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광호 기자가 만난 북녘땅-6] 북한 안내원이 외조모친척 찾아줘
[송광호 기자가 만난 북녘땅-6] 북한 안내원이 외조모친척 찾아줘
  • 송광호 재외동포신문방송편집인협회 고문
  • 승인 2020.10.05 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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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은 어떻게 바뀌어왔으며, 또 어떻게 변화해 갈 것인가? 1989년 이래 북한을 8차례나 방문해 취재한 송광호 토론토 주재 언론인이 방북 때마다 보고 느낀 점들을 시리즈로 정리했다. ‘바뀌어온 북한’에 초점을 맞춘 이 글은 현재와 같은 남북경색국면에서 긴 눈으로 북한의 새로운 변화를 조망하는 데 도움을 줄 것으로 보인다.<편집자주>

평양 시내에 걸린 달라진 구호. ‘자기 당에 발을 붙이고 세계를 보라!’
평양 시내에 걸린 달라진 구호. ‘자기 당에 발을 붙이고 세계를 보라!’

“아니 어디 갔다가 이제 오는 거요?” 호텔 라운지에서 침울한 표정으로 앉아있던 책임지도원이 소리쳤다. “그렇게 ‘자유주의’로 나가기요?” 하며 와서 앉으라고 손짓한다. “바(Bar)에서 만납시다.” 그들을 무시한 채 그대로 안쪽 바(Bar)로 향했다. 삿포로 깡통 맥주를 들이켜는데 책임지도원이 혼자와 다그친다. “도대체 어디 갔었소?” “평양지역을 모르니 다니는 데 시간이 걸렸어요. 이상한 행동 하지 않았으니 걱정 말아요.” “어디를 가면 얘기를 해 줘야지, 정말 어디 다녀왔소?” “힘들게 돌아다닌 걸 일일이 어떻게 말합니까. 정말 아무 일 없어요. 술이나 한잔합시다.” 그는 내가 나타나자 일단 안심됐는지, 대답 안 할 것으로 판단했는지 그냥 가 버렸다. 긴장이 풀리며 피곤이 엄습했다. 밤이 늦었다. “접대원 동무. 지금 술값은 외상이요. 내일 계산합시다.” 3층 호텔 방으로 돌아와 웃옷만 벗은 채 덜렁 누웠다. 내 일탈 행위로 선의의 피해자가 없기를 바랐다.

다음날 안내원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대해줬다. 내 행적을 그는 알아냈으리라. 개성 고아 출신이라는 연상의 이 R책임지도원을 만난 게 여러모로 다행이었다. 40대 중반인 그는 일반안내원들보다 상위직급이었고, 방북자들 요구는 웬만하면 들어주려 애썼다. 진정한 성의가 있었다. 안내원을 잘 만나는 것도 행운에 속한다. 대부분 북 안내원들은 따뜻하고 친절했다.

평양동물원
평양동물원

그러나 드문 경우지만 질 안 좋은 안내원이나 참사(간부)도 있었다. 해외가족 만날 때 동행한 한 안내원은 기분이 왜 상했는지, 북 주민(가족)을 겁박하는 경우를 본 적이 있다. 안내원은 가족 만남 현장에서 갑자기 북 가족에게 “금요 로동은 끝내고 왔소?”하고 퉁명스레 물었기 때문이다. 자못 시비조였다. (북 주민들은 1주일에 한 번 토요일에 학습 시간을, 금요일 하루는 노동시간을 갖는다. 일명 토요학습과 금요노동이다) 오랜만에 해외가족들이 만나는 남의 반가운 자리에 왜 심술을 부렸는지 모른다. 그때 북 주민들에게 금요로동이 존재함을 처음 알았다. 안내원은 해외가족이 미리 팁(?)을 안 줘 그랬었나? 이러한 사람이 해외영접국에 끼어있는 것이 이해 안 됐다. 북한 조직사회에도 결코 도움 안 되는 인물이라고 판단됐다.

