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방] 필라델피아 서재필기념관을 찾아 ‘애국’을 묻다-3
[탐방] 필라델피아 서재필기념관을 찾아 ‘애국’을 묻다-3
  • 필라델피아=이종환 기자
  • 승인 2019.06.15 0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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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 뉴욕에서 한국독립 지지하는 집회 열어··· 1948년부턴 의료활동에 전념

1919년 4월13일 서재필은 필라델피아에서 제1차 한인연합회의(The First Korean Congress)를 소집했다. 1919년 4월13일에서 15일까지 3일 동안 열린 이 행사에는 이승만, 정한경, 유일한, 조병옥, 장택상, 허정, 노디 김, 안창호가 설립한 국민회 간부 등 150여 한인들이 참여했다. 3일간의 제1차 한인연합회의가 끝난 뒤, 4월16일에는 필라델피아에서 ‘한인자유대회’를 열었다.

그해 8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구미외교위원회가 설치되자 구미위원회 산하에 한인통신부를 설치하고, 서재필은 영문 기관지 ‘한국평론(Korea Review)’을 월간으로 발간했다. 이와 함께 ‘어린이’, ‘순난자’, ‘대한정신’ 등 영문 소책자를 발간해 배포했다. 이 책들은 서재필의 자비와 여러 한인 지사들의 후원비로 발행됐으며, 일본의 만행을 규탄하고 독립 의지를 표현하는 내용으로 돼 있다.

서재필은 1919년 8월 한국위원부(임정 구미위원부의 전신)의 부위원장에 선출됐다. 그러나 서재필은 자신의 상점을 보살피지 못해 회사는 파산하고 말았다. 상점의 파산으로 생계는 아내인 뮤리엘의 몫이 됐다. 이어 임정 구미위원부에서는 미국 내 정치인과 사회단체 인사들을 초청해 제1차 한인의회를 개최했다.

8월 서재필은 제1차 한인의회에 대표 기도자로 참석한 플로워드 톰킨스(Floyd Tomkins) 목사 등 기독교 인사들을 설득, 한국친우회(The League of Friends of Korea)를 조직하고 미국이 한국의 독립을 지지할 것을 요구하는 운동을 벌였다. 한국친우회는 당시 미국 내 정계 및 학계에 포진한 친일세력에 대항해 조직된 기독교 네트워크로 미국 내 20여 개 도시에 지부를 두었으며, 영국 런던과 프랑스 파리에도 각각 하나의 지부를 두었다.

서재필은 1920년 초 한인자유대회를 소집하고 한국독립선언식을 거행했다. 이어 독립단 사무처를 설치하고 외교적 활동을 펼쳤다. 독립단 사무처는 1922년 재정난으로 문 닫을 때까지 외교 활동과 홍보 및 독립운동 기금 모금 활동을 했다. 이외에도 서재필은 강연 활동, 칼럼 기고 활동을 병행했다.

1920년 3월1일 한국친우회 뉴욕지부 행사에 약 1,000여 명의 회원이 참석해 한국의 3.1만세운동과 한국의 독립을 지지하는 집회를 열었다. 1921년에도 뉴욕에서 3.1운동 기념식을 여는데 기여했다.

서재필이 가장 기대했던 것은 1921년 11월부터 1922년 2월까지 개최된 워싱턴 군축회의였다. 1921년 8월 일본의 해군력 팽창을 억제하고 중국침략을 견제하려는 취지에서 미국이 주최한 태평양회의가 열리자 이승만과 함께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표단 대표로 워싱턴에서 열린 평화군축회(1921년~1922년)에 파견됐다.

평화군축회의 직전 회의장에서 조선 독립의 정당성, 당위성을 설명한 홍보물들을 태평양 연안 국가 대표들에게 나누어 주었고, 회의 개최 후 그는 조선 독립문제를 국제회의 석상에서 공식적으로 다루어달라고 요구하는 ‘한국독립청원서 (Korea's Appeal)’을 각국 대표들에게 제출했다. 하지만 일본의 방해와 미국의 반대로 끝내 무산됐다. 파리평화회의에서 서재필은 370여 단체의 서명을 받은 연판장을 일본 측 대표 도쿠가와 이에사토에게 전달하고, 한국의 독립을 승인해줄 것을 각국 대표와 세계여론에 호소했다.

