친구들을 사귀고, 함께 수업도 듣고, 열심히 동아리 활동도 했다. 겉으로는 아주 보람차고 즐거운 대학교 1학년 생활에 적응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사실 1년 내내 남모르게 마음고생이 많았다.

이유인즉, 한국에서 병역의 의무를 다하고 복학한 선배들과 곧 병역의 의무를 다할 내 동기들을 보고서 나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깊은 고민에 빠지게 되었기 때문이다. 나도 내 선배들과 동기들, 그리고 앞으로 들어올 후배들과 똑같이 한국에서 태어났고, 같은 한국인의 피가 흐르는데 과연 병역의 의무를 하지 않고도 대한민국을 나의 조국이라고 당당히 부를 수 있겠는가?

한국 국적을 포기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우리나라의 역사적, 문화적, 정서적 가치들에 관한 애착과 자부심을 지니고 있었기에 더욱 혼란스러웠다. 비록 미국 여권을 들고 다녔지만, 내 마음은 여전히 한국에 있었다.

하지만 대한민국 국민이 아닌 나는 과연 대한민국에 대한 자부심을 느낄 자격이 있을까? 결론적으로 나는 내 자신에게 결코 떳떳할 수 없었다. 내 나라를 위한 그 어떤 의무도 행하지 않고 권리를 행사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국적을 포기한 이후 한국 출입국 시에 외국인 대기 줄에 가서 미국 여권으로 입국 수속절차를 밟아야 하는 내 마음은 늘 불편했고, 공식 문서에 “나성원” 대신 “Sungwon La”라고 적을 때마다 기분이 마냥 좋지는 않았다. 이때부터 내 마음 한구석에는 진정한 대한민국 국민이 다시 되고 싶다는 갈망이 자라나고 있었다.

그렇게 나는 국적을 포기했던 그 순간을 후회하며 대학교 1학년을 보냈다. 겉으로는 티내지 않았지만, 밤마다 침대에 누워 같은 생각을 되풀이했다. 만약에 내 인생에서 단 한 순간만을 되돌릴 수 있다면, 국적 선택을 다시 해서 한국 국적을 지키고, 기꺼이 병역의 의무를 다해 떳떳한 대한민국 국민으로 살고 싶다는 생각이 계속 들었다. 기숙사 방 벽에 대형 태극기를 붙여 놓고 지낼 정도였다. 철이 들지 않았던 그 시절 태어난 조국과 정체성에 대해 깊은 고민 없이 너무나 쉽게 한국 국적을 버린 것이 진심으로 후회스러웠다.

과감한 결정

대학교 1학년을 마치고 나서도 여전히 미련이 남았다. 오히려 시간이 갈수록 마음이 더 심란해졌고, 마음고생이 날마다 심해졌다. 그렇게 복잡한 심경으로 대학교 2학년이 되었을 때, 두 번 다시 안 올 행운이 찾아왔다. 일제강점기 때 항일독립 만세운동을 주도하신 증조 외할머니께서 그 업적을 인정받아 독립유공자로 지정되시면서 자연히 그 후손인 나는 국적법에 의해 다시 국적을 회복할 수 있게 된 것이다(국적법에 의하면 독립유공자 후손의 경우, 외국 국적불행사 서약에 의해 복수국적도 유지할 수 있다).

증조 외할머니께서는 1930년 1월 서울에서 광주 학생독립운동으로 시작된 항일시위에 동조해 만세 시위를 주도하시다가 투옥되셨고, 이와 관련된 역사적 자료가 최근에 확인되어 독립유공자로 지정되셨다. 내가 그토록 후회하던 선택을 되돌릴 수 있는 천금 같은 기회를 증조 외할머니께서 주신 것이었다. 증조 외할머니가 독립유공자로 지정되었다는 소식을 듣는 순간, 이제 국적회복을 할 수 있게 되었다는 들뜬 마음과 함께 꼭 하고 말겠다는 확고한 마음을 가지게 되었다. 병역의 의무를 다하고 진정한 대한민국 국민으로 후회 없이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그 무엇보다도 확고했다.