“예. 금요로동 잘 끝냈습니다.” 비쩍 마른 노인은 훌쩍대기 시작했다. 노인은 왜 또 눈물을 쏟았는지 알 수 없다. 한편 이산가족 만날 때 당사자 가족 외엔 친구나 지인은 원칙적으로 동행시키지 않는다. 태권도 담당 간부급 C참사도 인간성이 별로 안 좋아 보였다. 무척 거만스럽고 일반 안내원들 위에 군림해 간부티를 냈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일수록 자신 상관에겐 아첨하고 이기적인 인간이 많은 법이다. 북 내부를 파악하는 한 미주교포는 “C참사는 중앙당에 속해 있다”고 귀띔했다. 이런 건 상관없다. 문제는 그가 거짓을 일삼고 사건을 조작하기 때문이다. 하루는 아침 식사 전 일찍 누가 호텔 방을 두들겼다. 문을 여니 굳은 표정의 C참사였다. “송 형! 새벽에 어디를 다녀왔소?” “예? 내가 어딜 다녀와…?” 왜 아침 식전 찾아와 엉뚱한 얘기를 묻는지 황당했다. 자주 방북하니 요주의인물로 찍혀있나. 고의든 아니든 한번 찔러보고 아니면 말고 식이다. 남이나 북이나 사람 사는 세계엔 별의별 인간이 있다지만 C참사 같은 사람은 드물었다. 헌데도 그는 해외 관련 부서에 10년 이상 참사직으로 포진돼 있었다. 의심 많고 부정직한 사람이 북 공무원으로 오래 존재함은 해외동포든 북한 사회든 불행이라고 본다.

평양 골프장과 캐나다 교포들
평양 골프장과 캐나다 교포들

또 나보다 몇 살 어린데도 어디서 ‘형’ 얘기를 들었는지 아무한테나 ‘형’ 소리를 남발했다. 아마 자기 딴에는 일반적인 ‘선생’ 호칭보다 친근감을 나타내려 했는지. 하지만 가까운 사이도 아닌 연상의 상대방에겐 듣기 거북했고, 별 좋은 기분이 아니었다. 언젠가 평양국제태권도 취재 후 원산과 금강산 재방문을 신청했을 때다. 이를 알고 C참사가 동행하겠다고 내 의향을 물은 적이 있었다. 차라리 묻지 않고 끼어들면 될 것을. 나는 신청 당시 안내원과 함께 가기로 약속을 해둔 터였다. “아니오. C참사 동지는 직위가 높으니 금강산 갈 기회가 많지 않겠소? 나는 안내원과 미리 약속했으니 양보해 줘야 합니다” 하고 고집했다. 그때 일을 잊지 않고 무슨 앙심을 먹었는지는 알 수 없다.

안내원비용 얘길 잠깐 하자. 어느 안내원이든 안내비는 따로 없다. 북미교포 경우 이산가족 경우에 동행 안내자에게 팁을 준다. 정해진 값은 없지만 보통 미화 1백 달러 미만의 비공식 안내 수수료다. 팁 관련 생활방식에 익숙한 북미교포들에겐 자연스러운 행위다. 다른 경우(관광이나, 비즈니스 등)는 따로 팁을 주지 않는다. 단지 개인 방북 경우 체류 기간 내내 함께한 안내원과 운전기사에게 작별할 때 얼마라도 인사로 주는 것이 일반화돼 있다.

평양 공항
평양 공항

해외동포위원회(사업국) 명칭도 자주 바뀐다. 부에서 국으로, 처로 달라져 헷갈릴 때가 있다. 사실 방북자로선 상관없는 일이다. 안내원들은 유럽동포, 재중동포, 재일교포(9국), 재미동포(5/6국) 담당 등으로 소속이 나뉘어 있다. 그러나 서방세계 조직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점은, 본인이 일하는 부서 이외 타부서 관련해서는 바로 옆 근무라도 전혀 내용을 모른다는 사실이다. 알지도 못하고 알려고도 않는다.