1925년 6월, 7월에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범태평양 회의가 개최되자 한국인 대표자의 한사람으로 필라델피아에서 하와이로 건너갔다. 한국에서 온 송진우, 신흥우, 김양수, 유억겸, 김종철 등과 함께 헬렌 윤, 필지성 등을 데리고 7월1일부터 14일까지 태평양 회의에 참석해 일본의 식민통치의 잔혹함을 규탄하고 한국독립의 정당성을 역설해 독립에 대한 지원을 호소했다.

서재필은 1929년 병리학 전문의 시험에 합격한다. 그 후 필라델피아 대학, 펜실베이니아 대학, 콜롬비아 대학 등의 의학부 시간제 강사로 취직했으나 백인 학생들이 유색인종이라는 이유로 꺼리게 되면서 얼마 못 가 그만두게 됐다. 그는 여러 병원을 돌며 고용의사로 취직하다가 빚을 얻어 자기의 병원을 경영하기도 했다. 병원은 필라델피아에서 8마일 정도 떨어진 메디아에 있었다. 하지만 병원은 순탄하지 못했다.

그는 1941년 1월6일 미군 군의관으로 자원했다. 1941년 12월 일본의 진주만 폭격으로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자 미국의 승리가 조선의 해방으로 이어질 것이라는 희망을 갖고 77세에 미군 징병 검사관으로 자원봉사하기도 했다. 1944년 아내 뮤리엘 메리 암스트롱이 병으로 사망했다.

광복 후 그는 미 군정으로부터 귀국 교섭을 받았다. 미 군정은 공동위원회 재개를 준비하면서, 이승만, 김구에 맞서는 지도세력을 강화하기 위해 서재필을 귀국시켰다. 서재필은 미군정청 사령관 하지의 요청을 받아들여 미 군정청 최고 정무관 겸 남조선과도입법의원 특별 의정관으로 초빙받아 1947년 6월1일, 미국에서 출발해 한국으로 귀국했다. 서재필이 귀국하자 김규식, 여운형, 이승만, 김구 등은 일제히 공항에 나가 서재필을 환영했다.

필라델피아 다운타운
필라델피아 다운타운

이승만은 친히 환영사를 발표해 개화파 선배이자 스승인 서재필을 극진히 대접했으나, 뒤에 미 군정청 사령장관 하지가 자신을 견제할 목적으로 귀국시켰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서재필을 적대시했다.

서재필의 귀국은 하지가 거의 1년 전인 1946년 8월부터 여러 차례 요청해서 이뤄진 것으로, 한때 하지는 서재필을 이승만의 대안으로도 고려했다. 그러나 서재필은 대한민국의 대통령직 제의에 회의적이었다.

5.10 총선이 끝나고 제헌국회가 개원한 다음 날, 정일형, 백인제, 이용설 등을 비롯한 지도층 인사들이 서재필을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으로 추대하려는 운동을 시작했다. 6월29일에는 서 박사 추대 연합준비위원회까지 만들어졌다. 서재필 추대 연합준비위원회의 활동이 가시화되자 이승만의 독립촉성국민회에서는 서재필이 미국 국적임을 문제 삼아 반대했다. 7월 초, 백인제, 최능진, 김대중을 비롯한 1,929명이 서재필에게 ‘한국 초대 정부 대통령으로 추대하고자 하니 대통령 출마를 승낙해 달라’는 내용의 요청서를 보냈으나, 서재필은 ‘미국 시민으로 남겠노라’며 7월4일 공식 불출마 성명을 발표했다.

서재필이 당시 대통령이 됐다면, 우리 역사는 어떻게 바뀌었을까? 부질없는 상상이지만, 우리 역사는 다르게 흘러갔을 게 분명하다.

1948년 9월 미국으로 돌아온 서재필은 의료활동에 전념했다. 그러나 곧 병마로 쓰러졌고 후두암과 방광암 진단을 받았다. 그는 1950년 6월 미국에서 방송을 통해 한국전쟁 소식을 접했고, 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1월5일 펜실베이니아주 필라델피아 노리스타운 몽고메리 병원 병실에서 향년 88세로 타계했다. 그의 장례식은 필라델피아 메디아 교회에서 간소하게 치러졌다.

이것이 서재필기념관에서 인터넷으로 찾아본 서재필의 일생이다. 기념관에서 내려와서 바깥 길로 접어드는데 ‘뮤리엘 제이슨 파크’라는 작은 팻말을 접했다. 서재필 박사의 부인 이름을 딴 집 앞 어귀의 작은 숲 공원이었다.

서재필로 태어나 필립 제이슨이란 이름으로 살았던 그의 일생을 살펴보면서, 조국에 대한 사랑이라는 게 과연 무엇일까를 다시 한번 곱씹어 봤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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