하지만 주변에서 이를 동의해주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남들은 어떻게든 안 가려고 하는 군대를 자원해서 가겠다는 말이 그들에게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일이었다. 주변의 사람들이 계속 국적회복을 하지 말라고, 후회하게 될 거라며 충고했다. “아니, 안 그래도 되는데 황금 같은 청춘의 2년을 왜 군대에서 버리려고 하니?” “왜 굳이 군대에 가고 다시 한국인이 되려고 하는 거야?” “외국인이라는 게 뭐 어때서. 그냥 외국인으로 살고 군대 가지 마. 그게 편해.” “너 나중에 후회한다.” 우리학교 선배들, 동기들, 부모님 모두 반대하셨다. 하지만 이것만큼은 나의 소신을 굽히면 안 된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었다.

증조 외할머니가 독립유공자가 되셨음을 생각할 때마다 가슴 속에 무언가 모르게 뜨겁게 올라왔고, 이전에는 느끼지 못했던 우리 집안에 대한, 그리고 내가 한국인이라는 것에 대한 자부심이 생겨났다. 그리고 그 자부심도 자격이 있어야지 느낄 수 있다는 생각에 이르자, 나에게 온 이 기회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감사하고 소중했다. 증조 외할머니께서는 나라를 위해서 감옥까지 가셨는데, 그 고귀한 애국심을 이어 나라를 위해 병역의 의무를 다하는 것은 내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의 도리였다. 그렇게 보답해야 만이 우리 집안에 대해, 그리고 더 넓게는 대한민국에 대해 자부심을 느낄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다.

이 생각이 너무나 확고했기 때문에 주변 사람들이 말리더라도 주저하지 않았고, 망설임 없이 국적회복을 해야겠다는 마음을 가지게 되었다. 부모님께 국적회복을 하겠다는 뜻을 말씀드리고, 많은 대화 끝에 나의 간절한 마음을 이해받고 허락을 받았다. 그리고 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결정을 내렸다. 2020년 7월 7일에 국적회복 신청을 하고, 2020년 8월 5일에 국적회복 선서를 하며 21살의 나이에 대한민국 국적을 3년 만에 되찾았다.

자랑스러운 대한민국 군인으로서 나는 대한민국 국적을 되찾은 지 6개월도 지나지 않아 논산 육군훈련소로 입대를 했다. 다행히도 훈련소 생활에는 문제없이 잘 적응할 수 있었고, 열심히 훈련하면서 밖에서는 못 해볼 재미있는 경험을 많이 할 수 있었다. 기록사격에서 250미터 표적을 명중했을 때 느낀 쾌감, 설날 때 우승했던 중대 피구대회, 야간행군 때 동기들이랑 찾아낸 별자리들, 폭설 오는 날에 눈밭에서 했던 포복 훈련 등 평생 간직할 즐거운 추억거리들을 많이 만들었다.

드디어 그토록 기다리던 수료식 날, 나는 교량가설단정 운용병이라는 특수한 보직을 부여받게 됐다. 교량가설단전 운용병은 교량가설단정(BEB)이라는 배를 운전해서 교절을 밀고 강을 건널 수 있는 부교를 구축하는 임무를 맡는다. 보트 조종법과 관리법을 배우러 공병학교로 후반기 교육을 받으러 갔고, 공부를 열심히 해서 교육생 중에서 1등을 했다.

자대 배치는 제2공병여단 도하중대로 가게 되었다. 부대원들하고 금방 친해져서 군 생활에 순조롭게 적응을 할 수 있었고, 본격적으로 일과를 시작하면서 새로운 보트 정비 기술들을 많이 배우게 되었다. 학교에서 기계공학을 전공했던 덕분에 보트 내부의 엔진실을 직접 보고 만지는 것이 너무 재미있었고, 밖에서는 쉽게 배우지 못하는 공구류 사용법과 기계 정비법을 매일 배우고 활용하니 하루하루가 설레고 즐거웠다.

