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중국 조선족 애국 시인 윤동주’에 대한 오해와 진실-3
[기고] ‘중국 조선족 애국 시인 윤동주’에 대한 오해와 진실-3
  • 최미성 재한조선족문학창작위원회 회원
  • 승인 2019.07.20 06: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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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조선족’이라는 수식어의 의미

제2차 아편전쟁 후 청나라는 러시아의 침략에 대처하기 위해 간도지역에 정변군(靖邊軍)을 주둔시키고, 1881년에 봉금을 폐지하고 한족 이민을 받아들여 ‘이민실변(移民實邊)’ 정책을 실시하고자 황무지 답사를 하게 되는데, 이때에야 관부는 간도 땅이 조선 이주민들에 의해 많이 개간되고 있음을 알게 됐고 잇따라 훈춘에는 ‘간광총국(墾礦總局)’이 설치되기도 했다. 

처음에 청나라에서는 조선 이주민을 몽땅 쫓아내려고 했다. 조선 정부에서도 ‘2년 내에 데려가겠다’고 하면서 조선인의 월강을 막아섰으나 소용없었다.

그리하여 지린장군 명안(銘安)과 오대징(吳大徵)은 조선 이주민을 전부 귀환시키지 않으면 치발역복 시켜 청나라 국적에 편입시키자고 조선에 간 통상대신 위안스카이(袁世凱)를 통해 이조 통치자들과 교섭한 한편, 조선 이주민들을 쫓는다면 이들이 개간한 땅이 황무지로 된다면서 이주를 허락하자고 청나라 조정에 상서했다.

1885년에 청정부에서는 봉금령을 완전히 해제하여 조선 이주민들을 받아들이고 이주민들의 거주권과 생존권을 승인하고 간민(墾民)들에게 입적권(入籍權)과 토지사용권을 행사할 수 있도록 허락했다. 

윤동주 집안의 중국 이주과정을 보자면, 1886년 윤동주의 증조부인 윤재옥이 가족을 거느리고 조선 땅에서 두만강 너머로의 이주 물결을 타고 오늘의 중국 용정시개산툰진자동촌에 처음 자리를 잡았다가 1900년에 용정 명동촌으로 이사를 했다. 그리고 윤동주는 1917년에 용정 명동촌에서 태어나서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용정에서 다녔다. 윤동주는 짧은 28년 생애 중 20년을 용정에서 보냈고 유해도 그의 고향인 용정에 묻혔다. 그러나 윤동주의 중국 국적 취득 여부는 아직까지 증거자료가 불충분하다.

1910년에 최초의 국적법인 ‘대청국적조례’와 ‘대청국적조례실시세칙’을 반포하고 1912년에는 ‘중화민국국적법’과 ‘국적법실시세칙’을 제정하는 등 중국 정부는 조선 이주민이 일본의 세력 범위에 진일보 들어가는 것을 막고 일본세력의 팽창을 억제하기 위하여 중국 국적에 가입하지 않는 조선 이주민에 대해 압력을 가했다.

그리하여 조선 이주민 입적 고조가 한때 일어났는 바, 같은 해에 ‘간민회’가 조직되어 조선 이주민의 입적 운동을 발동하고 조선 이주민 학생을 중국 관립학교에 입학시키는 운동을 전개했다. 이주민 간민회의 주요책임자인 김약연은 윤동주의 외숙이었다.

간민회의 토의를 거쳐 이동춘과 김립이 함께 만세대의 조선 이주민을 대표하여 1914년에 베이징에 가서 민국국무원에 ‘만호청원귀화입적서’를 제출했다. 간민회의친중배일(親中排日)의 적시적인 조치였는데 이는 중화민국 국무원의 비준을 받았고 명동촌의김약연, 윤하현, 문병구, 남종구, 김하규 등 5대 가족을 포함한 명동 일대의 조선 이주민들이 국적을 취득했다고 전해져 온다.

그러나 김약연이 중국국적을 신청했다는 것으로 윤동주도 중국 국적을 취득했다고 단정 짓기는 어렵다. 윤동주의 국적을 증명할 만한 증거자료들은 직접증거가 아니라 정황증거들뿐이다. 

