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방] 필라델피아 서재필기념관을 찾아 ‘애국’을 묻다-1
[탐방] 필라델피아 서재필기념관을 찾아 ‘애국’을 묻다-1
  • 필라델피아=이종환 기자
  • 승인 2019.06.13 1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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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신정변으로 집안 풍비박산··· 모국에 대한 ‘애증’ 안고 ‘독립’에 헌신
집으로 오르는 길

필라델피아에 있는 서재필기념관을 찾은 것은 뉴욕 맨해튼의 한인이민사박물관을 둘러본 게 계기가 됐다. 찰스 윤 뉴욕한인회장을 만나러 맨해튼의 뉴욕한인회관을 들렀다가, 같은 층에 자리 잡은 이민사박물관에서 ‘서재필 박사=한인 최초의 미국 시민권자’라는 내용을 발견한 것이다.

서재필기념관은 서재필 ‘박사(사실은 의사다)’가 1925년부터 25년간 살았던 집으로, 펜실베이니아 역사유적지로도 지정돼 있다. 주소는 ‘100 East Lincoln Street Media, PA’다. 인터넷에서 이 주소를 알아내고는 네비게이션으로 찾아간 날은 6월8일이었다.

필라델피아 다운타운에서 30여 분을 달려 네비게이션이 목적지라는 곳에 도착했으나, 집을 찾을 수 없었다. “분명히 있을 텐데...” 길을 아래위로 훑었으나 찾을 수 없어, 할 수 없이 정원을 손질하는 현지 주민한테 휴대폰에 저장된 집 사진을 보여주며 위치를 물었다.

그가 가르쳐준 곳을 찾아가자 블로그에 본 대로 그림 같은 풍경을 배경으로 서재필기념관이 서 있었다. 네비게이션이 목적지를 지나 도착 신호를 보낸 탓이었다.

대나무 숲도 있는 길을 따라 올라가자 한국식 정원이 있고 그 위에 집이 덩그마니 자리 잡고 있었다. 서재필 박사가 타계할 때까지 25년간 머물렀던 집이었다. 지금은 상주자가 없이 ‘서재필기념관’으로 운영되고 있었다. 집에서 정원을 내려다보며, 인터넷으로 위키백과를 찾아서 서 박사의 일생을 읽어내려갔다.

집 입구

서재필(徐載弼, 1864년 1월일~1951년 1월5일)은 조선의 무신, 대한제국의 정치인, 언론인이자 미국 국적의 한국 독립운동가, 의사다. 미국에서 병리학자, 의사, 시인, 소설가로 활동했다. 전라남도 보성군에서 태어났다.

박규수, 유대치, 오경석의 문인이기도 하며, 1879년 초시, 1882년(고종 20년) 증광시에 급제해 교서관부정자(校書館副正字) 관직에 올랐다. 그 뒤 승문원부정자, 훈련원부봉사를 거쳐 1883년 일본으로 유학, 게이오의숙과 토야마 육군하사관학교에서 단기 군사훈련을 받고 1884년 귀국했다. 귀국 직후, 병조 조련국 사관장이 됐다.

김옥균, 홍영식, 윤치호, 박영효 등과 갑신정변을 일으켰으나 삼일천하로 끝났다. 그는 일본을 경유해 미국으로 망명했다. 갑신정변 직후 정변 주역들의 집안은 멸문지화를 당했다. 연좌제 때문이었다. 서재필의 집안도 마찬가지였다. 생부 서광효는 감옥에 투옥당해 절곡 끝에 자결했다. 3명의 친형제도 죽임을 당했다. 맏형 서재춘은 은진군 감옥에 수감 됐다가 독약을 먹고 자결했고, 이복형 서재형은 관군에 의해 죽었다. 시어머니와 며느리들은 마주 보고 앉아 독약을 마셨다. 관가에 기생으로 보내지기로 된 서재필의 부인은 독약을 먹고 자결했고, 두 살 난 아들도 따라 죽었다.