체력단련도 꾸준히 해서 특급전사를 달성할 수 있었고, 특기인 영어를 살려서 코로나 때 통역병으로 인천공항 검역지원 파견을 나가는 경험도 할 수 있었다. 또한 제92주년 학생독립운동 기념식 국가행사에서 국민의례 낭독을 하러 가기도 했는데, 증조 외할머니가 참여하신 애국운동을 위한 기념일이었으므로 개인적으로 군생활을 하면서 제일로 인상깊고 소중했던 추억이 되었다. 이때 다시 한번 국적회복의 기회를 주신 증조 외할머니께 존경심과 감사함을 진심으로 느꼈다. 그 외에도 자기계발을 위해 개인정비 시간 때 꾸준히 혼자서 한자, 한국사, 그리고 경제학 공부를 했고, 한자는 공부 끝에 급수시험까지 봐서 자격증까지 취득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도 전국 각지에서 모인 선임, 동기, 후임들과 얘기를 나누면서 서로를 알아가니 도하중대의 부대원으로서 소속감을 느낄 수 있었다. 전문적인 정비 기술들을 배우고, 자기계발을 꾸준히 하고, 소중한 인연들을 만들어 가다 보니 걱정했던 바와는 달리 군대에서 보내는 시간이 전혀 아깝지 않았고, 시간이 빨리 지나갔다. 어느덧 전역 날이 다가왔고, 지난 1년 반 동안 매일매일을 열심히, 그리고 즐겁게 보낸 내 모습을 돌이켜보니 입대를 통해서 정말로 보람차고 의미 있는 경험을 쌓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입대하고 나서 주변 사람들한테 “대단하다.” “훌륭하다.”라는 칭찬을 많이 들었다. 하지만 내가 입대한 것은 대단하거나 훌륭한 일이 절대 아니다. 그저 당연히 해야 할 일이었을 뿐이다. 우리 증조 외할머니께서 나라를 위해 감수하셨던 희생과 나에게 국적회복의 기회를 주신 것을 생각하면 병역의 의무를 다하는 것은 당연히 해야 할 도리였고, 자랑스러운 독립유공자의 후손으로서, 그리고 자랑스러운 한국인으로서 내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애국과 희생이었다.

증조 외할머니를 포함한 독립운동가들, 그리고 나라를 지키기 위해 자신을 희생한 국군 용사들도 자신보다 나라와 민족을 먼저 생각하며 헌신했고, 그들의 아낌없는 희생 덕에 오늘날의 발전된 대한민국이 있을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그들의 노력과 희생에 대해 보답을 해야 하며, 자랑스러운 마음가짐으로 군복을 입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여전히 자원해서 군대를 다녀온 것에 대해 후회하지 않느냐고 묻는 사람들이 많다. 그때마다 주저 없이 “전혀 후회하지 않는다”고 대답한다. 육군훈련소에서의 훈련, 공병학교에서의 후반기 교육, 제2공병여단 도하중대에서 맺은 소중한 인연들과 같이 만든 수많은 추억들, 공병이었던 덕에 배운 전문적인 정비 기술들과 장비 운용, 자기계발을 통해 얻은 새로운 지식과 실력들, 군대가 아니었으면 경험하지 못했을 인천공항 검역지원 통역병 파견과 국가 행사 국민의례 낭독 등은 평생 기억에 남을 것이다. 그리고 태극기를 볼 때마다 증조 외할머니가 생각나고, 우리나라에 대한 조그마한 봉사로서 내가 그 뜻을 이어 대한민국의 군인으로서 복무했다는 것을 생각하면 국적회복과 입대를 한 스스로가 정말로 뿌듯하고 자랑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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