‘조선족 시인’이 아니고 ‘중국 조선족 시인’이라고 하는 것은 윤동주를 중국에 ‘강제로’ 귀속시키고자 한 것이 아니라 ‘조선족’의 원래 명칭이 ‘중국 조선족’이기 때문이다. 이는 중국에서 애당초 ‘조선족’과 ‘조선 민족’을 동일시했기 때문에 굳이 ‘중국’이라는 수식어를 넣어서 중국의 소수민족을 일컫는 이름으로 특정한 것이라 볼 수 있다. 말하자면 ‘중국 조선족 시인’이라는 문구에서 ‘중국’과 ‘조선족’이 각각 ‘시인’을 수식하는 것이 아니라, ‘중국’은 ‘조선족’을 수식하고, ‘중국 조선족’이 하나의 명칭으로 다시 ‘시인’의 수식어가 된다는 말이다. 

지난 5월20일부터 22일까지 한국문학번역원이 마련한 “소통과 평화의 플랫폼”이라는 행사와 관련 기사가 참으로 바람직했다. 탈중심의 중심, 모두가 중심이라는 시각으로 한인 문학을 열린 시각으로 바라보고 소통하는 장을 만들고자 한 기획 의도가 좋았고, 조선족은 독자적인 문단을 조성하고 문학지도 발간해왔다면서 윤동주 시인도 조선족 작가라고 써준 경향신문 문화면의 탈중심적이고 우호적인 기사 내용에 큰 박수를 보낸다. 

아리랑을 중국 조선족이 부를 때는 조선족 민요가 되고 한국인이 부를 때는 한국 민요가 된다. 한복을 중국 조선족이 입으면 조선족 전통복장이고 한국인이 입으면 한국 전통의복이다. 김치를 중국 조선족이 담그면 조선족 전통음식이 되고 한국인이 담그면 한국 전통음식이 된다. 이와 마찬가지로 중국에서의 윤동주문학은 조선족 문학이고 한국에서 윤동주 문학은 한국문학이다. 뺏고 빼앗길 것이 없이 이 모두가 공동의 민족문화유산이다. 

중국에서 윤동주를 ‘조선족 시인’으로 정의 내리는 것은 지금까지의 ‘민족시인’이란 평가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한국 사람들에게도 윤동주를 ‘조선 족시인’으로 고쳐부를 것을 요구하는 이는 아마 없을 것이다. 윤동주는 여전히 한국 대표 시인이다.

중국에서 윤동주를 ‘중국 조선족 시인’으로 평가하는데 대해서 한국인도 무작정 반감을 가질 것이 아니라 조선족 이주역사, 윤동주 집안의 이주사와 윤동주의 출생지, 조선족 사회에서의 윤동주 연구와 같은 역사적 사실을 이해하고 윤동주를 걸출한 ‘조선족 시인’으로 정의 내리는 조선족 사회의 현실적 과제를 들여다보고 옳고 그름을 판단해야 할 것이다. 

‘중국 조선족 시인’이라는 수식어 하나로 인하여 조선족 사회는 많은 변화를 가져올 수도 있다. 예를 들자면 첫째, 조선족 문학사 기술에 있어 든든한 기둥뿌리가 생기고 한결 당당한 문학사를 기술할 수 있을 것이다. 둘째, 윤동주를 통하여 자기 민족에 대한 인식을 바르게 하고 아울러 젊은 세대에게 민족적 자부심과 민족적 사명감을 불어넣어 줄 수 있을 것이다. 셋째, 윤동주를 통해 조선족의 이주사를 보여줌으로써 조선족 사회와 한국  사회의 민족적 유대감을 끈끈히 할 수 있을 것이다. 

‘중국 조선족 시인’도 좋고, ‘민족시인’이나 ‘한국대표 시인’도 좋다. 부르는 방법은 달라도 결국은 우리민족의 자랑스러운 시인이고 찬란한 민족문화유산이 아닌가. 비생산적이고 파괴적인 경계를 만들지 말고 ‘한국의 대표 시인’이면서 동시에 걸출한 ‘중국 조선족 시인’이란 두 날개를 달아주어 마음껏 세계를 비행할 수 있게 하는 것이야말로 윤동주를 향한 진정한 사랑일 것이다.<끝>

필자소개
1982년 중국 길림성 용정시 출생
중국 연변대 조선언어문학 학사·석사
한국 고려대 국문과 현대문학 박사
최미성 재한조선족문학창작위원회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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