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중국 조선족 애국 시인 윤동주’에 대한 오해와 진실-2
[기고] ‘중국 조선족 애국 시인 윤동주’에 대한 오해와 진실-2
  • 최미성 재한조선족문학창작위원회 회원
  • 승인 2019.07.19 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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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조선족’이라는 명칭의 진실

‘조선족은 중화인민공화국이 성립되면서 중국 국적을 부여받은 한민족 계열의 소수민족이고, 1910~30년대 만주에 거주한 사람들과 다르다’고 하는 것을 보면, 전자의 경우는 국적을 취득했고 후자의 경우는 국적과 상관없이 거주로 보기 때문에 둘이 다르다고 하는 것으로 짐작된다. 사실 근대 간도에 거주했던 한인들의 국적 문제는 한중일 세 나라의 이해관계가 뒤엉켜진 아주 복잡한 문제다. 해방 전 한국과 중국은 모두 명확한 국적법이 없었거나 국적법이 만들어진 다음에도 지금처럼 국적의 경계를 명확히 하여 출입국통제를 철저하게 실행하지 못했다. 또 국적법은 국제적으로 통일된 것이 아니라, 나라마다 자국의 여러 상황에 비추어 제정하고 관리하는 부분이기 때문에 서로 일치하지 않고 모순될 수 있다. 

실제로 당시 한국은 국민이 다른 나라 국적을 가져도 자기 나라 국적이 자동 말소되지 않고 그대로 유지되는 상황이었고, 중국은 만주국 성립 이전에 국적법을 만들고 간민들의 중국입적을 강요하지만, 이후 만주국에 대한 일본과의 협약과 모순되는 점이 발생하자 중국과 일본 쌍방 모두 각자의 수요와 이익을 위해 간도 이주 한인의 국적 문제에 명확히 규명하지 못했다. 

한마디로 간도에 이주한 한인의 국적문제는 간도에 대한 통치권과 직결됐기 때문에 중국과 일본의 태도와 국적법 규정이 달라서 해결되지 못한 문제였다. 때문에 간도에 이주한 한인들은 간도와 고국을 비교적 자유롭게 넘나들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중화인민공화국이 성립된 후 국적법에 대한 관리가 엄격해짐과 더불어 중국으로 이주한 한민족은 중국의 소수민족으로 분류되고 중국 공민으로서의 합법적인 지위를 얻게 됐다. 

여기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조선족’의 역사를 ‘조선족’이라는 명칭의 역사와 혼돈해 중화인민공화국의 성립으로부터 보는 우를 범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아야 한다는 점이다. 중화인민공화국이 성립된 후 새롭게 생겨난 것은 ‘중국 조선족’이라는 명칭이지, 조선족이라는 민족공동체가 아니라는 점을 명기해야 한다.

‘중국 조선족’이라는 명칭의 역사와 중국 조선족의 역사를 동일시한다는 것은 바꾸어보면 한국이라는 명칭의 역사와 한국인의 역사를 동일시하는 것과 별반 다를 바 없다. 한국(대한민국)이라는 명칭이 생겨난 다음부터 한국인의 역사가 시작된 것은 아니지 않은가. 예를 들면 세종대왕은 한국이라는 명칭을 사용하기 전에 존재한 역사 인물이니깐 한국 사람이라고 하면 안 된다고 억지를 부릴 사람은 없을 것이다.

조선족이라는 명칭이 생겨나기 전이라고 해서 윤동주를 조선족이라 해서는 아니 된다는 논리대로라면, 본적이 함경북도인 윤동주를 한국인이라고 말하기보다는 조선사람이라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하지 아니한가. 지금의 한국인 또는 한인이라는 명칭도 조선족이라는 명칭처럼 조선인에서 갈래지어 나왔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윤동주는 대한민국 시인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중국 조선족 시인이며, 한국인과 중국 조선족 사이에는 바로 윤동주라는 분모가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또 주목해야 할 다른 한 가지는 ‘중국 조선족’이라는 호칭에서 ‘중국 사람’ 또는 ‘중국인’이라는 호칭으로의 확장 문제다. 중국에서는 윤동주에게 ‘중국 조선족’이라는 호칭을 붙여주었지, ‘중국 사람’이나 ‘중국인’이라는 호칭을 붙여주지는 않았다. 윤동주 생가의 표지석에도 ‘중국 조선족 애국 시인 윤동주’로 돼 있고, 바이두 백과사전에도 국적을 중국으로 표기하고 민족을 조선족으로 표기하여 따지고 보면 역시 중국 조선족으로 분류되어 있다. 