외국 방문객을 위한 화폐통용도 30여년 계속 바뀌어왔다. 방북 초기 1980년대에는 해외교포가 쓰는 돈은 달러(미화)였다. 수년 뒤 중국 돈도 병행해 사용하더니, 한동안 유로화가 교환기준이 됐다. 현재는 다시 달러(미화)가 대세를 이루고, 중국 돈도 쓴다. 유로화는 거의 사라져 버렸다. 초기 상태로 되돌아온 셈이다. 그러나 어느 상점, 백화점이든 모든 상품가격은 북한 돈으로 매겨져 있다. 장소에 따라 북한 돈(원화) 대신 달러로 계산하기도 한다. 수년 전부터는 해외방북자에게 현금카드(플라스틱/첨부)를 발부해 사용케 하고 있다. 일정 금액을 미리 입금한 뒤 발급받은 카드로 사용할 때마다 결제한다. 신용(크레딧)카드가 아니니 입금액을 초과해 사용 못 한다. 북미 경우의 현금카드(Debit 카드)와 같다.

황해도 정방산 성불사 입구
황해도 정방산 성불사 입구

상품가격 하나를 예를 들자. 현재 미화 1달러가 북한 돈 8천원 정도다. 상점에서 판매하는 선풍기가 미화 계산으로 5달러. 이는 해외방북자 가격이고, 주민은 이중 가격구조로 된 듯싶다. 평양 등지 대도시에는 장마당(일종의 벼룩시장)이 있는데, 해외교포 출입도 가능하다. 평양 경우 여러 구역 장마당 가운데 통일거리 장마당이 가장 크고 이용자가 많다. 가격이 상점보다는 좀 낮고 특히 과일과 남새(채소) 종류가 많고 신선해 인기다. 지금은 코로나19로 인해 많은 변화와 난관이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전에는 북정부기업소에서 명절 때 고기, 기름, 맛내기(화학조미료) 등을 무료공급해 주기도 했다. 올해 2020년 추석 때는 코로나19 영향으로 쾌 타격이 컸으리라 본다.

북한 환경은 무척 낙후돼 있다. 특히 지방(시골) 주거지는 한국보다 수십 년 뒤떨어져 보인다. 살풍경이다. 묘향산 관광 중 차창 밖을 응시하던 옆자리 미주교포가 말없이 눈가를 닦았다. “왜 그러세요?” “아, 북한에서 태어나지 않은 것이 천만다행이라고 생각돼요. 하나님에 감사하는 마음입니다.” 언뜻 보기엔 피폐한 환경 속의 북 주민들에겐 무슨 낙이 있을까 싶었다. 한 미주교포는 그들에겐 생활은 없고 오직 생존할 뿐이라고 혀를 찼다. 하지만 북 일반주민이랑 웃음이 있었고 정(情)과 눈물이 존재했다. 사람 사는 세계는 어디든 비슷해 보였다. 북에도 빈부 차이가 컸다. 물질만이 꼭 만능이 아닐지 모른다. 근본 문제는 온 주민을 꼼짝 못 하게 옭아맨 잔혹한 독재정치다.

개인용 소형 선풍기
개인용 소형 선풍기

황해북도 정방산을 방문할 때였다. 정방산은 유명사찰인 성불사가 있다. 이은상 작곡 ‘성불사의 밤’ 가사가 절로 떠올랐다. “성불사 깊은 밤에 그윽한 풍경소리···” 절 입구 건너편에 주민 몇 사람이 보였다. 한 북한 여성이 깔깔대며 큰 웃음을 터트렸다. 평양에선 가끔 웃음소리를 듣지만, 시골에서 듣는 요란한 웃음소리는 내 귓가에 한참 머물렀다. 시골에도 그런 웃음을 짓는 주민이 있다니. 행복한가. 또 원산에서 금강산을 가다 중간지역인 동해 부근 ‘시중호’(천연기념물/호수)에서 쉴 때다. 얼마간 북강원도에 있었다는 운전기사 얘기다. 동해안 남쪽에서 배가 잘못 표류해 북으로 온 한국인 어부 얘길 들려줬다. “그와 함께 어디를 갔다가 좀 늦었는데, 빨리 집으로 돌아가자고 재촉하는 겁니다. 아니 자기 집이 남쪽이지, 여기가 자기 집입니까” 하며 눈이 벌겋게 충혈되는 것이다. 남쪽 그 어부 집에서 그를 얼마나 기다리겠는가를 눈물을 닦았다.