양가(養家)에도 화가 미쳐 그의 양아버지이자 재종숙인 서광하는 전 재산을 몰수당하고 노비로 전락했다. 17세 된 남동생 서재우(徐載雨)만 나이가 어려 죽음을 면했다. 양어머니인 안동 김씨 가족도 몰살되거나 화를 입었다. 전라남도 보성군에 있던 친 외가에도 화가 미쳤다. 가산은 탕진되고 가족은 이산했다. 서재필의 친구들 역시 투옥당해 심한 고문을 받았다.

한성부 종로방 화동 1번지에 있던 그의 집은 김옥균의 집과 인접해 있었는데, 김옥균의 집과 서재필의 집터는 조정에 의해 몰수당한 뒤 후일 관립한성고등학교의 부지(현 정독도서관 터)가 된다.

가족을 몰살시킨 조국에 대해 서재필 박사는 어떻게 생각했을까? 환멸감을 느끼지 않았을까? 그의 일생은 조국에 대한 사랑과 미움이 점철돼 있었다. 서재필은 갑신정변이 삼일천하로 끝나면서 박영효, 서광범과 함께 일본으로 망명했다. 12월13일 인천 제물포항을 출발한 배는 다음 날 일본 나가사키에 도착했다. 망명 초기 그는 조선에서 보낸 자객들의 위협에 시달리며, 후쿠자와 유키치와 친분이 있던 독지가의 후원으로 도쿄 근처의 판자촌에 숨어 지냈다.

일본은 조선의 갑신정변에 깊이 참여했다는 국제 사회의 비난에서 벗어나고자 이들을 냉대했다. 이들은 결국 미국으로 건너갈 것을 결심하고, 1885년(고종 22년) 5월26일 서재필, 박영효, 서광범은 일본 요코하마에서 미국 화물선 차이나 호를 타고 샌프란시스코로 건너갔다.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한 서재필은 영어도 모르고 아는 사람도 없는 낯선 곳에서 막노동과 잡역, 식당 서빙, 청소부, 인쇄소 전단지 돌리는 일 등 잡일을 가리지 않았다. 서재필은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기독교청년회(YMCA) 야간학교에서 공부했다. 주말에는 교회를 다녔다. 그는 기독교로 개종했고, 기독교적 인권사상과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신념을 키웠다.

서재필이 교회에서 소개받은 사업가 홀렌벡은 그에게 정식으로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기회를 제공했다. 1886년 9월 서재필은 홀렌벡의 도움으로 대륙횡단 열차를 타고 펜실베이니아주 윌크스배리(Wilkes-Barre)로 가서 ‘해리 힐만 아카데미(Harry Hillman Academy)’라는 명문 고등학교에 입학했다. 서재필은 교장 선생 집에서 집안일을 도우며 숙식을 해결했다.

유펜 와튼 스쿨 

서재필은 1888년 ‘필립 제이슨(Philip Jaisohn)’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썼다. ‘서재필’을 거꾸로 해 ‘필재서’로 만든 다음, ‘필’을 ‘필립’으로, ‘재서’를 ‘제이슨’으로 음역한 이름이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워싱턴 DC의 컬럼비안대학(Columbian University, 현 조지워싱턴대학교)에 입학했다가, 1890년 서재필은 라파예트대학 하트 교수의 도움으로 라파예트 대학교에 입학한다. 대학에 다닐 때 서재필은 하루 3불을 받고 유리창 닦이 등 잡역부로 일했다. 하지만 서재필은 라파예트 대학교를 중퇴하고 일자리를 찾아 워싱턴 DC로 떠났다. 그가 찾은 일자리는 미국 육군 의학박물관에서 중국과 일본 의서들을 영어로 번역하는 일이었다.

의학 서적을 번역하면서 서재필은 의학에 관심을 가졌고, 마침내 1889년 워싱턴 DC의 컬럼비안 대학 의과대학 야간학부에 입학했다. 그는 낮에는 문구점 주인으로 밤에는 학생의 신분으로 공부했다. 컬럼비안 대학 재학 중이던 1890년 6월 미국인으로 귀화해 6월10일 한국인 최초로 미국 시민권을 받았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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