중국에서 윤동주를 ‘중국 사람’ 또는 ‘중국인’이라 주장한다며 당황스러워하는 경우라면 ‘중국 조선족’이라는 호칭을 ‘중국 사람’ 또는 ‘중국인’이라는 호칭으로 확대해석하는 것은 적합한 것인지 짚고 넘어가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중국 조선족’이라는 명칭을 ‘중국 사람’ 또는 ‘중국인’과 같은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조선족의 민족성을 부정하는 우를 범하고 있는 것이며, 지금까지 민족성을 지키기 위해 안간힘을 써온 조선족 사회의 노력을 한순간에 헛되이 하는 우를 범하는 것이다.

중국 조선족 역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19세기 60년대부터다. 18세기 중엽 이후 조선 북부의 가난한 농민들이 엄격한 국경 봉쇄를 뚫고 두만강을 건너서 농사를 짓기도 했고, 19세기 초엽 이후 그 수가 늘어나기도 했지만, 본격적인 이주가 시작된 것은 아니었다. 그러다 1861년, 1863년, 1866년에 대수재가 조선 북부지역을 휩쓸었고, 1869년과 1870년에는 대한재가 연속 덮치면서 조선 북부의 많은 농민이 생활고를 헤치고자 분분히 두만강을 건넜다. 

‘간도 땅’으로의 이주를 본격화시킨 다른 한 가지 이유는 ‘간도 땅’에 대한 청나라의 봉금령 해제였다. 명나라를 멸망시키고 지금의 베이징에 도읍을 정한 청나라는 장백산(長白山)을 저들 조상의 발상지 ‘용흥지지(龍興之地)’로 간주하여 강희제 집권 기간(1669-1681)에 흥경(興京) 이동, 이통주 이남, 두만강 이북의 광활한 지역을 봉금 지대로 선포하여 중국인과 한인의 이주를 엄금하는 조치를 내렸다. 

1712년에 청조에서 장백산에 정계비(定界碑)를 세운 후 봉금정책은 더 강화됐고, 따라서 봉금지대는 인적이 드물고 황량한 곳이었다. 그러다가 18세기 중엽부터 산둥, 허베이 등지의 관내 한족들이 봉금정책에도 마다하고 요둥, 지린 지역을 거쳐 지금의 연변지역에 밀려들기 시작했고, 조선 북부의 빈고농민들도 조선의 엄격한 국경 봉쇄를 무릅쓰고 두만강을 건너 농사를 짓기에 나섰다.

이에 청나라에서는 1848년부터 해마다 변방 순찰병을 파견하여 월경한 한인들을 쫓아내려고 했지만, 월경하는 한인의 수는 늘어만 갔다. 조선에서도 처음에는 월강죄를 적용하여 월강하는 조선인을 법으로 다스리며 막아 나섰지만, 1883년 서북경략사(西北經略使) 어윤중은 북관 6진을 순시하고 조정에 올린 보고에서 “월강하는 죄인을 다 죽일 수 없다(越江罪人不可盡殺)”라고 한 것처럼 앉아서 죽기를 기다릴 수 없어 목숨을 내걸고 월강하는 사람들을 막아낼 수 없었다. 그리하여 이조 조정에서도 월강죄를 해제하고 두만강 이북에 대한 이주를 승인하게 됐다.<계속>

필자소개
1982년 중국 길림성 용정시 출생
중국 연변대 조선언어문학 학사·석사
한국 고려대 국문과 현대문학 박사
최미성 재한조선족문학창작위원회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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