개성 출신 R책임지도 안내원 얘길 다시 꺼낸다. 수년 뒤 그는 평양 공항 공항장(책임자)이 돼 있었다. 당시 그를 만난 게 내게 얼마나 행운이었던가를…. R지도원이 상상도 못 했던 북강원도 내 외조모친척을 너무 쉽게 찾아줬기 때문이다. 이산가족신청조차 않았던 외할머니 친척이다. 서울태생인 나는 이산가족이 아니었다. 부친 쪽은 북강원도 대지주로 해방 전 서울에도 이미 집에 두세 채 있었다. 해방 후엔 식구들 전부가 남으로 내려와 북에 남아 있는 가족은 단 한 명도 없었다. 다만 외가 쪽으로 북강원도에 외조모 친오빠 두 명 친척만 있다고 들었다, 외조부는 일찍 타계했고, 어머니는 외동딸로 아무 형제도 없었다. 해방 후 내가 서울에서 태어나자 외조모는 나를 돌본다고 38선을 넘어왔다 고향으로 다시 못 돌아갔다. 어느 때면 가끔 고향과 형제를 그리며 눈물짓던 모습을 기억한다. 그 외조모친척을 R이 하루아침에 찾아준 것이다.

평양 지하철 개선역
평양 지하철 개선역

두 번째 방북 시기였다. 취재 일정이 끝나갈 때 R지도원이 뜬금없이 물었다. “송 선생은 우리 조국에 가족들이 아무도 없소?” “없어요. 뿌리는 (북)강원도지만 해방 후 모두 서울로 내려왔지요. 다만 어머니고 향도 북강원도인데 외할머니 친오빠만 두 명 있다고 들었어요. 외할머니는 38선 넘어 서울 딸(어머니) 집에 왔다가 영영 고향으로 못 가고 세상 떠났지요.” “(북)강원도 어디요?” “이천군 가래을 마을이라고, 깊은 산골짜기라던데.” “어? 이천군? 거긴 내 가까운 친한 동무가 책임자인데. 이천군은 나도 가본 적이 있소.” “그래요? 나는 가족 찾기 신청도 안 했지요. 촌수로 따져 가까운 친척도 아닌 것 같아서.” “이름과 나이는 알고 있소?” “외조모 조카 이름은 알지만, 나이는 몰라요. 외조모 오빠들도 다 세상 떠났겠고, 성은 장 씨고 조카 이름은 장재웅이라 합니다. 외조모가 늘 장재웅이, 장재웅이 해서 외우다시피 했지요. 현재 나이는 아마 65세 정도? 60대 중반이 상이 될 것 같네요.” “찾고는 싶소?” “찾으면 좋겠지만 갑자기 찾을 수 있겠어요?” 그와의 대화는 그걸로 그쳤다. 며칠 후면 평양을 출국해야 한다. 한국에선 경기도 이천을 잘 알아도 북강원도 이천 지명을 아는 사람은 없었다. 역시 북쪽 지역이니까 금세 아는 것 같다. 더구나 지인이 있다니.

이틀 후 아침 안내원은 호텔 프런트로 나를 불러냈다. 내가 나타나자 그는 어디론가 전화를 돌리며 “아, 동무. 수고하오. 근데 당원입니까?” 하는 소리가 들렸다. 순간적으로 외조모친척 얘기라고 직감했다. 찾아낸 것이다. 당원이든 아니든. 세상에··· 이렇게 해서 수십 년 떨어져 있던 외가 친척을 기적같이 찾게 됐다. 도대체 나 같은 이런 일도 있을까. “송 선생! 시간이 없어 강원도 이천군까지는 못갑니다. 이천에서 가까운 도시가 사리원(황해북도)이요. 사리원에서 만나기로 조직했소. 그땐 여기 특별 일정도 없으니 모레 아침 일찍 차로 떠납시다. 친척과 사리원에서 만나 점심 후 평양으로 다시 돌아옵시다.”(계속)

북한 화장품. 모든 상품에 북한돈이 표시돼 있다.
북한 화장품. 모든 상품에 북한돈이 표시돼 있다.

필자소개
강원도민일보 북미특파원, 재외동포신문방송편집인협회 고문
대한민국 인권상 수상, 관훈클럽 국제보도상 수상, 한국신문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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